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고희연 (2)
2017.08.27.
묵소정은 곁에 있는 묵위현을 바라보면서 진무량의 눈치를 살폈다.
진무량은 눈앞에 묵위현이 있는데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있었다.
묵소정은 처음 보는 광경에 적잖이 당황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누구라도 묵위현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대놓고 드러내느냐와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런 현상은 아주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허나 진무량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진무량의 입장에서는 묵위현과의 만남이 딱히 대수롭지 않았다.
명성만 놓고 비교해 보더라도 진무량은 묵위현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본래의 몸 상태였다면 정면으로 맞붙는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았을 터.
이곳이 사파의 중심지인 영사문이 아니라 마교였다면, 군중들이 묵위현에게 예를 취했던 반응들 또한 진무량에게 똑같이 일어났을 것이다.
진무량은 묵묵히 묵위현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묵위현은 진무량이 포권을 취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순히 포권을 취하는 행동을 보았을 뿐임에도, 진무량이 그저 그런 평범한 자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 기간을 사파의 최고수 자리에 올라 있었던 묵위현은,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자신에게 느끼는 존경심이나 굴복감을 예측할 수 있었다.
허나 눈앞의 사내에게서는 그런 종류의 감정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정말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있을 뿐인 것이다.
묵위현은 진무량의 포권을 답하지 않은 채, 묵소정을 향해 말했다.
“말없이 또 사라지면 어떡하느냐. 나타나기로 한 시각이 지나서 사람들이 너를 찾고 있느니라.”
눈치 빠른 묵소정은 묵위현의 목소리가 평소의 다정한 할아버지의 음성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허나 우연히 만난 진무량과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잠깐 이 오라버니와 할 말이 있어서 조금만…….”
“아비가 애타게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그곳에 먼저 가보아라. 그때까지 내가 이 사내와 함께 있으마.”
묵소정은 이대로 진무량과 헤어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으나, 당장 아버지가 찾고 있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또한 이 연회에 진무량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알겠어요. 전 이만 가볼게요.”
인사를 마치면서 묵소정은 재빨리 진무량을 말했다.
“곧 다시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묵소정은 진무량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호위무사들이 있는 곳을 향해 돌아갔다.
묵소정을 돌려보낸 뒤, 묵위현이 진무량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는가?”
“그러도록 하겠소.”
* * *
묵위현은 근처에 있는 건물 중에서 사람이 없는 서재로 진무량을 데리고 갔다. 연회는 밖에서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서재 내부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진무량과 묵위현은 밖이 훤히 보이는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처럼 진무량과 묵위현이 같은 곳에 앉아 있는 작금의 상황은 결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둘은 각각 마교와 사파를 상징하는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진무량과 묵위현이 만날 법한 장소라 한다면 마교와 사파가 서로의 존폐를 걸고 겨루는 곳,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격정적인 전장의 한가운데였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진무량과 묵위현의 만남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서로를 향해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일다경(15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무량은 가만히 침묵을 지키면서 모든 감각을 묵위현에게 집중했다.
사파를 상징하는 세 명의 절대고수 중 한 명인 적포신군 묵위현의 명성은 조금도 과장되거나 부풀려진 것이 없었다.
굳이 검을 겨뤄보지 않아도 묵위현의 강함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강맹하고 파괴적인 기운이 묵위현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검을 잡은 자들은 감히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분위기.
단순히 뛰어난 상승무공을 익혔다거나 무공의 경지가 어떻다던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사선을 지나온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기운을, 묵위현은 선명하게 내뿜고 있었다.
묵위현이 가벼운 웃음을 흘리면서 무거웠던 침묵을 깼다.
“참을성이 꽤나 뛰어난 젊은이구먼. 결국 노부가 먼저 입을 열게 하다니.”
“별다른 용건이 없었기에 기다렸던 것뿐이오.”
“침묵 속에서 노부의 역량을 파악하느라 바빴던 것은 아니고?”
의중을 알 수 없는 진무량과 묵위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먼저 시선을 거두면서 묵위현이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렸다.
“상대의 역량을 알아보는 데 굳이 말이 필요치는 않지.”
묵위현은 길게 자란 자신의 수염을 천천히 어루만지다 말을 이었다.
