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38화 (38/143)

38화. 영사문으로

2017.08.13.

유서하 일행은 황룡표국의 표행을 떠나지 않고 함께 움직였다. 영사문으로 향하는 길과 황룡표국 표행의 경로가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표행은 험난한 무아산을 지나 곧 당협에 도착했다. 당협은 표행의 목적지인 절강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었다. 특히 상업이 발달한 당협은 제법 규모가 큰 마을로서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은소연은 당협에 도착하자마자 객잔을 빌렸다. 그 덕분에 오랜 산행으로 지친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객잔에서 몸을 쉴 수 있었다.

험난한 무아산을 지나면서 표행을 이어갔던 황룡표국의 일행들은 객잔에 도착하는 즉시 곯아떨어졌다. 그동안의 험난한 여정에 모두 지칠 대로 지쳤던 것이다.

일부 표물의 경계를 맡은 표사들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몸을 쉬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유서하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객잔에 도착한 뒤, 종이와 먹을 구해서 서찰을 쓰고 있었다.

견무겸은 유서하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가씨, 오늘은 이만 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표행을 통해 지친 것은 황룡표국 일행뿐이 아니었다. 유서하 역시 거친 산세의 무아산을 가로지르면서 낮에는 쟁자수들과 함께 무거운 짐을 나르고, 밤에는 표물을 지키기 위해 번을 섰다.

당연히 표행 중에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견무겸은 유서하가 객잔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쉬기를 바랐다.

오랫동안 표행을 해온 표사들도 지쳐 쓰러질 정도에 고된 일정. 게다가 유서하는 그와 같은 표행을 처음 경험한 것이다. 무공을 익혔다고는 하나, 여인의 몸으로 분명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피로가 쌓일 대로 쌓였음이 분명함에도 유서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유서하는 곧 영사문을 찾아갈 것을 미리 대비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가장 안전하게 영사문을 조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유서하는 붓으로 서찰의 글씨를 쓰면서 대답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서 쉬어.”

“저도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필요한 일이 있다면 곁에서 돕겠습니다.”

유서하가 서찰을 다 써내려갈 때쯤, 견무겸이 입을 열었다.

“비천검문에 보내는 서찰입니까?”

“맞아. 사파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정체를 들키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신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견무겸은 유서하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문을 조사하다 보면 소속된 문파를 밝혀야 할 순간이 찾아올 확률이 농후하다. 유서하는 그와 같은 상황을 미리 예견하여 대비해 두는 것이리라.

유서하는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들은 물론,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부분들까지 모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유서하는 본인의 의지로 영사문으로 향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 당협을 지난다면 영사문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여 미리 준비할 것들을 확인하고 행동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견무겸이 말했다.

“그 서찰은 제가 전서구를 통해 비천검문으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주겠어? 그럼 난 잠시 은 낭자를 만나고 올게. 작별인사는 내일 정식으로 한다 하더라도, 떠난다는 사실은 알려야 하니까.”

당협을 중심으로 영사문이 있는 곳과 황룡표국 표행의 목적지가 갈리기 때문에, 이제는 표행을 떠나야 했다.

견무겸이 말했다.

“서찰을 전하기는 하겠습니다만, 아가씨의 뜻대로 움직여 줄지는 의문입니다. 본문 또한 아가씨께서 영사문을 직접 찾아는 것을 위험하다고 여겨 반대할 것입니다.”

“반대한다면 그에 따른 이유를 듣고 설득해야겠지. 구중련과 영사문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것이 분명해. 이런 긴급한 사안을 미뤄두고 있을 수는 없어.”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구중련을 조사하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했으니까.”

“하지만…….”

“비천검문의 신조는 올바른 정신을 수양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거잖아. 잘 설득한다면 분명 내 뜻을 이해해주실 거야.”

“……맞는 말입니다.”

견무겸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견무겸은 다시 한번 유서하를 말리고 싶었다. 허나 그녀의 생각을 듣고 나니 더 이상 말릴 명분이 없었다.

견무겸이 서찰을 챙기며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서하는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견무겸에게 말했다.

“항상 고마워. 무겸.”

다음 날 아침. 유서하는 진무량, 견무겸과 함께 영사문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미리 은소연과 작별인사를 하기로 정해둔 곳으로 움직였다.

은소연은 어제 유서하가 떠난다는 말을 듣고, 아쉬워하면서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만날 것을 청했다.

은소연이 택한 작별 장소는 객잔 밖에 마구간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였다.

마구간에는 지금껏 표행을 하는 동안 보지 못했던 말들이 여럿 보였다. 그곳에 묶여 있는 말들은 모두 크기가 보통의 말보다 훨씬 크고, 하나같이 총명한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진무량은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이 묶여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훈련받은 말들은 진무량이 다가와도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그중 하나는 주변의 말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히히이이힝!”

미묘하게 붉은 빛을 띈 그 말은 진무량을 향해 거칠게 날뛰었다. 성난 콧김을 내뿜더니 진무량을 향해 앞발을 들어 올리며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거친 반응을 보이는 말을 향해 진무량은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잔뜩 흥분해 있는 말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진무량이 손을 갖다 대자, 흥분했던 말은 놀랍게도 서서히 진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더니 이내 머리를 내리고 온순해졌다.

진무량은 대견하다는 듯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꽤나 똑똑한 놈이군.”

“푸르르릉.”

진무량이 만지고 있는 적갈색 말은 머리를 움직이면서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유서하는 진무량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꽤나 놀라고 있었다.

흥분한 말을 단숨에 진정시켰다는 사실보다, 진무량이 보이는 반응 때문이었다.

