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회동
2017.10.01.
영사문 묵자강의 집무실.
상석에 자리한 묵자강을 중심으로 해서 양 옆에 영사문의 수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묵자강은 화가 잔뜩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도망친 비천검문 놈들을 찾지 못했다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
영사문의 총관은 면목이 없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묵자강은 답답한 듯 자신의 앞에 놓인 책상을 두드리며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추격범위를 더욱 넓히도록 하시오. 무슨 수를 쓰건 그들을 찾아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때 총관의 옆에 자리한 영사문의 무인이 묵자강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래 인근에서 귀혈악인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혹 들어보셨습니까?”
순간 묵자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그의 입에서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미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 어쨌든 그게 사실이오?”
마교에서 최고의 고수로 손꼽히는 귀혈악인이 영사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하고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다.
죽은 줄 알았던 자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놀랄 만한 사실이나, 그를 찾아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귀혈악인의 과거 행적을 따져봤을 때, 그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낼 때는 언제나 거대한 혈겁이 함께 찾아왔기 때문이다.
영사문의 무인이 말했다.
“제가 따로 알아본 바로는 대보방을 중심으로 그런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딱히 믿을 만한 소문은 아닌 듯하나, 보고는 올려야 할 듯싶었습니다.”
“흐음…….”
묵자강은 망설이는 기색을 내비쳤다.
당장 비천검문 일행도 쫓아야 하고, 장로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도 밝혀야 한다. 이 와중에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쫓을 수는 없었다.
‘이럴 때 하필 귀혈악인에 대한 소문이 돌다니…….’
웬만한 고수였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소문의 상대는 귀혈악인.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결론을 내린 묵자강이 입을 열었다.
“지금 본문에 남아있는 자들 중,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따로 선발해주시오. 소문의 진상을 알아봐야겠소.”
* * *
“뭣이?”
백살대원의 보고를 들은 엄성천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놓친 줄 알았던 진무량이 영사문 인근에 있는 성현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심지어 그 소문이 영사문에 닿을 정도라니…….
“한참 도망치고 있어야 할 놈이 왜 아직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냐?”
엄성천은 지금 한참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추적술을 전문으로 하는 방룡이 진무량에게 무참하게 당했다. 하여 더 이상 진무량을 쫓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던 것이다.
남은 방법이라고는 얼마 전 사로잡은 견무겸을 이용하는 것밖에 없었다. 허나 그마저도 확실히 진무량을 유인해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래저래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지금의 보고를 듣게 된 것이다.
보고를 올린 백살대원이 엄성천을 향해 말했다.
“혹시 함정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엄성천은 상황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분명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놈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엄성천이 말했다.
“영사문은 이 소문을 듣고 어떻게 움직인다 하더냐?”
“당장 대대적으로 조사를 하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영사문 내부에 있는 인원들로 진무량에 대한 조사를 할 생각으로 보입니다.”
엄성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입 꼬리가 올라갔다.
“천운이로구나. 진무량에 대한 일을 백살대가 전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혀라.”
“알겠습니다.”
의기양양했던 엄성천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들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변했다.
“대주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
“부쩍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것 같습니다만……. 다행히 큰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고 계십니다.”
사일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지, 엄성천이 슬며시 몸을 떨었다.
근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각별히 신경을 쓰느라 사일성의 만족을 채워주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진무량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굶주린 짐승에게 먹잇감을 던져주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엄성천이 말했다.
“대주께는 내 직접 보고할 테니, 넌 련에 이 사실을 전하고 견무겸을 포박한 채 대기시켜 놓아라.”
진무량을 붙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번에야말로 전력을 다해 확실하게 그 기회를 붙잡아야 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엄성천이 말을 이었다.
“진무량이 있다는 성현골로 갈 것이다.”
* * *
영사문과 꽤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초가.
그곳에는 노군이라 불리는 적무혁이 소천광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소천광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으며, 함께 있는 적무혁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행동 하나하나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얼핏 소천광의 행동이 과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상대는 구중련 내에서 서열 오 위 안에 꼽히는 적무혁이기 때문이다.
“진무량이 제안을 거절했다?”
의문이 담겨 있는 듯한 적무혁의 말을 듣고 소천광은 즉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전혀 저의 제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세한 건 만나보면 알게 될 터이고, 진무량을 잡기 위해 너와 협공을 했다는 자가 누구였지?”
“영사문에 잠입하고 있는 사일성입니다.”
“아아. 비인광검의 무공을 익혔다는 그놈이군.”
적무혁이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흐음. 진무량이라……. 생각보다 더욱 쓸 만한 놈일지도 모르겠구나.”
아무런 능력도 없는 버러지들은 구중련에 필요하지 않다. 그런 자들은 아무리 모여 봤자 쓰레기일 뿐이다.
진무량 역시 소천광과 사일성의 합공을 통해 잡혔다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진무량은 멀쩡히 그들의 추격을 벗어났다.
