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50화 (50/143)

50화. 계획

2017.09.24.

소천광은 진무량이 몸을 날린 절벽 끝자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이. 절벽 아래로 짙게 낀 안개는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절로 탄성을 자아낼 만한 광경이었으나, 소천광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놓친 진무량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제길.”

나지막이 소천광이 중얼거렸다.

자신 또한 절벽을 뛰어내려 진무량을 계속 쫓을 수는 있다. 허나 그 방면에는 비천검문 일행을 쫓는 사파의 무리들이 득실거린다.

진무량이 어깨에 화살이 박혔다고 하나, 그를 단숨에 제압할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진무량과의 싸움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사파의 무리들과 조우하게 될 터. 진무량을 영사문에 넘기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가능성마저 있다.

진무량을 포획하는 것만큼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구중련의 존재를 감추는 것이다.

이런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무량의 추격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우선 노군께 이 사실을 알려야겠군.’

진무량은 분명 구중련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진무량의 처우에 대한 적무혁의 뜻이 바뀔 수도 있다.

사일성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던 소천광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진무량을 놓친 것에 대한 분노가 순간 치밀어 오른 것이다.

‘다시 만난다면 결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 * *

사일성이 있는 곳에 도착한 소천광은, 사일성의 행색을 보고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사일성은 온몸을 피로 칠갑한 몰골이었다. 그리고 그의 용호쌍검이 가리키는 곳에는 시체나 다를 바 없이 뒹굴고 있는 견무겸이 있었다.

“왔나?”

뚝뚝 피가 떨어지는 용호쌍검을 빗겨든 사일성이 소천광을 향해 말했다.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것인가?”

소천광은 물음과 함께 견무겸에게 시선을 던졌다.

온몸의 새겨진 깊은 검흔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인해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이라고 볼 수 없을 행색이었으나, 견무겸은 아직도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었다.

사일성이 견무겸을 쳐다보며 말했다.

“한 번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제법 질긴 놈이더군. 그래서 좀 놀아주고 있었지.”

뚝뚝 끊어지는 견무겸의 말이 이어졌다.

“……네놈은 한 발자국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의식이 끊어진 상태였음에도, 그의 집념이 사일성의 목소리에 반응해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견무겸의 모습을 보며 사일성은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어때? 꽤 재미있는 놈이지 않나. 아까부터 계속 저 말을 지껄이더군.”

사일성이 붉게 충혈된 눈을 번득이면서 용호쌍검에 손을 가져갔다.

“베는 맛이 있는 놈이야. 이번에는 어디…… 팔이라도 하나 잘라 볼까?”

그러자 소천광이 사일성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휘익!

그 순간, 사일성은 자신을 방해하는 소천광의 목에 용호쌍검을 들이밀었다. 그 뒤로 사일성의 섬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하는 짓이냐?”

“이놈은 일단 데려간다. 진무량을 불러내는 미끼로 사용…….”

“그딴 걸 내가 알 게 뭐야?”

신경질적인 사일성의 반응에 소천광이 나직이 대답했다.

“분명 노군의 명이라고 말했을 텐데.”

흠칫.

소천광의 입에서 노군이 나오는 순간, 사일성의 몸이 굳었다. 이내 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사일성의 목을 겨누고 있던 용호쌍검을 신경질적으로 검집에 꽂았다.

“젠장!”

사일성은 그 후에도 한참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몸을 홱 돌렸다.

“피가 부족해. 제기랄, 돌아가자마자 제물을 준비하라고 해야겠군.”

견무겸은 또다시 사일성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비틀거릴 듯 몸을 휘청거리던 견무겸의 입이 열렸다.

“……네놈은 한 발자국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 * *

영사문 묵위현의 집무실.

묵위현은 깔끔하게 정돈된 집무실 안에 홀로 앉아, 손에 들린 서찰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서찰은 묵위현의 최측근인 자들이 작성해서 올린 것이었다.

묵위현은 은밀히 측근들을 통해 영사문 내부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영사문으로 들어오게 된 동기가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근래에 미심쩍은 행동이 감지된 자들. 심지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까지 전면적으로 영사문 내부를 검토하고 있었다.

영사문 자체가 워낙 큰 문파였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조사를 이어가다 보니 하나둘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묵위현은 오랜 시간에 걸쳐 명단을 꼼꼼히 확인했다.

한참 뒤, 읽고 있던 서찰을 내려놓으며 묵위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쉽지가 않구나.”

수상한 인물들을 찾아낼 수는 있으나, 명확한 근거가 없다 보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영사문 내에서 모략을 꾸미는 자가 있다면, 이 서찰 안에 있을 것은 확실했다.

“흐음.”

묵위현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의자의 몸을 기대었다.

첩자에 대한 조사도 쉽게 풀리지 않고 있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묵소정에 관한 것이었다.

근래 계속 묵소정과의 사이가 틀어져 왔다. 헌데 이번 비천검문 일행의 탈옥과 묵소정이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 문제만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긴 세월 살아오면서 이토록 고민해 본 적이 없거늘, 사랑하는 손녀와의 문제만은 너무나 난해하여 망설이게 되는 것들 투성이였다.