말을 쓰다듬을 때, 평소 냉철하던 진무량의 인상이 변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평소의 차가운 분위기가 옅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표정이나 행동이 딱히 변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견무겸은 유서하가 진무량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유서하는 여전히 진무량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지금 뭔가 평소와 다른 것 같지 않아?”

견무겸은 유서하가 말하는 상대가 진무량임을 알고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진무량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입니까?”

유서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견무겸은 진무량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허나 유서하는 달랐다.

그동안 진무량을 유심히 지켜봐서 그런 것일까.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여태껏 진무량의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그가 어떤 마음가짐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닌, 그저 진무량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미묘한 변화를 유서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말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걸까.’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다가가려 할 때, 은소연이 객잔 안에서부터 걸어 나왔다.

유서하의 앞으로 다가온 은소연이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나신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드릴 것이 있어서 이곳으로 불렀어요.”

유서하는 은소연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진무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다시 평소의 냉철했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제 말 듣고 있으신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은소연을 향해 유서하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서하를 향해 은소연이 살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디로 가시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馬)을 준비했어요.”

“그렇게까지 신경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중하게 거절하는 유서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은소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은인의 대한 보답이자 작은 성의예요. 평소 자주 거래를 하던 곳에서 덤으로 말을 몇 마리 더 받은 것이니, 부담 없이 받으셔도 돼요.”

“그렇다면 감사히 받도록 할게요.”

“모두 훌륭한 명마들이니,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시지요.”

진무량은 은소연의 말을 듣자마자, 방금까지 날뛰었던 말을 마구간에서 꺼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하게 말의 등 위로 훌쩍 올라탔다.

은소연이 진무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 소협은 선물이 마음에 드신 것 같네요.”

유서하는 진무량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은소연은 정중하게 예를 취하면서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짧은 인연이었으나 유 소저께서 떠나는 것이 참 아쉽게 느껴지네요. 지금까지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부디 표행을 잘 끝마치시기를 바랄게요.”

* * *

호리호리한 체격의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활을 등 뒤에 걸치고 있는 사내.

그는 일전에 진무량과 한 번 겨룬 적이 있는 소천광이었다.

소천광은 절벽 끝자락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눈동자는 저 멀리 떨어진 절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족히 삼백 장은 떨어진 거리.

소천광은 천천히 등에 걸친 활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살을 모조리 꺼내 공중에 던졌다.

휘익.

높이 솟아올랐다가 땅을 향해 떨어지던 화살들은, 마치 시간이 멈춘 양 허공에 멈췄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을 이용해서 공중에 화살을 고정한 소천광은, 그중 하나를 손으로 집어 활시위에 걸쳤다.

그리고는 온몸의 체중을 뒤로 실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팽!

소천광의 활, 낙영신궁의 활시위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화살을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있던 화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방금 소천광이 쏜 화살을 따라서 움직였다.

쉐에에에엑!

귀를 찢는 굉음을 울리며 날아가던 소천광의 화살촉은 점점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쾅! 그르르르르르!

소천광의 화살이 푸른 섬광처럼 뻗어나가 그가 바라보고 있던 절벽에 박혔다. 그러자 높이 솟았던 절벽이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소천광은 무너져 내리는 절벽을 오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련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시험한 화살을 통해 소천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강기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무너진 절벽더미를 바라보며 그가 떠올린 사내는 바로 진무량이었다.

처음 겪었던 뼈아픈 패배. 수없이 그때를 곱씹으며 비약적인 무공의 성취를 이뤄냈다.

절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쯤, 소천광의 옆으로 그림자처럼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귀혈악인을 찾았습니다.”

소천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구중련의 정보망을 이용해서 진무량을 찾아 왔고, 마침내 그의 행적을 찾아낸 것이다.

싸늘한 소천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에 있던가?”

“절강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당협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소천광은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깊이 따라붙지 않은 채 진무량의 행로를 살폈습니다. 그는 지금 당협을 벗어나 영사문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소천광은 눈을 내리 깔은 채 발밑을 바라보았다.

진무량이 있는 위치를 알았을 뿐인데도 주체할 수 없는 살심(殺心)이 들끓었다. 씻을 수 없는 패배의 굴욕은 흐려지기는커녕, 마음속에서 점점 더 커져갔다.

지난 시간 동안 그는 남궁세가에서 진무량과의 겨뤘던 순간을 수없이 곱씹었다.

가장 큰 실수는 진무량과 정면으로 겨뤘던 것이다.

자신의 특기는 정면승부가 아닌 암살.

다시 한번 진무량을 죽이라는 명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그것을 이행할 수 있는 자신감은 충분했다.

허나 적무혁이 소천광에게 내린 명령은 진무량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노군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적무혁은 진무량을 포섭할 가치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여 그를 죽이지 말라는 명을 내렸으니, 소천광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으득.

순간 끌어 올랐던 분노를 추스르고 소천광은 평정을 되찾았다.

“영사문의 심어놓은 첩자에게 진무량의 존재를 알리고 인상착의를 전해 놓아라.”

“그밖에 달리 전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 외의 진무량에 관한 모든 것은 내가 처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천광이 말했다.

“노군께 이 사실을 전하라. 만약 영사문으로 오신다면 정중히 모셔야만 한다.”

“존명.”

보고를 하던 자는 그림자처럼 다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영사문이라…….”

진무량의 행적을 떠올리던 소천광은 영사문에 심어 놓은 첩자를 떠올렸다.

영사문 내의 첩자는 단순히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심어 놓은 첩자와는 완전히 다르다.

여차하면 사파의 지존 적포신군 묵위현을 죽이기 위해서 심어놓은 자.

구중련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로서, 강호에는 감히 검을 맞댈 수 있는 상대조차 없을 것이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진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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