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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46화 (46/143)

46화. 금제를 풀다 (2)

2017.09.10.

스윽.

진무량은 칠 척이 넘는 창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자연스럽게 사선으로 비껴들었다.

특별한 점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평범한 기수식. 허나 그 어디에도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하여 오십 명이 넘는 백살대는 진무량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음에도, 먼저 공격을 취하긴 커녕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물론 백살대의 목적은 진무량의 발을 묶어두기 위한 것이기에 먼저 공격을 취할 이유는 없다.

허나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묵색 기운이 온몸을 휘감고 있는 진무량을 보며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순간, 죽는다.’

적막함이 감도는 장내, 진무량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왜 이렇게들 얌전해졌어?”

“…….”

백살대는 완전히 진무량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으나, 정작 한줌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언젠가부터 백살대는 유서하와 견무겸은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진무량에게서 순간이라도 눈을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임을, 머리가 아닌 몸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꼼짝도 안 하고 있을 생각이라면, 내가 움직이게 만들어주지.”

진무량이 창을 들어 올리면서 양손으로 굳게 움켜잡았다.

“온다! 모두 조심해라!”

콰과과곽!

방룡의 다급한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백살대는 모든 신경을 진무량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나, 정작 그가 움직였을 때 어떤 대처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경계를 취하고 있었음에도, 순간 진무량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크억.”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 고통스러운 죽음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흘리는 짧은 단말마였다.

방룡은 그제서야 뒤늦게 진무량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허나 그때는 이미 진무량의 창이 백살대원의 가슴팍을 꿰뚫고 난 뒤였다.

주변에 모두가 놀라고 있었으나, 정작 진무량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박힌 창을 뽑았다.

방룡은 아연실색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내 미친 듯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단 방룡뿐 아니라,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백살대원들 또한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진무량의 창에 꿰뚫린 시신과 똑같은 최후를 맞은 것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뜻.

서서히 공포가 내려앉으려 할 때, 정신을 차린 방룡이 우악스럽게 외쳤다.

“뭣들 하고 있나? 모두 진무량을 교란해라!”

백살대원들은 곧바로 방룡의 외침에 반응했다.

방룡은 진무량의 움직임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당장 그의 속도를 전혀 따라갈 수 없으니, 일단 그를 교란시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진무량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분명 어느 정도 그의 속도를 파악할 수 있을 터.

허나 방룡이 생각하고 있지 못하는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진무량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입을 백살대의 피해였다.

콰드득!

사나운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진무량의 초식의 백살대원들은 속수무책으로 휩쓸렸다.

“이제야 좀 흥이 나는군.”

진무량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창에 묻은 피를 허공에 털어냈다.

진무량을 교란하면서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던 백살원들의 움직임이 점차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요란한 움직임으로 진무량의 시선을 끈 것이다.

단숨에 진무량의 숨통을 끊어 놓을 이 순간을 위해서.

흩어져 있던 백살대원들은, 순식간에 응집하여 진무량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갑작스럽게 변하는 백살대원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진무량은 여유로운 비웃음을 흘렸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진무량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묵색기운이 점차 형태를 띤 강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용형십삽식(龍形十三式) 육식 오성마참(五星魔斬).’

진무량은 묵색기운을 띤 창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 모습이 마치 공간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보였다.

휘두른 창에 의해 찢겨진 공간 사이에서 다섯 개의 묵색 강기가 쏘아져나갔다.

콰콰과광!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유성처럼 빛나는 묵색 강기는 부딪친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숴버렸다.

거대한 폭발이 지축을 흔들었고, 그 떨림으로 주변 지형이 무너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무위에 경악하고 있을 때, 진무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진무량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허공을 찢는 듯한 창의 궤적이 네 번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 움직임에 따라 하나씩 쏘아져 나가는 묵색강기!

콰과과과과광!

폭발의 여파가 점차 진정되면서 방룡은 점차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 어찌 이럴 수가.’