“의아한 것은 자네의 정체일세. 지금껏 살아왔던 인생을 돌이켜봐도 자네만 한 고수를 만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만한 인물과 대면하면서도 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어.”
묵위현 또한 진무량의 정체를 전부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멸천대는 한번 적으로 둔 상대는 완전히 몰살시킬 때까지 철저하게 몰아붙이기 때문에 정보 자체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멸천대가 쓰는 흉악한 나찰 가면 덕분에 인상착의만으로는 사실상 판별이 불가능했다.
진무량은 묵위현의 반응에 속으로 적잖이 동요했으나, 겉으로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너무 과분한 칭찬이 아니오? 그저 강호를 살아가는 일개 검객일 뿐이오.”
“노부의 눈을 옹이구멍으로 보는 것인가.”
묵위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가 이내 툭 던지듯이 말을 이었다.
“자네도 이미 나를 파악했을 것이 아닌가. 그것과 똑같이 나도 자네를 파악했네.”
진무량의 입가에 흥미 있는 상대를 발견했을 때 만들어지는 특유의 비웃음이 그려졌다.
역시 묵위현은 얕잡아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이미 눈치챘다면 더 이상 귀찮게 연기를 할 필요가 없어졌군. 뭐 그리 나쁘지 않네.”
“허허, 이렇게 곧바로 돌변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모른 척하고 있을 걸 그랬구먼.”
묵위현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는 듯했으나, 깊은 눈동자만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조금도 동요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감추고 있는 내공도 드러내는 것이 어떤가? 그럼 내 자네의 정체를 알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어. 그 외에 다른 사정도 있지만.”
“노부도 딱히 숨기고 싶어 하는 자의 정체를 밝히려 하는 취미는 없네. 다만.”
드르르르륵!
묵위현의 몸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사파의 절대고수 묵위현의 기세는 너무나 사납고 또한 무거웠다.
“방금 내 손녀딸과 함께 있던 이유는 들어야겠군.”
기세를 내뿜는 묵위현과 마주함에도 진무량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꼬맹이와는 우연히 만났을 뿐, 아무런 관련도 없어.”
“……자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부의 충고를 명심해서 듣게.”
묵위현은 여전히 기세를 뿜어대며 말했다.
“왜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찾아왔는지 묻지 않겠네. 허나 만에 하나라도 내 손녀딸이나 영사문을 건드린다면 내 직접 그대를 찾아갈 것인즉,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말게.”
묵위현은 땅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적인 기세를 안으로 갈무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게야.”
눈앞의 사내는 분명 위협적인 존재가 틀림없지만,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검을 겨룰 필요는 없었다.
서로 겨룰 이유가 없다면 굳이 맞설 이유가 없을 뿐더러, 설사 승리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이득도 없는 싸움일 뿐이다.
진무량이 말했다.
“처음부터 영사문을 건들 생각은 없었지만, 뭐 어쨌든 그쪽의 뜻은 잘 알아들었어.”
묵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자네가 한 말에 책임을 지길 바라네.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나와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이네. 그럼 부디 조용히 돌아가시게.”
* * *
묵위현의 고희연이 이어지는 동안 유독 바쁘게 움직이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면서도 철저했고, 또한 은밀했다.
그들은 백살대. 구중련이 심어 놓은 첩자들이었다.
백살대의 부대주인 엄성천은 인적이 없는 후미진 뒷골목에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그가 기대고 있는 벽 반대편에서 미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대주님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엄성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지면서 입을 열었다.
“대주께 설명은 잘 해두었겠지?”
“그렇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비천검문 놈들의 정체를 밝힐 놈은 확보해 두었나?”
“그 또한 확실히 확보해 두었습니다.”
백살대는 비천검문의 일행이 오늘 암살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는 거짓 소문을 극비리에 몇몇 고수들에게 흘려놓았다.
또한 유서하와 견무겸의 신상과 인상착의 또한 보내두었다. 사건이 터지면 유서하 일행을 알아볼 수 있는 조치를 모두 마친 것이다.
모든 일들이 계획한 대로 차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계획대로 술술 풀린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가출한 묵소정을 찾아다니다가 유서하 일행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유서하의 존재를 빨리 확인했기에, 그들이 고희연에 참석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하여 그에 따른 완벽한 함정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요행에 기댄 감은 없지 않지만, 그로 인해 더욱 완벽한 함정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혹시 모르니,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가 보낸 서찰을 받은 놈을 죽여 입을 막아라.”