진무량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갈 때, 초가 안에서 의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사문에 잠입해 있는 백살대에게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의문의 목소리에 놀랄 법도 했으나,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적무혁은 침착한 반응이었다.
“말해 보거라.”
“쫓고 있던 귀혈악인이 영사문 인근 성현골이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엄성천은 백살대를 모두 이끌고 성현골로 출발한 상태입니다.”
“뭐?”
뜻밖의 보고의 당황했던 적무혁은 갑자기 코웃음을 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큰소리로 웃어 젖혔다.
“크하하하핫! 꽤나 재미있는 놈이 아니더냐. 도망치고 있어야 할 놈이 오히려 우리를 유인하려는 모양새가 아닌가?”
적무혁이 소천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놈이로구나. 내 직접 만나봐야겠다. 좋아, 우리도 성현골인가 하는 그곳으로 움직인다.”
소천광이 머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즉시 채비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 *
영사문 내 정갈하게 가꿔진 묵위현의 정원.
조경이 잘된 정원 중심에 자리한 정좌에는 묵위현과 영사문의 원로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원로를 통해서 알게 된 진무량에 대한 소문은, 묵위현의 인상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평소라면 그 또한 헛소문이라고 여기고 크게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얼마 전, 묵소정에게 들은 말로 인해 그리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었다.
‘진무량이라…….’
그저 같은 이름을 가진 자들은 천하에 수도 없이 많다.
허나 그저 동명이인이라고 취급하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파악한 그 사내의 역량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면에서 풍기는 범상치 않은 기도.
천하에 그만한 기도를 뿜어낼 수 있는 자는 결코 많지 않다. 헌데 그자의 이름이 진무량이라…….
귀혈악인의 독문병기로 알려진 염옥창은 아니었으나, 그 사내 또한 거대한 창을 지니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원로를 향해 묵위현이 말했다.
“자강이는 어떻게 움직인다 하던가.”
“최소한의 인원으로 소문의 근원지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백살대가 지원해서 도맡아 처리할 듯싶습니다.”
묵위현은 백살대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나직이 되뇌었다.
영사문 내에 있는 수많은 타격대 중 거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만큼 뛰어나지도 않고, 무엇보다 드러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자들.
허나 요 근래 백살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장로들을 헤친 자들을 조사하면서 자신의 최측근들이 올린 서찰. 영사문 내에서 첩자로 의심되는 이들의 명단 속에는, 백살대라는 이름이 분명 적혀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의 연속이라…….
장고 끝에 묵위현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구나.”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원로가 말했다.
“소문의 진위를 직접 파악하시려는 것입니까?”
“아니. 이번 사태의 대한 대처는 자강이가 한 것이 모두 옳다. 난 그저 산책을 나가는 것으로 알아두어라.”
“어찌 되었든 문주께서 직접 움직이신다면 호위대를…….”
“허허. 단순히 산책을 나가는 것뿐인데, 호위대가 무슨 필요더냐.”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핏빛 적포를 펄럭이며 묵위현이 말을 이었다.
“내 걸치고 있는 적포의 색이 아직 바라지 않았느니라.”
* * *
중천의 떴던 해가 지면서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평소 인적이 뜸했던 성현골에 일련의 무리들이 찾아와 그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동일한 백색 무복을 입고 있는 무리들의 정체는, 구중련 소속으로 영사문에 잠입하고 있는 백살대였다.
인근 수색을 담당하고 있는 백살대의 부대주 엄성천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여기가 진무량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던 곳이 확실한 거겠지?”
주변에 보이는 것은 온통 높이 뻗은 대나무들뿐이었고, 보여야 할 진무량은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엄성천의 옆에 있는 백살대원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확실하다면 빨리 놈들을 찾아내란 말이야!”
엄성천은 성질을 부리면서 힐끔 눈을 돌려 사일성의 눈치를 살폈다.
사일성은 대나무에 몸을 기댄 채,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요 근래 원하는 대로 살육을 하지 못한 사일성은 한참 불안정한 상태이다. 이곳에 진무량까지 없다면, 그가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벌일 수도 있는 일.
엄성천의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그저 떠도는 헛소문이었던 건 아니겠지.’
엄성천은 불안한 속내를 감추고, 곁에 있는 백살대원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포박해둔 견무겸을 데려와.”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지가 결박당한 견무겸이 백살대원의 손에 이끌려 끌려왔다. 그는 중상을 입은 상태로 제대로 설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엄성천의 앞에 도착한 백살대원이 잡고 있던 손을 놓자, 견무겸은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엄성천은 인질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해들은 견무겸을 살려두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견무겸은 갇혀 있는 동안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했다. 먹거나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씻는 것조차 못했다.
견무겸은 정말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견무겸을 내려 보며 엄성천이 인상을 찌푸렸다. 온몸 구석구석의 상처들과 풀어헤친 머리에서 악취가 풍겼기 때문이다.