“미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묵위현은 몸을 일으켜 묵소정의 방으로 향했다.

묵위현이 묵소정의 방을 찾았을 때, 그녀는 입이 삐죽 튀어나온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묵위현은 묵소정이 왜 의기소침하고 있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이미 아비에게 한소리 들었나 보구나.”

이곳으로 오던 중 묵자강과 만났기에, 쉽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비천검문 일행을 탈옥시킨 것은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제아무리 총관이 숨기려고 해도 묵자강에게까지 비밀로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 사실을 알게 된 묵자강이 묵소정을 찾아와 크게 꾸짖은 것이리라.

“…….”

묵소정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묵위현은 평소와 달리 기가 죽은 묵소정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잔소리는 실컷 들었을 테니 더 이상은 하지 않으마. 나는 네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 일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그런 일을 벌이기 전에 할아비에게 언질이라도…….”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요.”

굳게 닫혀있던 묵소정이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땅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도 어떤 고민이든 말하라고는 하지만, 결국 제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으니까요.”

뭇사람들은 묵위현의 손녀딸은 금지옥엽으로 자라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새장 속의 새를 바라보듯이.

새장 속의 새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먹을거리도, 마실 물도 언제나 풍족하다. 사냥을 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배를 주릴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허나 그 새는 마음껏 하늘을 날지 못한다. 언제나 좁은 새장 속에 갇혀 있을 뿐이다.

허나 사람들은 날지 못하는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새장 속의 안락한 환경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자연스레 이어지는 편협한 시선. 묵소정은 그것이 끔찍이도 싫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할아버지도 전혀 알고 싶지 않잖아요.”

묵소정이 말을 이었다.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것도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게 아니에요. 저를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만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묵위현은 조용히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확실히 묵소정이 왜 무공을 배우고 싶은지 따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그저 한순간 보이는 관심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묵소정을 갓난아이처럼 여겨왔다.

그저 맛있는 것을 사주면 좋아하고, 예쁜 옷을 사주면 환하게 웃는 그런 아이.

허나 어느새 훌쩍 큰 묵소정은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소정이를 가장 모르고 있었던 것이 나인가…….’

묵소정은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하고 의견을 표출했으나, 정작 그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묵소정 또한 마음의 문을 닫았을 터.

묵위현은 미안한 감정을 담아 묵소정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항상 할아비가 너를 어리게만 취급했던 것 같구나.”

“…….”

묵소정은 땅을 향하고 있는 고개를 더욱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비천검문 일행의 탈옥을 도와준 것도 분명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그것에 대해서는 내 천천히 들어보도록 하마.”

묵위현은 연회장에서 잠시 만났던 진무량이 떠올랐다.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묵소정을 향해 말을 이었다.

“헌데 직접 탈옥까지 도와줄 정도라면, 그때 그자가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할아버지도 눈치가 빠르시군요.”

“네가 눈치가 빠른 것이 다 나를 닮아서 그런 것이니라.”

묵소정의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면서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묵위현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변덕스러운 소정이의 마음에 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딱히 아는 건 없는데…….”

묵소정은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 있었다.

“딱 하나 있어요. 그 사람 이름이 진무량이라고 했어요.”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던 묵위현의 이마에 단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뭐, 뭐라고?”

묵위현은 묵소정의 대답을 듣고, 단번에 그 이름이 어울릴 만한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 * *

진무량은 온몸 구석구석 찾아오는 진통을 느끼면서 감긴 눈을 떴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온몸에서 이는 고통 또한 또렷해져갔다.

“정신이 드셨군요.”

마침 주변을 살피고 돌아온 유서하가 동굴을 들어오며 진무량에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절벽에서 뛰어내린 뒤, 영사문의 추격을 피해 인근의 동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내가 얼마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야?”

“아직 두 시진도 채 안 됐어요.”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면서 진무량이 유서하에게 물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 같던데, 보초라도 서고 있었던 건가?”

“네. 근처에 저희를 쫓는 무인들이 쫙 깔렸지만, 다행히 이곳을 찾아내지는 못하고 있어요.”

진무량의 금제를 풀기 위해 모든 내공을 소진하다시피 한 유서하였으나, 겉으로는 지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빛이 잘 새어 들어오지 않는 동굴 내부를 밝히기 위해, 유서하는 따로 보관해두었던 야명주를 꺼냈다.

앞서 영사문의 뇌옥을 탈출하면서 짐을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서 쓸 수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동굴 내부의 야명주의 은은한 불빛이 퍼져나갔다.

야명주를 가지고 진무량을 향해 다가간 유서하는, 곧바로 그가 화살에 맞았던 곳을 살폈다.

“팔은 좀 괜찮아요?”

진무량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소천광의 화살이 박혀 있어야 할 곳에는 붕대가 정성스레 감겨 있었다.

“그럭저럭 움직일 만해.”

진무량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대답했으나, 유서하는 쉽게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가지고 있던 약초들과 붕대로 응급처치를 하긴 했으나, 부상의 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강맹한 기운이 실린 소천광의 화살을 자신이 받아냈다면, 팔이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살이 몸에 꽂히는 그 순간 진무량이 호신강기를 일으켜 화살에 실린 힘을 상쇄시켰에 그나마 이 정도로 그친 것이다.

