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다짐
2017.09.21.
팽!
소천광은 유서하를 겨누고 있던 낙영신궁의 활시위를 놓았다.
쒜에에엑!
화살은 귀를 찢는 파공음을 울리면서 유서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퍼억!
이윽고 화살촉이 살을 꿰뚫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허나 소천광의 예상과 달리, 화살에 맞은 것은 진무량이었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감싸듯 안아서, 쏘아진 화살을 왼쪽 어깨로 대신 받아낸 것이었다.
유서하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하여 연주하던 금을 멈추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 아니…….”
“연주를 멈추지 마.”
진무량은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천광의 화살이 유서하를 향한 날아가는 순간, 진무량은 창을 맞대고 있던 사일성을 억지로 떨쳐내고 전력으로 유서하를 향해 다가갔다.
허나 예상하지 못했던 소천광의 화살을 완벽하게 대처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진무량은 한쪽 어깨를 내주며 화살을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나와 겨루던 중에 감히 한눈을 팔아?”
순식간에 진무량을 향해 다가온 사일성이 살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사일성의 연격.
붉은색과 하얀색의 강기를 띈 용호쌍검이 각기 다른 궤적으로 진무량을 덮쳤다.
디리리링―!
유서하의 연주가 다시 이어졌고, 진무량은 공격해오는 사일성을 향해 되레 창을 뻗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칭! 칭!
이어서 날아드는 용호쌍검을 튕겨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한쪽 어깨에 화살이 박힌 상태이다 보니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이라 들었거늘, 고작 계집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중상을 입다니…….”
흉폭한 기세로 용호쌍검을 휘두르던 사일성이 말을 이었다.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이윽고 범이 장식되어 있는 검이 창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곧바로 반대쪽 손에 들려있는 푸른색 강기를 띈 검이 움직였다.
“이걸로 끝이다!”
파밧!
바로 그때, 결정타를 날리려는 사일성을 향해 섬광과 같은 속도로 견무겸이 날아들었다.
우우웅!
유려한 검신을 자랑하는 견무겸의 검이 청명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윽고 견무겸의 가장 빠른 쾌검식, 광풍쾌검이 펼쳐졌다.
* * *
진무량과 사일성이 겨루던 중 갑자기 소천광이 난입했을 때, 견무겸은 곧바로 진무량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ㅡ지금 즉시 아가씨를 데리고 이곳에서 도망쳐라.
진무량은 헛웃음을 지으며 견무겸에게 전음으로 답했다.
ㅡ내가 도망친다면 저놈들이 가만히 두고 볼 것 같나?
ㅡ어떻게든……. 내가 막아보겠다.
ㅡ네 힘으로는 역부족이야.
ㅡ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견무겸은 자신의 힘이 부족한 것을 자책하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억지라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지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유서하의 연주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전속결이다.
허나 사일성뿐 아니라 소천광까지 가세한 지금, 그 둘을 진무량 혼자 빠르게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러다가 유서하의 내공까지 모두 소진한다면, 그때는 전멸을 피할 수 없다.
견무겸은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눈빛으로 진무량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ㅡ어쨌든 최선의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내가 놈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든, 어떻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어보겠다. 팔이 잘리면 이빨로, 목이 잘리면 귀신이 되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겠다.
견무겸에게서 전해지는 각오를 진무량 또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ㅡ죽을 각오는 마친 모양이군.
ㅡ……그렇다.
무인에게 있어 죽음이란, 전혀 생각지 못한 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무한 죽음이 더 흔하다고 볼 수 있다.
허나 견무겸은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있어 크나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한줌의 부끄러움도 없는 죽음이라면 더욱 더.
‘내 인생에 더 이상 후회는 없다.’
유서하는 충분히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대상이었다.
여태 강호를 살아오면서 본 자들은 대개 똑같은 부류였다. 겉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나, 속으로는 모두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울 생각밖에 없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으로만 떠드는 의와 협을, 유서하는 항상 몸소 실천했다.
