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영약 (1)
2017.07.30.
유서하는 신투를 붙잡은 뒤, 황룡표국의 표물을 모아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곁에는 견무겸과 황룡표국의 표사 두 명, 그리고 포승줄에 단단히 묶인 신투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유서하가 표물을 지키고 있는 표사를 향해 다가갔다.
근엄한 표정으로 표물을 지키고 있던 표사의 이름은 한승(翰昇)이었다.
한승은 유서하의 뒤에 있는 황룡표국 표사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포승줄로 결박당해 있는 신투를 힐끗 쳐다보고 난 뒤, 동료 표사들을 향해 말했다.
“끌고 온 자는 누구인가? 설마…… 신투를 잡은 겐가?”
“바로 보았네. 이놈이 그 유명한 도둑 신투일세.”
한승은 놀라면서도 신기한 듯이 신투를 바라보았다.
“쳇!”
그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신투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한승은 놀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표사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 정말 대단하군. 그 신투를 잡다니……. 그야말로 대사건이 아닌가!”
“여기 있는 유 소저의 도움을 받았을 뿐, 우리가 특별히 한 일은 없었네.”
주변에 시선이 유서하에게 모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단 사라진 표물이 모두 돌아왔는지부터 확인하시지요.”
유서하의 말을 듣고, 신투의 제자를 포박하고 있는 황룡표국 표사가 말했다.
“행수님이나 남 표두님은 어디 있으신가?”
이번 황룡표국 표물들은 그 종류가 다양하고, 그 양도 엄청나게 방대했다. 하여 잃어버린 물건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남 표두와 행수인 은소연밖에 없었다.
표물을 지키고 있었던 한승이 동료 표사들을 향해 말했다.
“남 표두님께서는 신투가 다시 이곳을 노릴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최상급의 표물들을 따로 옮기셨네. 음…… 그러고 보니 행수님은 본 적이 없군.”
순간 유서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갑작스러운 남 표두의 행동에서 수상함을 느낀 것이다.
“혹시 남 표두님이 표물을 옮길 때, 따로 남긴 말은 없었나요?”
한승은 그때 상황을 천천히 돌이켜 생각해보고는 말을 이었다.
“표물을 옮기는 일은 행수님과 상의를 모두 마쳤다고 하였소.”
유서하는 점점 의문이 커져갔다.
‘표물을 옮기는 것을 은 낭자가 찬성했을 리가 없는데…….’
신투가 표물을 가지고 도망치면 잠혼향을 사용해서 그를 잡겠다는 사실을, 은소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잠혼향을 뿌린 표물을 준비한 사람이 은소연이었다.
유서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가자, 한승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남 표두님이 했던 말은 그것이 전부였소만……. 앗!”
말끝을 흐리던 한승이 뭔가 생각 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유서하는 재빨리 그를 향해 물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남 표두님께서 이곳을 철통같이 지키라고 하였소.”
“…….”
“그리고 또…….”
“이제 괜찮아요.”
유서하는 고개를 돌려 견무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겸. 주변을 돌아보면서 은 낭자의 위치를 파악해줘.”
“알겠습니다.”
견무겸은 곧바로 은소연을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 유서하는 그곳에 남은 채, 잠혼향의 향을 찾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 신투가 다른 표물을 훔칠 것을 대비해서, 다른 표물들에도 잠혼향을 조금씩 묻혀두었다.
잠혼향은 일반사람들은 아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향이다. 오랫동안 훈련을 한 유서하조차도 잠혼향을 찾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을 해야 했다.
이내 유서하는 잠혼향의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저쪽인가.’
꽤나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부터 잠혼향의 향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잠혼향을 뿌려둔 표물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치를 확인한 유서하는 표물이 있는 곳을 향해 재빨리 뛰어나갔다.
유서하와 견무겸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한승과 신투를 포박하고 있는 황룡표국 표사들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표사 중 한 명이 한승을 향해 말했다.
“자네 정말 보초는 똑바로 서고 있었던 게지?”
