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심마
2017.10.05.
흑색강기가 몸으로 스며들수록 진무량이 뿜어내는 기세는 점차 거세졌다. 그로 인해 진법의 공간마저 일그러질 정도였다.
구궁음양진에 몸을 숨기고 있는 유서하조차 진무량의 기운을 받아내는 것이 버거워 인상을 찌푸렸다.
유서하는 백살대가 성현골로 찾아오기 전, 진무량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 *
“이번에 내가 놈들과 겨룬다면, 넌 절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
평소와 같은 어조였으나, 유서하는 뭔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건 왜죠?”
“너를 공격할지도 모르니까.”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는 유서하를 향해 진무량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내가 익힌 무공의 근원은 너도 알고 있잖아.”
유서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삼켰다.
진무량의 무공의 근원은 결국 마공.
정파에서 수련하는 내공심법과는 완전히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정파의 내공심법은 탁한 것을 몰아내고 정순한 기운을 쌓는 것이다. 하여 수련하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크게 위험하지 않다.
그와 반대로 진무량이 익힌 마공은 단기간에도 큰 성과를 이뤄낼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공을 고수들이 훨씬 많아야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단기간에 익힐 수 있는 마공은 그만한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 위험의 정체는 바로 심마.
심마에 빠지면 이성을 잃고 오로지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두르게 된다.
통제하지 못하는 힘은 스스로를 죽이는 법. 그렇게 모든 내력을 탕진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한껏 신중해진 어조로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물었다.
“설마 심마에 빠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걱정스러운 유서하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진무량은 전혀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진무량이 말했다.
“아마도.”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거예요? 목숨이 걸린 문제잖아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진무량의 태도에 유서하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었다.
“왜, 걱정돼?”
“…….”
진무량이 농담을 건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유서하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심마는 일시적일 뿐이야. 실전에서 처음 펼치는 무공도 아니고.”
가볍게 조소를 띠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분명 다 잘될 거야.”
* * *
진무량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기세는 마치 날이 시퍼렇게 선 명검과 같았다.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수천 개의 검에 겨눠지고 있는 기분.
게다가 당장 목을 부러뜨리러 달려올 것만 같은 살기는 절로 위압감을 불러일으킨다.
디리리링―!
유서하는 떨리는 손끝을 애써 진정시키며 연주를 이어갔다.
완전히 변해버린 진무량의 기운을 감지한 사일성의 손에 땀이 맺혔다.
‘이 내가 긴장이라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려는 이성과 달리, 그의 본능은 귓가에 대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한순간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그대로 죽을 거라고.
“혹여나 나를 죽이는 것 외에 헛된 생각을 하고 있다면, 버리는 게 좋을 거다. 난 너와는 달리 일방적인 학살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든.”
점점 투박해지는 음성으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잠깐의 흥미라도 느낄 수 있도록 어디 한번 발버둥 쳐봐.”
사일성은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으로 용호쌍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진무량에게서 흘러나오는 흉악한 기세는 점점 더 사나워져갔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위기를 직감한 사일성은 진무량보다 한발 먼저 움직였다.
단숨에 치고나간 사일성은 용의 문양이 새겨진 앞으로 검을 뻗었다. 자연히 푸른 강기가 그의 검로를 타고 진무량을 향해 쏘아졌다.
선공을 취한 이점을 살려 사일성은 이어지는 초식으로 진무량을 압박했다.
허나 마치 한 수 앞의 움직임을 내다보는 듯, 진무량의 창은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사일성의 용호쌍검을 모두 받아냈다.
점차 당황한 기색을 나타내는 쪽은 오히려 공격을 퍼붓는 사일성이었다.
진무량의 움직임을 조금씩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속도에서 밀린다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상황.
허나 분명히 점차 진무량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내 사일성은 완전히 진무량의 신형을 놓쳤다.
쒜에에엑!
순식간에 뒤를 잡은 진무량의 거대한 창이 사일성을 향해 쇄도했다.
챙!
사일성은 순간적인 판단으로 간신히 진무량의 창을 막아냈다. 허나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탓에, 방어 자세를 불안정하게 취할 수밖에 없었다.