“알겠습니다. 헌데 왜 비천검문의 정체를 밝히시려는 것입니까? 이왕이면 진무량의 정체를 밝히시는 것이…….”
엄성천이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고서 말했다.
“갑자기 귀혈악인이 나타났다고 하면 쉽게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어차피 귀혈악인과 유서하를 함께 엮을 것이니 딱히 상관없는 일이다.”
엄성천이 말을 이었다.
“비천검문의 정체를 밝힐 놈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면서 유서하가 있는 쪽으로 유인해라. 그리고 계속 내게 보고하면서 신호를 기다려라.”
“존명.”
벽을 두고 대화하던 백살대원의 기척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엄성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다. 나머지는 진무량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진무량이 유서하와 여태 함께 행동했던 것으로 보아 분명 그들은 함께 움직일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은, 진무량과 영사문이 분쟁이 일어난 뒤 묵위현이 직접 나서서 진무량과 맞붙는 것이었다.
‘둘 중 누가 죽어도 좋고, 둘 다 죽으면 더욱 좋은 일이다.’
귀혈악인과 적포신군…… 둘 중 누가 더 강할까?
‘기대되는군.’
* * *
진무량은 묵위현과 담소를 마치고 유서하가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거리는 꽤나 붐볐으나, 다행히 멀리서 유서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다가온 진무량을 유서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별일은 없었죠?”
“음. 뭐 딱히.”
묵위현을 직접 만나 대화를 하기는 했으나, 진무량의 기준에서는 딱히 별일이라 할 것이 아니었다.
유서하가 말했다.
“그럼 서둘러 움직이죠. 갈 곳이 있어요.”
“그게 어딘데?”
“이번 고희연에서 가장 중요한 연회가 곧 열린다고 하네요. 영사문의 장로들은 물론 많은 무인들이 몰릴 테니, 한번 가볼 생각이에요.”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간다면 일일이 영사문의 무인들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고, 모인 영사문의 무인들을 한눈에 관찰할 수도 있다.
유서하가 말했다.
“연회는 연무장에서 열린다고 하네요. 저희도 서둘러 움직이죠.”
유서하 일행은 영사문 안에 있는 연무장 쪽으로 이동했다.
영사문의 연무장은 한눈에 보아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었다. 그 넓은 연무장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 모이기 시작했다.
연무장 중앙에는 영사문의 주요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묵위현의 아들이자 묵소정의 아버지인 묵자강(墨滋剛)도 자리하고 있었다.
연무장 주위는 지금까지 향했던 어느 장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이곳에서 적포신군이 연설을 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린 것이다.
유서하가 뒤쪽에 있는 진무량을 보며 말했다.
“일단 어느 정도 사람이 빠질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네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기에 당장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유서하는 주변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으나, 연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온몸에 피를 칠갑한 사내가 연무장으로 다급하게 달려온 것이다.
“모두 비켜주시오!”
웅성 웅성―.
연무장에 모인 이들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레 피투성이로 나타난 사내에게 모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사내는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영사문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있는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이내 피를 뒤집어 쓴 사내가 묵자강의 앞에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장로님들께서 모두 살해당하셨습니다!”
웅성― 웅성―
의복에 피가 묻은 채 나타난 사내가 묵자강에게 한 보고는 삽시간에 장내를 충격에 빠뜨렸다.
장내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중 몇몇 목소리가 큰 자들이 내는 소리는 똑똑히 귀에 들릴 정도였다.
“누가 감히 장로님들을 해쳤단 말인가!”
“영사문의 연회에서 이 무슨……!”
묵자강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장로님들이 살해당하셨다니?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저는 그저 장로님들께서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으시기에 거처를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흡!”
온몸에 피가 묻은 채 보고하던 사내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거의 울먹이듯이 말을 이었다.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고, 장로님들은 모두 숨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 밖에 다른 특별한 것은 없었느냐!”
묵자강의 다급한 외침에 피를 뒤집어 쓴 사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님들의 시신 옆에 비천검문이라는 글자가 피로 쓰여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