어떤 상황에서건 약자의 편에 섰고, 불의를 모른 체하지 않는, 말로는 쉬우나 지키기는 가장 힘든 것을 유서하는 언제나 지켜왔다.
애초에 그런 유서하를 지키기 위해 호위무사를 자청했던 것이다.
ㅡ그럼, 아가씨를 잘 부탁한다.
견무겸의 전음에 진무량이 대답했다.
ㅡ나를 믿는 것이냐?
ㅡ네놈 따위는 결코 믿지 못한다. 허나 아가씨가 없으면 네놈이 가장 곤란할 터, 그 상황은 믿을 만하지.
ㅡ훗. 지금까지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했었는데, 제법 괜찮은 면도 있었군.
견무겸이 옅은 미소를 띨 때, 진무량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ㅡ네가 시간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주지. 우선 얌전히 있으면서 놈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뒤, 쌍검을 든 놈을 노려라. 단, 그놈이 최대한 힘을 실은 공격을 할 때여야만 한다.
공격에 치중하다 보면 반드시 작은 빈틈이 생길 터. 그것이 최후의 일격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ㅡ하지만 그 일격으로도 아마 놈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신중한 목소리가 담긴 진무량의 전음이 이어졌다.
ㅡ다만 한순간이라도 놈의 검을 받아내고, 시선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난 뒤 어떻게든 버텨라. 그럼 내가 네 주인을 데리고 도망치도록 하지.
견무겸은 검집에 꽂힌 검손잡이를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아마도 그 후에는…….
ㅡ알겠다.
죽음을 각오했을 때 비치는 특유의 투기가, 대답을 마친 견무겸에게서 흘러나왔다.
* * *
진무량을 제압하기 위해서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사일성은 등 뒤에서 날아드는 견무겸의 존재를 파악했다.
사일성은 그 즉시 진무량을 공격하려던 동작을 멈추고, 급히 몸을 숙여 견무겸의 쾌검식을 피해냈다.
쉬익!
검은 허공을 갈랐으나, 견무겸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검로를 바꿔서 상체를 숙이고 있는 사일성을 향해 검을 일자로 내리찍었다.
챙!
순식간에 몸을 돌린 사일성은 용봉쌍검을 교차시켜 견무겸의 검을 막아냈다.
사일성의 시선이 견무겸을 향한 찰나의 순간.
진무량은 즉시 금을 연주하는 유서하를 화살이 박히지 않은 왼쪽 어깨에 태웠다.
“연주를 멈추지 마.”
파바밧!
진무량은 유서하를 어깨에 지고, 최고 속도로 흑운신법(黑雲身法)을 펼쳤다.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치솟은 진무량은 마치 하늘을 날듯이 움직였다.
“제길.”
예상치 못한 진무량의 행동에 소천광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곧바로 화살을 시위에 얹으면서 진무량의 뒤를 쫓았다.
사일성 역시 진무량을 쫓으려 했으나, 그의 앞을 견무겸이 막아섰다.
사일성은 얼굴을 괴기스럽게 찌푸리며 말했다.
“뭔데 아까부터 설쳐대는 거야. 죽고 싶기라도 한 것이냐?”
견무겸은 눈을 부릅뜬 채,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면서 사일성을 향해 말했다.
“바로 그렇다. 나를 죽이기 전까지 넌 한 발자국도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견무겸은 힐끔 뒤를 돌아보며, 그쪽 방면으로 나아간 진무량과 유서하를 생각했다.
‘뒷일은 부탁한다.’
* * *
소천광이 진무량의 뒤를 쫓을 때, 갑작스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 있었다.
진무량의 말, 적풍이었다.
“푸르르릉!”
적풍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흰자위를 드러낸 채 소천광을 향해 적의를 내비쳤다.
“주인을 위해 길이라도 막아보려는 것인가.”
소천광은 앞을 막아서고 있는 말이 진무량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무량이 말을 타고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뿐더러 근처에 접근하는 자들을 모두 자신이 죽였기에, 다른 말이 있을 수 없었다.