묵직한 진무량의 창은 그런 임시방편으로 완전히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드드득.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이내 사일성은 진무량의 창을 흘려보내면서 자세를 안정적으로 바꿨다. 그 순간, 가까이서 진무량과 시선이 부딪쳤다.
동공이 사라진 진무량의 눈동자. 그 속에는 오직 짙은 살기만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젠장할!”
사일성은 거칠게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자꾸만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지금까지 겨룬 상대들을 도륙할 때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 순간 느껴지는 흥분을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었기에 지금껏 수많은 자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허나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여태껏 겪어왔던 경험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온몸의 긴장감이 감돌았고, 심장은 미친 듯이 빨리 뛰고 있었다.
명확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문득 진무량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난 너와는 달리 일방적인 학살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든.
‘미친놈! 일방적인 살육을 즐기지 않는다면,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따위 순간을 즐기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사일성이 용호쌍검을 고쳐 잡았다. 속도로 밀린다면 더 많은 허초를 섞어 상대를 교란시키면 된다.
사일성은 공포를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지 않은 것이다.
허나 허초를 섞은 초식마저 진무량의 움직임을 멈추지는 못했다.
이내 날카로운 진무량의 찌르기가 사일성의 목젖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사일성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간신히 거리를 벌리는 듯했으나, 진무량은 어느새 사일성의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겠다는 것이냐!’
이어지는 진무량의 섬광과 같은 찌르기.
그의 거대한 창은 인체의 치명적인 급소들만을 노리며 사일성을 향해 수없이 파고들었다.
챙! 챙! 챙!
용봉쌍검은 허공을 수놓는 거대한 창을 간신히 비껴내는 데 성공했으나, 수없이 날아드는 창끝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는 없었다.
상처를 입으며 간신히 진무량의 창을 쳐내던 사일성은, 돌발적으로 진무량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번뜩이는 안광을 빛내는 사일성. 순간 그가 손의 쥔 용호쌍검이 각기 다른 빛을 뿜었다.
펑! 펑!
막대한 내력이 실린 검격은 근거리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그 여파로 인해 사일성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피해를 입을 것을 감수한 공격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일단 진무량의 공세를 멈춰야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멈칫.
사일성의 예상대로 순간 진무량의 신형이 멈췄다.
허나 그 이후에 행동은 사일성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푸욱!
진무량은 쥐고 있는 창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그었다.
“아아, 젠장…….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군.”
용형십삼식은 아직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은 무공. 그렇기에 진무량은 아직 용형십삼식 후반부 초식을 뜻대로 펼칠 수 없었다.
허나 그는 끝없는 수련을 통해 순간적으로나마 용형십삼식의 후반부 초식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바로 심마에 빠지는 것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마공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마공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끝없는 수련과 숱한 실전을 통해 진무량은 그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영원히 심마에 빠질 위험이 있으나, 그 대신 순간적으로나마 마공 최고의 경지인 극마의 지경까지 오르게 되는 것이다.
사일성이 진무량을 노려보며 말했다.
“뭐하는 짓이냐?”
“남 걱정할 여유는 없을 텐데.”
여유롭게 대답을 마친 진무량은 허공에 창을 한 바퀴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마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헛되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심마의 여파로 인해 잠재된 마공이 흘러넘치는 지금이야말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고의 적기.
‘다음번 일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진무량은 몸 안에 흐르는 모든 마공을 창끝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흑색강기가 다시 진무량을 중심으로 흘러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무량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흑색강기가 점차 용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용형십삼식이 정수를 이뤘을 때 발현되는 거대한 묵색 용이 진무량을 중심으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사일성 또한 진무량의 모습을 바라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진무량이 펼칠 일격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정면 승부밖에 없었다.
사일성은 최고의 절초를 펼치기 위해 모든 내력을 집중시켰다.
순간 공중으로 뛰어오른 사일성은 온몸을 회전시키면서 용호쌍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결코 섞일 수 없을 것 같던 두 가지의 용호쌍검의 기운이 합쳐지면서 빛나는 섬광이 만들어졌다.
