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48화 (48/143)

48화. 거절

2017.09.17.

시건방진 유서하의 태도에 격분한 사일성이 괴성을 내질렀다.

“이년이……!”

이내 사일성이 왼손에 쥐고 있는, 범의 문양이 새겨진 검에 하얀 검기가 서렸다.

“끼어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사일성은 단숨에 검을 휘둘러 유서하를 향해 검기를 날렸다.

유서하 역시 사일성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디리링―!

유서하의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이면서 빠른 곡조가 이어졌다.

ㅡ귀형음혼류 파음지망.

허공에 퍼져나가는 유서하의 선율이 그녀의 내공과 합쳐지면서 보이지 않는 음막을 만들어냈다.

콰과과광!

사일성의 검기는 유서하가 펼친 음막과 부딪치면서 궤도를 잃고 완전히 빗나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일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크게 심혈을 들이지 않고 날린 검기이기는 하나, 유서하의 목숨 정도는 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허나 그 예상이 완벽히 빗나간 것이다.

유서하는 연주를 멈추고 사일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을 정면으로 상대할 기량은 부족할지 모르나, 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요.”

유서하는 이전에 소천광의 화살을 막다가 내상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여 정면으로 사일성의 기운을 받아내지 않고 측면에서 밀쳐내듯이 음막을 펼쳤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강한 사일성의 검기를 튕겨내면서도 몸에 무리가 따르지 않은 것이다.

유서하의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실전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시행착오를 검토하고 또 수없이 복기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남몰래 끝없이 노력했기에, 사일성의 검기를 완벽하게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분노한 사일성이 용호쌍검을 굳게 움켜쥐었다.

“네년이 이것도 막아낼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보겠다.”

사일성의 몸에서 방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디리리리리링―!

다시 유서하의 곡조가 이어지자, 사일성은 코웃음을 쳤다.

어떤 음공을 펼치건 전력을 다한 자신의 검강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소로운 계집!’

사일성의 용호쌍검 각각의 검기가 실렸다. 이내 검기는 점차 모양이 있는 강기로 변해갔다.

“받아봐라!”

검강을 띤 용봉쌍검이 서로 교차되면서 허공을 갈랐다.

솨아아아아!

두 개의 강맹한 기운을 띤 검강이 허공에서 얽히면서 유서하를 향해 쏘아졌다.

콰과광!

이번에도 사일성의 강기는 유서하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폭발했다.

허나 이번에는 음막으로 검강의 궤도를 빗나가도록 흘려낸 것이 아니었다.

검강에 대적할 만한 힘을 가진 어떤 기운에 의해 상쇄된 것이었다.

스으으으!

그 기운은 진무량의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색 강기였다.

방금 유서하가 금을 켜면서 만든 곡조는 음막을 펼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무량의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연주였던 것이다.

“어디를 노리는 거냐? 네 상대는 나잖아.”

진무량의 몸 주변으로 묵색기운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잡설은 그만하고 덤벼.”

금을 연주하고 있는 유서하에게서 시선을 돌린 사일성은, 살기가 가득 담긴 웃음을 지으며 진무량을 노려보았다.

“이런, 가장 흥미로운 상대를 눈앞에 두고 쓸데없는 곳에 한눈을 팔고 있었군.”

그와 동시에 사일성의 용호쌍검에서 각각 하얀색과 붉은색 기운이 맺혔다.

진무량과 사일성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듯 거칠게 피어올랐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 속에서 흐르는 긴장감.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산바람이 스치듯이 지났다.

먼저 움직인 쪽은 사일성이었다.

쉬시시식.

사일성은 마치 혼자 검무를 추듯, 각기 다른 빛을 뿜고 있는 용호쌍검을 허공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특별한 형식이 없는 움직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용호쌍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푸른색과 붉은색 강기가 맹렬한 기세로 진무량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각기 다른 궤도로 쏘아진 사일성의 강기는 그 어디로도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피할 수 없다면 모조리 부숴 주지.’

진무량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묵색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용형십삼식 육식 오성마참.’

태산이라도 갈라버릴 듯한 기세를 띤 진무량의 창이 일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직후 곧바로 다섯 개의 묵색강기가 뿜어져나갔다.

펑! 퍼엉! 펑!

서로 다른 두 개의 강기는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무수한 폭발을 일으켰다.

귀를 찢는 듯한 폭음이 계속해서 장내의 울려 퍼졌다.

