소설리스트

극악무도-56화 (56/143)

56화. 도착

2017.10.15.

대화를 마친 유서하는 진무량과 함께 상연의관으로 돌아왔다.

어깨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내며 두 사람이 의관 내부로 들어가려던 때, 의원 하나가 바쁜 걸음으로 유서하를 향해 다가왔다.

“일행분이 의식을 찾으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의 유서하는 순간 놀라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 바로 가볼게요.”

유서하는 곧바로 견무겸이 치료받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견무겸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전신에는 수없이 침이 꽂혀 있었으며, 아직도 다 낫지 않은 부상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견무겸은 유서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윽!”

유서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는 견무겸 곁으로 다가가, 그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괜찮으니까 누워 있어.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해.”

“죄송합니다. 헌데 제가 어떻게 여기에? 아가씨께서는 또…….”

성현골에서 의식을 잃었던 견무겸은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당장은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됐어. 자세한 건 몸이 회복되는 대로 천천히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일단 지금은 푹 쉬어.”

“알겠습니다.”

진무량은 느긋한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유서하와 달리 진무량은 견무겸이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렇기에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으나, 그 도중에 문이 열려 있는 견무겸의 방을 지나게 된 것이다.

자연스레 견무겸의 방 안을 들여다보게 된 진무량은, 멈추지 않고 걸어가면서 비웃음을 띤 목소리로 말했다.

“용케 살아있군. 끈질긴 생명력은 가히 벌레 같은 수준이야.”

일부러 들으라고 말한 것이니 견무겸이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저놈이!”

흥분하여 당장 몸을 일으키려 하는 견무겸을 저지하며 유서하가 말했다.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져. 언변은 조금 얄미울지 몰라도, 이번만은 진무량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

견무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무량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굳이 유서하에게 듣지 않아도 대충 상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은 구중련을 격파했다는 뜻. 그걸 행한 자는 분명 진무량이었을 것이다.

견무겸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헌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아직 영사문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어.”

“이럴 수가. 혹시 저 때문에 아직 벗어나지 못하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견무겸을 향해 유서하가 말했다.

“적포신군의 도움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니, 당분간은 안전할 거야.”

“적포신군이 왜…… 아니 그렇다면, 진무량에 대한 것도 알고 있는 것입니까?”

유서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견무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진무량과 비천검문과의 관계를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으로 오던 중 적포신군이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진무량의 대답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약간 주춤거리던 유사하가 말을 이었다.

“알려줄 생각 없으니까 묻지 말라고…….”

“진무량이 적포신군에게 그리 말했다는 것입니까?”

견무겸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함께 행동하며 봐왔던 것으로 보건데, 진무량이 어떤 태도로 적포신군을 대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물론 입장을 바꿔 진무량이 적포신군의 비밀을 알고자 했다면, 적포신군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허나 아무리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적포신군에게 보인 진무량의 태도는 놀라웠다.

현 강호에서 적포신군에게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파 무인들은 적포신군에게 감히 말을 붙일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렇다 해도, 기본적인 예의조차 차리지 않는 행동이라니…….

유서하가 말했다.

“그 뒤로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적포신군도 분명 신경은 쓰고 있겠지.”

다만 영사문 입장에서 본다면, 비천검문과 진무량의 관계보다 구중련 쪽을 더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구중련은 영사문의 장로들을 살해했다. 실제로 묵위현의 첫 질문도 진무량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중련에 대한 것이었다.

묵위현이 진무량과 비천검문과의 관계를 알아보려 한다면 분명 그에 따른 대처를 준비해야겠으나, 그리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그에 대한 대처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견무겸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시려는 것입니까?”

“그래야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시간이…….”

민폐가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말 끌을 흐리는 견무겸을 향해, 유서하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 걱정 말고 휴식에만 전념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 다 함께 돌아가자.”

* * *

안휘성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철악산.

온갖 종류의 맹수들이 산다고 알려져 있는 철악산은,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대로 된 길도 나지 않은 철악산을 계속 오르다보면 산중턱에서 맑은 호수를 만나게 된다.

바닥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맑은 그 호수에는 항상 짙은 물안개가 끼어 있어, 자못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물안개 속, 호수에는 낚싯대가 하나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중년의 사내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길을 여유롭게 감상하는 중이었다.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그 사내는 힐끗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더니, 이내 낚싯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웬일로 손님이 찾아왔군.”

중년 사내의 말에 반응하듯, 부스럭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물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자네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나.”

안개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자는 강호에서 검선이라 불리는 유월천이었다.

유월천은 눈앞에 있는 중년 사내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을 찾은 것이었으니까.

그의 이름은 초진양(焦陣陽). 이름보다 더욱 잘 알려진 별호는 천기자(天氣子)였다.