‘양의쌍류검(兩儀雙流劍)!’
뒤이어 진무량의 거대한 창이 움직였다. 칠 척이 넘는 묵직한 창이 일직선으로 그어지며 허공을 찢어발겼다.
‘용형십삼식 제팔식 묵룡출두(墨龍出頭)!’
창이 휘둘러지는 순간, 진무량을 감싸고 있던 거대한 묵룡이 움직였다.
입을 쩍 벌린 묵룡은 어마어마한 폭풍과 함께 주변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앞으로 쏘아졌다.
콰과과과과광!
막대한 내력이 충돌하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허나 조금씩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양의쌍류겸의 기운이 점차 묵룡에 의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묵룡은 결국 양의쌍류검의 기운을 삼켜버리고, 그 뒤에 있는 사일성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콰과과과광!
자욱한 흙먼지가 흩날리는 장내. 잠시 찾아온 적막을 사일성의 목소리가 깼다.
“쿨럭!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악을 쓰고 있는 사일성이었으나, 승부의 행방은 너무나도 명확했다.
깊은 내상을 입은 탓인지 사일성은 끊임없이 피를 토했고,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한 이빨자국 같은 상처만이 남아있었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사일성은 끝까지 발악했다.
“어디 다시 한번 덤벼 보거라. 이번에야말로……!”
사일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진무량이 말했다.
“죽을 때가 되니 네놈도 결국 똑같군. 겁을 먹고 발악하는 꼴이라니.”
사일성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보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제길!”
이내 진무량이 사일성을 향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막으로 네놈이 건드린 상대가 누구인지, 똑똑히 눈에 새기고 죽어라.”
* * *
그 순간, 구궁음양진에 변화가 생겼다.
연주를 이어가던 유서하는 갑작스레 진법에 침투한 자를 감지했다.
‘상대는 한 명. 누구지?’
침입자에 대해 알아보려는 순간, 진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유서하는 구궁음양진을 파훼할 수 있는 생문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곳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런 변화에 진무량 또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후우우우웅!
이내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한 거친 돌풍이 한차례 몰아치더니, 유서하가 펼친 구궁음양진이 깨졌다.
주변은 어느새 다시 대나무가 가득한 성현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대나무가 가득한 숲속을 헤매고 있는 여러 명의 백살대원들이 보였으나, 유서하와 진무량은 똑같은 지점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쉽사리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의 괴인, 적무혁이 진무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먼. 멋대로 진법을 깨부순 것이라면 미안하게 됐네. 눈앞에 거치적거리는 걸 그냥 넘어가는 성미가 못 되어서 말이지.”
유서하는 자신이 펼친 구궁음양진이 이렇게 쉽게 깨졌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생문을 찾아내서 진법을 파훼했다면 모를까, 적무혁은 순수한 힘으로 진법 자체를 깨부순 것이 틀림없었다.
진법이 깨지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백살대원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정비했다. 그러고는 엄성천을 필두로 적무혁 앞에 모여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노군을 뵙습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는 엄성천을 향해, 적무혁은 귀찮은 파리를 쫓듯이 허공에 손을 털었다.
“됐다. 네놈들 따위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니,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있거라.”
“알겠습니다.”
꽤나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음에도 엄성천은 조금도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서둘러 적무혁의 뒤로 물러섰다.
적무혁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사일성을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진무량에게 옮겼다.
“자네가 이리 만든 것인가?”
적무혁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진무량이 되물었다.
“그렇다면?”
적무혁은 뜯겨나간 사일성의 오른쪽 신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꽤나 쓸모 있는 놈이었거늘, 어쩌다 이 지경이…….”
정면승부로 완벽하게 패배했기에, 사일성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와락 인상을 찌푸린 사일성은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오기를 부렸다.
“잠시 방심했을 뿐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적무혁은 조용히 자신의 검지를 사일성의 머리를 향해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 없어. 이제 넌 쓸모없어졌으니까.”
적무혁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검지에서 탄지공이 쏘아졌다.
퍼억!
탄지공은 단번에 사일성의 머리를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