“네놈 동료들의 행방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느냐?”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눈을 치켜뜨며 견무겸이 대답했다.
“내가 알고 있다 한들, 네놈에게…… 말해 줄 것 같으냐?”
“쯧쯧. 독한 놈.”
마음 같아서는 모진 고문이라도 해서 입을 열게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하기에 더 이상은 건드릴 수가 없었다.
휘이이이잉―!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소리에서 어딘지 모르게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바람은 점점 심해지면서 이내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돌풍을 견디지 못한 대나무들이 이리저리 휘면서 잎사귀가 떨어져 내렸다.
돌풍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던 엄성천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아니 이 무슨……!”
갑작스레 불어닥친 돌풍이 끝나자 눈앞에 있던 견무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엄성천은 놀란 눈으로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허나 기이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견무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백살대원들도 하나씩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엄성천의 눈앞에 갑작스레 진무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성천은 귀신처럼 눈앞에 나타난 진무량을 보고는 기겁하여 뒤로 자빠져버렸다.
“아니……! 네놈이 어떻게?”
한심한 시선으로 엄성천을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했다.
“웬 뒷북이야? 처음부터 난 여기 있었는데.”
유서하가 펼친 구궁음양진으로 인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 진무량은 처음부터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백살대가 모두 진법에 걸려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눈앞에 나타난 진무량이 짙은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놈들은 조금 있다가 손봐주지.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부디 잘 보내고 있도록 해.”
“네 이놈!”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엄성천은 검을 빼들어 진무량을 향해 휘둘렀다.
쉬익!
순식간에 엄성천의 검이 세로로 길게 그어졌으나, 진무량의 신형은 이미 사라지고 난 이후였다.
엄성천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주변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주변이 온통 회색빛으로 덮여버렸다.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엄성천이 우악스럽게 절규했다.
“이런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 *
주변 풍경이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이 변해버린 공간. 유서하가 펼친 구궁음양진 속, 진무량의 눈앞에는 오직 사일성만이 존재했다.
바닥에 앉아있던 사일성이 몸을 일으키면서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의외구나. 내게 패하고 꼴사납게 줄행랑치는 모습을 봤을 때, 두 번 다시 나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와는 보는 눈이 다르군. 내게 있어 승자는 결국 마지막까지 서 있는 놈이거든. 유리한 상황에서 적을 놓친 멍청이가 아니라.”
진무량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놈이야말로 도와줄 놈이 없으니까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인데.”
사일성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명을 단축시키는 혀로구나.”
스릉.
사일성은 현란한 검신을 자랑하는 용호쌍검을 검집에서 뽑아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저번에는 쓸모없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더니, 이번에는 잡힌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나를 이리로 유인한 건가?”
진무량 역시 등에 걸친 거대한 창을 뽑아들며 말했다.
“뭐, 네놈을 죽이면서 겸사겸사 그리 할 생각이다.”
가볍게 혀를 차며 사일성이 말했다.
“쯧. 내 너를 잘못 본 것이 맞구나. 동료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걸겠다는 것이냐? 악인이라 하여 보통 놈들과는 다르게 행동할 줄 알았거늘.”
디리리링―!
구궁음양진 속에서 유서하의 연주가 섬뜩한 곡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료? 웃기는 소리군. 그놈의 뜻이 무엇이든 간에, 날 위해 희생한 것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네놈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아무 관심도 없어.”
남이 내리는 평가에 관심 따윈 일체 두지 않는다. 모두 별 볼 일 없는 자신만의 줏대로 상대를 평가하고 싶을 뿐이 아니던가.
본인과 뜻이 같으면 선한 자이고, 그 반대면 악인이라는 건가?
진무량은 흘러나오는 비웃음을 겉으로 여실히 드러냈다.
지나가던 개가 비웃을 소리.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 없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모조리 베어버릴 뿐.
파밧!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쪽은 사일성이었다.
섬광과 같은 속도로 진무량을 향해 질주하면서 양손에 쥐어진 용호쌍검이 동시에 움직였다.
동시에 다방면으로 사일성의 용봉쌍검이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진무량을 덮쳤으나, 모조리 진무량이 휘두르는 창끝에 막혀 튕겨나갔다.
챙!
거칠게 서로의 무기를 부딪치면서 진무량과 사일성은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서로의 실력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 간을 보는 건 이쯤 하지.”
소름 돋는 음성으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보여줄 것은 없는 건가?”
사일성은 용호쌍검을 진무량에게 겨누며 대답했다.
“숨겨둔 비장의 한 수라도 있나 본데, 어디 한번 꺼내 보아라. 모조리 깨부숴줄 테니까.”
스으으으.
서서히 진무량을 중심으로 묵색 강기가 흩날렸다.
“하나만 말해두지. 지금까지 네놈이 내게 보인 실력이 전부라면, 넌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광활하게 흩날리던 흑색강기가 여태까지와 달리 점차 진무량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점차 그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용형십삼식 제십식 수라강림(修羅降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