소천광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적풍의 이마를 향해 낙영신궁을 겨눴다.
“하찮은 미물 따위가.”
진무량은 유서하를 어깨에 태운 채 산길을 질주하는 중이었다.
땅을 한 번 내딛으면 수십 장 이상을 움직이는 흑운신법은,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잠깐 당황하기는 했으나, 유서하 또한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무겸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어요. 일단…….”
“놈은 널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는데, 넌 그 죽음을 헛되게 할 생각인가.”
“…….”
“그놈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어. 네 의지가 어떻든, 살아남았으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 해.”
왜인지 모르게 쓸쓸하게 느껴지는 진무량의 목소리를 듣고, 유서하는 간신히 냉정을 되찾았다.
확실히 지금 자신의 내공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견무겸을 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음일 뿐.
유서하는 자책 섞인 분노를 억누르면서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적들이 반드시 견무겸을 죽인다고 볼 수도 없다. 그들은 진무량을 노리고 있으니, 견무겸을 인질로 사용할 확률도 충분히 있다.
‘포기해선 안 돼.’
아직 확실히 단정 지을 수 있는 사실은 없다.
이런 때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진무량이 내공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유서하가 연주를 이어나갈 때, 돌연 끔찍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히히이이힝!”
적풍의 죽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으나, 진무량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앞을 향해 달렸다.
비록 오랜 시간 함께하지는 않았으나, 진무량은 진심으로 적풍을 아꼈다.
내공을 잃은 뒤에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대상.
‘복수는 확실하게 해주마.’
험준한 산길을 끝없이 오르던 진무량은 점차 바람이 거세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의 예상대로 거대한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험준하게 깎인 절벽 아래는 짙은 안개가 낀 덕분에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견무겸에게 받은 지도를 기억했기에, 진무량은 이쯤 절벽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절벽으로 향한 이유는 소천광과 사일성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함이었다.
진무량은 사일성과 겨루면서 의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사문은 물론 인근 사파의 방파들이 모두 추격을 하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은 사일성과 겨루는 자신의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진무량은 상대의 생각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사일성과 소천광의 존재를 숨기려 한다는 것, 즉 구중련에서 주변의 접근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구중련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구중련의 첩자들이 접근을 막고 있는 이 근방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
주위에 보는 눈이 많을수록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일성과 소천광의 약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절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은 절벽 끝에 서서, 진무량은 어깨에 지고 있던 유서하를 내려놓았다.
“여길 빠져나간다면, 넌 비천검문으로 돌아갈 건가?”
애초에 유서하는 영사문과 구중련과의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적포신군과 구중련의 관계를 비롯하여 사일성의 존재까지. 그 정도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게다가 영사문의 추적은 물론이고, 절정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소천광이나 사일성 또한 유서하를 노릴 것이다.
조사는 이정도로 끝내고 안전한 비천검문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아니요.”
유서하의 대답은 단호했다.
견무겸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이대로 돌아가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이미 견무겸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의 대한 복수는 반드시 해야만 했다.
“너와 내가 생각이 일치하는 건 처음인 것 같군.”
진무량 또한 적풍을 죽이고 자신에게 검을 들이댄 놈들에게서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난 당한 게 있으면, 반드시 수십 배로 불려서 갚아줘야만 하거든.”
마주친 눈동자를 통해 진무량과 유서하는 서로의 확고한 뜻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유서하가 대답했다.
“당신의 말에 이 정도로 공감이 되는 건 저도 처음이에요. 지금까지는 서로 어느 정도 경계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뜻을 합치게 된 것 같군요.”
적어도 지금 진무량과 유서하가 같은 적을 삼고 있는 것은 분명했고, 그 사실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렇군.”
유서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진무량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일단 이곳을 벗어나지.”
짧게 대답을 마친 진무량은 단숨에 유서하를 안아 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황량한 바람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절벽 아래로 금의 연주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