초진양은 무공보다 두뇌로 이름을 떨친 자였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서책을 독파했다고 전해지며, 천기마저 읽어낼 수 있다는 풍문이 떠돌았을 정도의 인물이다.

초진양의 뛰어난 학식은 강호에 모르는 이가 없어, 한때 무림맹에서 군사로 초청하려 할 정도였다.

허나 어느 날 초진양은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방대한 학식을 익힌 뒤 원대한 꿈을 안고 출두한 강호는, 초진양에게 있어 실망스러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제 이익만 챙기려 하는 명문세가들과 그저 남을 꺾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 하는 문파들.

이상과는 완전히 다른 현실은 초진양에게 너무나 큰 괴리감으로 다가왔다.

한때는 초진양 또한 조금이라도 강호를 변화시키기 위해 힘썼으나, 결국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혹한 현실에 절망한 초진양은 은거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유월천은 잠깐이나마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초진양과 친분이 있었다.

초진양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유월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불청객이 찾아오려 그랬나 보군.”

“오랜만에 만난 지기를 너무 박대하는 것 아닌가. 자네를 찾기 위해 꽤나 고생했다네.”

구중련의 존재를 알고 난 뒤, 유월천이 가장 먼저 만나려 했던 인물이 바로 초진양이다.

결코 얄팍한 회유에 넘어갈 인물도 아니었으며, 구중련을 찾는 데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현암사를 방문했던 이유 또한 초진양을 찾기 위해서였다.

수소문을 통해 초진양이 머물렀다는 현암사를 찾았으나, 유월천이 당도했을 때는 이미 초진양은 그곳을 떠난 뒤였다.

유월천은 다시 한번 끈질긴 수소문을 통해 비로소 초진양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본래 초진양을 찾으려던 이유는 구중련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남궁세가에서 구중련이 흘린 서찰을 얻게 되고 난 뒤, 더욱 더 초진양이 간절해졌다.

구중련의 서찰의 적힌 암어는 그 누구도 해독하지 못했다. 유월천은 이 완벽한 암어를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을 초진양을 꼽았다.

초진양이 말했다.

“그러게 왜 굳이 어려운 발걸음을 해서 나를 찾은 겐가?”

“자네가 시간을 끄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나를 좀 도와주게.”

초진양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낚싯대와 짐을 챙기며 단호한 거절 의지를 내비쳤다.

“내가 시간을 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정도면, 자네가 한 질문의 대답이 뭔지도 알고 있겠구먼.”

짐을 챙긴 초진양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털썩.

갑작스럽게 들리는 소리의 초진양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월천이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이었다.

당황한 초진양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 유월천이 말했다.

“자네가 강호의 일에 관심을 끊었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네. 다만 이번에 내가 자네의 도움을 원하는 건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가 아니네.”

무릎을 꿇은 채 유월천이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강호를 드리우고 있네. 아직 본모습을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강호의 인사들까지 그들에게 넘어간 실정일세.”

“…….”

“그런 그들이 만약 검을 쥐고 일어난다면, 천하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했던 거대한 혈겁을 맞이하게 될 걸세. 나는 그것을 막고 싶네.”

“……나와 관련 없는 일이네.”

“나는 무의미하게 피가 흐를 것을 알고도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만은 내 반드시 막아낼 걸세. 그러기 위해서 자네가 필요하네.”

초진양은 무릎을 꿇고 있는 유월천의 가만히 모습을 쳐다보았다.

소싯적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유월천이다. 그런 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

게다가 유월천은 이제 한 사람의 무인이라고만 볼 수 없다. 명문 문파의 문주이자 모든 정파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존재.

그런 유월천이 직접 찾아와 머리를 숙이며 부탁을 한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자존심을 꺾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자, 그가 적대하는 세력의 강함을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여간 교활한 건 여전하군.’

초진양이 마음속으로 생각을 삼켰다.

아무리 강호와 연을 끊었다고는 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월천은 분명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자신이 그를 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어나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초진양이 말을 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 거처에서 듣도록 하지.”

철악산에 있는 초진양의 거처로 향하면서, 유월천은 자신이 파악한 구중련에 대해 설명했다.

초진양은 때로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나직이 신음을 흘리기도 하면서 유월천이 하는 말들을 신중하게 경청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초진양의 거처에 도착하게 되었다.

작고 허름한 초가집 마당에는 아름답게 조경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은 채 꾸민 마당은 소박하나 진정 정갈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운치 있게 지어진 초가집 뒤로는 철악산에 장엄한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초진양의 거처를 둘러본 유월천은 진정으로 감탄했다.

“참으로 잘 가꾸어 놓았구먼.”