이처럼 강맹한 무공을 방룡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쏘아진 강기에 휩쓸려 절명한 백살대원만 해도 족히 절반이 넘을 정도였다.

빠득.

방룡은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이를 갈았다.

“지금이 기회다! 모두 일제히 진무량을 노려라!”

이럴 때 위축되고 등을 보이는 것은 하수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강한 상대를 쓰러뜨릴 기회는, 이런 강맹한 공격을 사용한 직후가 가장 적기이다.

방룡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고, 그의 지시에 따라 살아남은 스무 명의 백살대원들이 동시에 진무량을 덮쳤다. 그들 역시 동료들의 죽음으로 인해 크게 격앙된 상태.

우두커니 서있던 진무량이 몸 주위로 창을 한 바퀴 돌렸다.

“도망치지 않은 건 칭찬해주지.”

순식간에 여덟 방면에서 완벽하게 진무량을 포위한 백살대원들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살기가 실린 검을 통해 각자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기를 쏟아냈다.

쉬익! 쉬익! 쉬익!

허나 들리는 것은 모두 허공을 가르는 소리뿐이었다.

사방팔방에서 검이 날아들었으나, 진무량은 마치 춤을 추듯이 날아드는 검 사이로 움직였다.

진무량은 날아드는 검을 보고 예측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극한까지 곤두세운 야성적인 감각에 따라 자연스레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전혀 자신의 검이 닿지 않자, 사방팔방에서 공격하던 백살대원들은 더욱 더 빠르고 섬세한 초식을 펼쳤다.

허나 진무량의 몸에 검이 닿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가로로 날아드는 검은 몸을 젖혀 피했고, 연속으로 짓쳐들어오는 날카로운 찌르기는 보법으로 거리를 벌려 빗나가게 했다. 또한 억지로 힘으로 누르려 하는 공격들은 모조리 창으로 비껴냈다.

바로 코앞에서 십여 명이 검을 휘두르는데도 옷깃 하나 스치지 않는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방룡이 온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깡!

직선으로 떨어져 내린 방룡의 검과 진무량의 녹슨 창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가까이서 진무량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방룡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인원으로 진무량을 몰아붙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모두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진무량과 마주하게 된 순간부터 자신들은 모두 사지의 발을 들인 것이다.

방룡의 검을 쳐내면서 진무량의 창이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검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팔방에서 날아드는 현란한 검로들과 비견했을 때, 진무량의 찌르기는 너무나 단순해보였다. 허나 빈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진무량의 찌르기는 감히 비견할 것이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또한 날카로웠다.

퍼억!

단 한 번에 움직임으로 진무량의 창은 정확히 백살대원의 심장을 꿰뚫었다.

곧바로 백살대원들의 재빠른 반격이 팔방에서 날아들었으나, 그 어떤 것도 진무량의 몸에 닿지 못했다.

공격을 받아내면서 진무량은 이미 백살대원들의 검로를 모두 파악했다.

그러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순간 진무량이 허리를 굽히며 자세를 낮추었다. 바닥에 맞닿을 듯 낮은 자세에서 시작되는 초식.

‘용형십삼식(龍形十三式) 이식 등마회륜참(騰魔回輪斬).’

갑작스럽게 진무량의 몸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진무량의 창이 사방의 적들을 동시에 베어나갔다.

파바바박!

가뜩이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던 진무량의 창에 회전의 묘가 실리니, 감히 백살대원들은 그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크아아악!”

“으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진무량을 포위하고 있던 백살대원들이 모조리 튕겨져 나갔다.

진무량의 초식이 끝났을 때, 그 주변에 멀쩡히 서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진무량은 바닥에 쓰러진 방룡과 눈이 마주쳤다. 백살대는 모두 절명했으나, 방룡만은 아직 미세하게 숨이 붙어있었다.

“허, 어억, 허억!”

방룡은 끊어져가는 숨을 붙잡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무량과 마주보고 있는 방룡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질린 듯, 눈동자가 끝없이 떨렸다.