어쨌든 자신을 대신해서 맞은 화살. 그 사실이 유서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무덤덤한 목소리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나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아. 그때도 당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된 일을 했을 뿐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 미안해요.”

찰나의 시간 동안 흘렀던 어색한 기운을 깨면서 진무량이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접고, 쉴 수 있을 때 휴식에나 전념해.”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지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러니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

신속한 것과 서두르는 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이다.

허나 그 미묘한 차이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법.

지금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려야 할 때였다. 앞으로 신속히 움직이기 위해서.

진무량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지금은 눈 좀 붙여.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거 아니야.”

진무량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유서하가 말했다.

“아직 우리 위치를 들키지는 않았지만, 밖은 지금 우리를 쫓는 추격자들이…….”

“잠깐 정찰을 목적으로 나가려는 것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당장 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놈들에게 쉽게 붙잡히진 않아.”

진무량이 동굴 밖으로 걸어가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으면 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할 거 아니야.”

* * *

소천광은 사일성 일행과 떨어져 영사문 인근에 있는 거처로 향했다. 그가 임시로 쓰고 있는 거처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뒷골목에 위치한, 허름하고 작은 건물이었다.

가구라고는 구석에 놓인 침상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실내. 휑하다 못해 스산한 기운까지 주는 내부였다.

소천광이 침상에 걸터앉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무슨 일이냐?”

소천광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아무것도 없던 실내에서 복면을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구중련의 소식을 소천광에게 전하는 연락책이었다.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말했다.

“노군께서 이 근방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소천광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적무혁이 진무량을 만나기 위해서 이곳으로 향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직접 얼굴을 맞댈 생각을 하니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앞장서라. 내 직접 모시러 가야겠다.”

* * *

진무량은 은밀히 바깥 상황을 둘러보다가 다시 유서하가 있는 동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희미한 야명주의 빛이 눈에 들어올 때쯤 유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군요. 바깥 상황은 어떤가요?”

조금이라도 쉬어서 그런지, 유서하의 혈색이 그나마 나아져있었다.

진무량이 대충 자리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돌아다니는 놈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이곳을 발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더군.”

“이곳도 곧 벗어나야겠군요.”

“아직은 아니야. 근처로 접근하는 놈들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당장 이곳이 발견될 것 같지는 않아. 이만한 은신처를 다시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고.”

진무량의 목소리가 한층 신중해졌다.

“무엇보다 이제부터 어떻게 움직일지 정해야 돼.”

돌이켜 생각해보면 영사문에 잠입한 순간부터 이미 구중련이 깔아둔 덫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진무량은 유서하가 영사문에 잠입해서 하려는 일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구중련의 함정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이 가장 큰 불찰이었고, 지금 상황을 만들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구중련이 짜놓은 판 위에서 휘둘렸던 것이나 마찬가지.

허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상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전과 달리 놈들을 완전히 부숴버리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이제부터는 구중련이 만든 판을 뒤엎고, 그곳에 새로운 판을 깔 것이다.

자신이 만든 판을.

그리고 이번에는 그 위에서 구중련 놈들이 놀아나게 될 것이다.

“일단 가장 먼저 할 일은 구중련 놈들만 따로 유인하는 거야. 쓸데없이 영사문이나 인근 사파놈들이 끼어들면 골치만 아플 테니까.”

진무량이 냉철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사문과 구중련은 둘 다 우리를 찾고 있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그 대상이 달라.”

유서하는 진무량이 말하려는 바를 곧바로 알아챘다.

“구중련은 당신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고, 영사문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영사문은 아직 나에 대한 정확한 정체를 몰라. 그저 비천검문의 무사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구중련은 정확히 나에 대한 것을 알고 있어.”

유서하 또한 진무량의 의도를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당신의 정체로 그들을 불러낼 생각인가요?”

진무량은 견무겸에게 받은 지도를 꺼내 야명주 불빛에 비추며 말했다.

“그래. 영사문과 인근 사파 문파들은 모두 우리가 도주할 곳을 중심으로 경계를 펼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오히려 영사문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들 중에서 한 장소를 골라 구중련 놈들을 유인하는 거지.”

걱정스러운 말투로 유서하가 물었다.

“그들이 함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마 쫓기고 있는 입장에서 함정을 만들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거야. 물론 약간의 의심은 할지 몰라도,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겠지.”

“그럼 문제는 당신의 정체를 영사문에 알리는 방법이겠군요.”

“그건 따로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구중련을 유인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야. 그들을 몰살시키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더없이 신중한 눈빛을 빛내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만났던 그 두 놈을 잠깐이라도 떨어뜨려 놓아야 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텐데.”

다른 자들은 상관없지만, 소천광과 사일성이 동시에 덤벼드는 것은 막아야 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다시 한번 유서하를 노린다면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멸천대만 곁에 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을.’

진무량은 당장 곁에 없는 멸천대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유서하의 당찬 목소리가 동굴 내부를 울렸다.

“있어요.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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