“그래봐야 비천검문에 비할 수 있겠는가? 괜한 인사치레는 됐고,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게.”

천기자는 마당 가운데 놓인 평상을 가리키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초진양을 따라 평상에 앉으며 유월천이 말했다.

“빈말이 아닐세. 참으로 잘 꾸며 놓은 정원이야. 언젠가 은퇴를 하게 되면 이런 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네.”

“은퇴를 생각하고 있는가?”

“말이 그렇다는 걸세. 은퇴라니……. 내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

유월천은 말을 마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돌이켜보면 검을 쥐고 산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그러다보니 잘못된 선택을 한 적도 있었고, 옳지 않은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위를 지났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지난 과오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힘이 없는 정의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때로는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한없이 비정해져야 했다. 소중한 것을 저버리느니, 타인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이 낫다.

지금까지의 생을 돌이켜 보았을 때, 수많은 후회가 존재한다. 허나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의 원한이 있다면, 그 또한 자신이 감내해야 할 일이다. 그 업보로부터 피하거나 도망칠 생각 따윈 없다.

그렇기에 편안한 노후를 보내겠다는 생각은 그저 이상일 뿐이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월천을 향해 초진양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쓸데없는 생각을 좀 했네. 그보다…….”

유월천은 품속에서 구중련의 암어가 적힌 서찰을 꺼내 초진양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내 이것 때문에 자네를 찾아왔네. 해독할 수 있겠는가?”

유월천이 건넨 서찰을 받아든 초진양은 심각한 표정으로 암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일다경(15분) 정도 심도 있게 암어를 살펴본 초진양은 결국 서찰을 내려놓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암호의 형태일세.”

시름 가득한 목소리로 유월천이 물었다.

“방법이 없겠는가?”

초진양은 몸을 돌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지필묵을 가지고 와서 다시 평상에 앉았다.

붓을 집어 든 초진양은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초진양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유월천이 입을 열었다.

“무엇을 적고 있는 겐가?”

“제아무리 뛰어난 암어라 하더라도 반드시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걸세. 그걸 알아내는 방법은 다른 암어들을 살펴보면서 비교하는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암어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분명 지금까지 쓰이던 암어를 참고했을 확률이 높다.

배열, 모양, 혹은 다른 무언가를 이용하는 방법.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구중련이 쓰는 암어와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암어를 해독하는 것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다.

초진양이 붓을 내려놓으며 유월천을 향해 말했다.

“여기 적힌 서책들을 모두 구해오게. 이 암어를 풀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이니,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두 구해 와야 하네.”

“이것들이 있으면 암어를 해독할 수 있는 겐가?”

“일단 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시작해봐야겠지.”

“시간이 꽤나 필요하겠군.”

“아무래도 그럴 걸세. 만약 여기 적힌 서책들에 참고할 만한 암어가 없다면, 또 다시 새로운 서책들을 구해 와야 할 걸세.”

유월천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감추려 하는 구중련이 남궁세가를 공격하면서까지 되찾고자 했던 서찰이다.

결코 가벼운 내용이 쓰여 있지는 않을 터.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이 암어는 반드시 해독해야만 했다.

‘당분간은 비천검문으로 돌아갈 수 없겠군.’

초진양이 암어를 해독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건네기 위해서는, 당분간 여기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비천검문에 급한 볼일은 없었으나, 신경 쓰이는 것은 유서하와의 약속이었다.

‘잠시 기다리는 것뿐이니, 별일은 없겠지.’

유월천이 초진양을 향해 말했다.

“시간을 앞당길 수 있으면 좋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반드시 암어를 풀어야 한다는 사실일세.”

“내가 이 암어를 풀지 못한다면, 아마도 천하에서 이 암어를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걸세.”

초진양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풀지 못하는 암어는 없다는 말일세.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 * *

호남성 인근에 위치한 석정.

유독 검을 차고 있는 무림인들이 몰리는 곳 중 하나였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인근에 명문정파 비천검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정파인 비천검문을 방문하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찾아오는 방문객들 또한 꽤나 많았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석정을 찾은 무리가 있었다.

각자의 말을 타고 몰려온 이들은, 오랜 여행을 반증하듯 허름한 행색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얼추 백 명 정도로 딱히 정돈된 대열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으나, 어디에도 빈틈 따위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강호에 악명이 자자한 멸천대였다.

선두에서 백여 명의 멸천대를 이끌고 있는 연시우가 말했다.

“비천검문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연시우의 옆에서 말을 몰던 수하, 호현(胡賢)이 즉시 대답했다.

“이제 곧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먼발치를 바라보던 연시우는 가증스런 유월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구나.”

감출 수 없는 진한 살기가 연시우의 눈동자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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