용력이 뛰어나다거나 속도가 빠르다는, 그런 개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초월해버린 무언가가 진무량에게 있었다.

“그 반응이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취해야 했던 행동이었어.”

진무량은 쓰러진 방룡을 내려다보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도 만나서 반가웠다.”

“제기……. 크윽!”

방룡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디리링―!

백살대가 모두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유서하가 연주를 멈췄다.

그러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진무량과 함께 있다 보면, 가끔 그의 무인으로서의 모습을 잊게 될 때가 있다.

가끔은 진무량에게 부러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진무량은 많은 것을 따져보고 또 다시 생각한 후에 행동하는 자신과는 달랐다.

그는 확고한 생각이 정해진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분명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남아 있지만, 자신에게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 될 때면 자연스레 더 그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때로는 평범한 장난기 있는 모습. 그리고 아주 가끔씩 짓는 미소를 볼 때마다 조금씩 자연스레 그의 과거를 잊게 되는 것이다.

허나 진무량이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언제나 다시 깨닫게 된다.

그가 한때 최악의 무림공적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그리고 진무량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도.

비록 지금은 함께 행동하고 있으나, 그의 뜻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말 만에 하나라도 진무량이 금제를 깨고 내공을 되찾는 일이 벌어진다면…… 지금 눈앞에 진무량은 자신과 겨루게 될 적의 모습일 수도 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

누구나 앞으로 닥쳐올 미래는 알지 못한다. 당장 내일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

쿵.

순간 진무량의 신형이 흔들리다가, 이내 창을 땅에 짚어 몸을 기대었다.

유서하의 연주가 끝나고 다시 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언제나 사용했던 힘만큼 몸에 고통이 찾아온다.

이번에는 특히 내공을 사용했던 시간이 전보다 월등히 길었기 때문에, 그 고통 역시 강도가 심할 것이다.

진무량의 모습을 확인한 유서하가 서둘러서 그를 향해 달려갔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겉보기에 진무량은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다.

과거의 유서하였다면 그 말을 그대로 믿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진무량이 지금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허나 적어도 그가 자신의 아픔을 겉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럼 서둘러 출발하죠. 이제 우리 위치가 노출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추격을 시작할 거예요.”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지금껏 봐온 진무량은 자존심이 강할뿐더러,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이상 긴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서 추격을 뿌리치는 것만이 진무량이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일 테니까.

유서하는 지금 진무량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가 그것이라 생각했다.

“맞는 말이야. 쓸데없이 허비하고 있을 시간 없어.”

적풍의 훌쩍 올라타고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그럼 출발하지.”

* * *

백살대주로 불리고 있는 사일성은 진무량의 위치를 찾아냈다는 방룡의 보고를 듣고, 몇몇의 백살대원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허나 그가 도착했을 때, 보고와 달리 진무량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주변에는 방룡과 정예 백살대원의 시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늦은 건가.”

사일성은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어지러이 흩어진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백살대원들은 각기 분노로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허나 사일성의 반응은 그와 완전히 반대였다.

피식.

동료의 시신들을 바라보던 사일성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과연…… 이 정도는 돼야지.”

여기 죽어있는 자들은 영사문의 숨어있는 백살대에서도 주축을 맡고 있는 핵심 인물들이었다.

방룡만 하더라도 백살대 내에서 추격으로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실력자였다. 그 외에도 능력을 감추고 있을 뿐, 모두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이들을 홀로 상대했단 말이지…….’

시신의 모습들을 둘러보고, 그는 대략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치열한 승부를 펼친 것이 아니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일방적으로 진무량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진무량이 어떤 비열한 꾀를 썼다거나 암습을 한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순수한 무공으로 이들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것.

그 사실만이 중요하다.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 따윈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진무량…… 너는 과연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사일성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혼잣말을 밖으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땅에 새겨져 있는 말발굽을 향해 시선이 움직였다.

아직 말발굽이 남겨져 있는 것은, 이곳을 빠져나간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뜻.

사일성의 눈가가 살기로 범벅 되듯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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