대지가 갈라지고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어지러운 상황 속이었으나, 진무량은 사일성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무영섬전보를 밟으며 순식간에 진무량이 사일성과 거리를 좁혔다.

스으윽.

순간 진무량의 창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다급한 격전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한의 변화를 가진 초식, 용형십삼식 일식 마영수라가 시작되기 전의 움직임이었다.

미세한 떨림과 함께 분열하듯 늘어난 창의 잔상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불어나더니 어느새 그 숫자가 수천수만으로 늘어났다.

그 잔상들이 한순간 일제히 움직이더니, 번쩍이는 창끝이 모조리 사일성을 향했다.

그렇게 사일성을 둘러싼 창의 잔상들은, 거친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일제히 쏟아졌다.

쉬쉬쉬쉭!

사일성은 즉각적으로 진무량의 움직임에 반응하면서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칭! 칭! 챙!

원형의 움직임에 하나된 듯,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용호쌍검은 날아드는 수천 개의 진무량의 창을 모조리 쳐냈다.

쏟아지는 창의 잔상을 쳐내던 사일성은, 빈틈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쳐올리듯이 검을 찔러 넣었다.

허나 진무량 또한 사일성의 그 움직임을 읽었다.

챙!

터져 나오는 굉음.

모든 힘을 실은 두 사람의 검과 창이 부딪쳤다.

견무겸은 진무량과 사일성의 대결에 끼어들지 못하고, 유서하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무량을 돕고 싶었으나, 섣불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공을 수놓는 듯이 퍼져나가는 강기는 너무나 강렬했고, 진무량과 사일성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마치 현실이 아닌 꿈속에나 나올 법한 광경.

진무량과 사일성의 대결을 보고 있자면, 그들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허나…….’

견무겸은 근심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분명 사일성을 상대로 진무량이 조금이나마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진무량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진무량이 내공을 운용하는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유서하의 연주에 의한 것.

음을 통해서 전해지는 유서하의 내공이 먼저 바닥난다면, 순식간에 승부가 갈릴 것이다.

견무겸의 시선이 조심스레 유서하를 향했다.

유서하는 이마에 땀이 맺히고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명백히 무리를 하고 있다는 증거.

‘단기간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

파밧!

사선으로 그어지는 창의 힘을 견디지 못한 사일성은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상처 하나 없는 진무량과 달리 사일성의 몸에는 얕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과연.”

사일성은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목을 혀로 핥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무 흥분돼. 이런 칼부림은 정말 오랜만이야.”

진무량은 창을 사선으로 비껴든 채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서하의 연주로 내공을 사용할 수 있기는 하지만, 내공을 사용한 만큼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고통이 심해진다.

게다가 일전의 방룡과 그 무리들을 상대하면서 내공을 한 번 사용했기에, 몸 상태 또한 정상이라 할 수 없었다.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군.’

진무량에게는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허나 본래의 몸에서조차 완벽히 제어하지 못했던 무공을 지금 상태로 펼치기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진무량을 향해 뛰어들며 사일성이 외쳤다.

“자, 날 더 즐겁게 해달라고!”

거칠게 덮쳐오는 사일성의 용호쌍검을 진무량은 제자리에서 받아냈다.

챙!

진무량의 창과 사일성의 쌍검이 부딪친 상태로 움직임이 멈췄다.

진무량의 창이 사일성의 용호쌍검을 밀어내려는 순간,

쉬이이이이익!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막대한 기운이 실린 화살이 쏘아져왔다.

진무량은 갑작스럽게 날아든 화살을 피하기 위해, 사일성을 밀어내면서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팍!

막대한 기운이 실린 화살은 진무량과 사일성 사이를 정확히 꿰뚫었다.

진무량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땅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만났군.”

감정이라는 것이 없어져 버린다면 나올 법한 차가운 목소리.

“진무량.”

소천광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와 어느새 사일성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일성은 당장에라도 죽일 듯한 눈빛으로 소천광을 향해 쏘아보았다.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진무량과의 결투를 방해받고 나니, 소천광이 곱게 보이지 않은 것이다.

사일성이 말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이곳은 이제부터 내가 맡는다. 그러니까 비켜.”

사일성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 난 뒤 용호쌍검을 소천광에게 들이댔다.

“우리가 서로 명령을 내릴 관계는 아닐 텐데.”

“내 명령이 아니라.”

소천광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노군의 명령이시다.”

소천광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일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사일성은 소천광이 말하는 노군이 적무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적무혁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사일성은 한참동안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결국 용호쌍검을 겁집에 넣었다.

“젠장.”

사일성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소천광의 뒤로 물러섰다.

“이제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소천광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어조로 진무량의 물음에 대답했다.

“마치 기다려준 것처럼 말하는군. 네놈도 저놈과 전음을 주고받지 않았나.”

소천광은 견무겸을 힐끗 쳐다본 뒤, 다시 진무량을 노려보았다.

한 번 패배했던 상대. 하여 소천광은 사일성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진무량을 향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내용의 전음이 오갔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분명 진무량과 견무겸이 모종의 대화를 했다는 사실만은 파악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런 자잘한 것들을 신경 쓰기보다, 적무혁의 뜻을 진무량에게 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침묵하던 소천광의 입이 열렸다.

“진무량.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나?”

뜬금없는 소천광의 제안에 진무량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릴 때, 소천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신다. 일단 우리를 따라온다면, 영사문의 추격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주지. 그리고 만약 네가 그분의 마음에 든다면, 네가 천하에서 이루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천광의 제안에 진정 당황한 것은 유서하와 견무겸이었다.

구중련이 진무량에게 먼저 손을 내밀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혼란은 더욱 컸다.

만약 진무량이 당장 구중련과 뜻을 합치겠다고 한다면, 당장 그것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훗.”

진무량은 나직이 조소를 흘릴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무량이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한 소천광은 설득을 거듭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나를 따라와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루게 해주겠다. 우리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거절하지.”

굳게 다물고 있던 진무량의 입이 열리며 싸늘한 침묵을 깼다.

“뭐?”

감정 표현이 전혀 없는 소천광조차도, 이번 진무량의 대답은 의외였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든지 이루게 해주겠다라……. 그딴 것은 내게 전혀 필요 없는 일이야.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너희 따위에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스스로 이뤄낼 수 있으니까.”

진무량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남이 이뤄준다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 진정 원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만이 이뤄낼 수 있는 것이거든.”

진무량이 몸의 중심을 살짝 낮추면서 창끝을 땅으로 향하게 하는 특유의 기수식을 취했다.

“할 말은 끝난 것 같은데.”

진무량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제 덤벼.”

“이런 제안을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솔직히 의외군.”

소천광은 등에 걸친 낙영신궁을 꺼내들었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갈 수밖에.”

뒤로 물러나 있던 사일성은 눈을 빛내며 용호쌍검에 손을 갖다 댔다.

“뭐야? 다시 한바탕 할 수 있는 건가?”

소천광이 곁눈질로 사일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죽이지는 마. 생포해서 노군께 데려간다.”

파밧.

소천광은 곧바로 숲속에 몸을 숨겼다. 정면승부로 패배했던 지난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진무량 또한 곧바로 소천광을 쫓아갈 수 없었다.

그의 앞을 사일성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일성은 용호쌍검을 뽑아들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먼저 진무량을 노린 것은 소천광의 화살이었다.

팽!

바위마저 으깨버릴 수 있는 내력이 실린 소천광의 화살이 진무량을 향해 쏘아졌다.

디리링―!

유서하의 곡조가 더욱 빨라졌다.

소천광의 화살은 섬광처럼 빨랐으나, 진무량이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쉬익!

진무량은 재빨리 몸을 날려 소천광의 화살을 피해냈으나, 뒤를 이어 곧바로 사일성의 용호쌍검이 날아들었다.

깡!

동시에 날아드는 용호쌍검과 진무량의 창이 거칠게 부딪쳤다.

서로의 무기를 맞댄 채, 사일성이 진무량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네놈의 피맛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는데, 뭐 어쩔 수 없군.”

억지로 진무량을 밀어낸 사일성은, 곧바로 용의 문양이 새겨진 검을 가로로 그었다.

챙!

진무량은 사일성의 일격을 받아내기는 했으나, 수세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소천광은 다음 화살을 시위에 겨누다가, 문득 금을 연주하고 있는 유서하에게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금을 연주하는 것은 똑같았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딱히 유서하가 음공을 펼치고 있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소천광의 의구심은 점점 커져갔다.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소천광은, 시위가 팽팽히 당겨진 낙영신궁을 옆으로 돌려 무방비 상태인 유서하에게 겨눴다.

‘거슬리는 자는 죽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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