“이 사람이. 내가 이 주변을 얼마나 철통같이 지켰는데!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했다니까!”
“그, 그런가?”
왠지 억울해 보이는 것 같은 한승의 대답에, 황룡표국 표사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 * *
스으으으.
어둠이 깔린 고요한 숲속. 거친 산바람이 휘몰아치면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다.
전대 신투는 무릎을 꿇은 채로, 창에 꿰뚫린 오른쪽 어깨를 지혈하면서 진무량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빛을 내뿜고 있는 하현달과 겹친 진무량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전대 신투는 절로 섬뜩한 기분이 일었다.
특히 슬쩍 바라본 진무량의 눈동자에서는 인간의 온기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얼음장 같은 진무량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슨 말도 꺼내지 못하고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이윽고 진무량의 거대한 창이 바람을 가르면서 움직였다.
‘죽는 건가.’
전대 신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깨가 꿰뚫려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휘두르는 진무량의 창을 피해낼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
“…….”
당장 진무량의 창이 자신을 찌르면서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줄 알았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전대 신투는 찌푸렸던 인상을 펴면서, 한쪽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슬며시 한쪽 눈을 떴을 때, 진무량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전대 신투는 조심스럽게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진무량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새 그는 창을 등 뒤에 걸친 채, 말에 묶여 있는 황룡표국의 표물들을 뒤지고 있었다.
‘뭐, 뭐지?’
신투는 그저 멍하니 진무량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진무량은 상작 속에 들어있는 황룡표국의 표물들을 뒤지면서 거치적거리는 것을 전대 신투에게 던졌다.
전대 신투는 자신에게 날아온 황룡표국의 물건을 확인했다.
자색의 실로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을 새긴 비단과, 번쩍이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금두꺼비였다.
전대 신투는 표행이 시작되자마자 남 표두를 납치해 감금한 뒤, 그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번에 운반하는 표물들에 대해서는 모두 확실하게 꿰고 있었다.
지금 진무량이 던진 물건들은 모두 그 값을 매기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보물이었다.
그렇기에 전대 신투는 갑작스러운 진무량의 행동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전대 신투의 귓가에 갑작스러운 진무량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들 가지고 썩 꺼져.”
믿을 수 없다는 듯, 전대 신투가 진무량을 향해 되물었다.
“뭐, 뭐라고?”
“신경을 거스르면 그냥 죽일 수도 있으니까, 빨리 사라지는 게 좋을 것이다.”
진무량은 처음부터 전대 신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신투 같은 도둑을 잡아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금정신단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진무량은 신투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진무량이 금정신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만들어진 계획은, 오히려 신투가 물건을 훔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노려 금정신단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금정신단을 훔친 사실마저 신투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전대 신투의 입장에서 보면 뜬금없는 일이겠으나, 진무량은 신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계획하고 있던 것이었다.
중간에 몇 가지의 변수가 생기긴 했으나, 결국 모든 것이 진무량의 뜻대로 흘러간 셈이다.
뿌득.
전대 신투는 진무량이 던진 물건들을 쳐다보면서 짧게 이를 갈았다.
나름대로 세간에서 최고의 도둑이라고 불리며, 제법 명성을 쌓았던 신투이다. 헌데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되니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시 네놈 앞에 나타나나서 목숨을 노릴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은가?”
진무량은 전대 신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천하에 검을 쥐고 사는 놈들 중 태반이 나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 텐데, 거기에 한 명이 늘어났다고 해서 별다른 감흥이 있을 것 같나?”
“…….”
“다만, 앞으로 나의 적이 되려 한다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할 거야.”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나는 한번 적이라고 생각한 상대는 기필코 찾아내서 가장 끔찍하게 죽이니까.”
전대 신투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무량이 이귀에게 행했던 고문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전대 신투는 진무량의 무공 수준이 그리 뛰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진무량이 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생을 도둑으로 살면서, 자신과 겨룬 진무량보다 강한 무공의 소유자는 수없이 목격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이 사내는 뭔가 다르다.’
진무량을 향해 모욕적인 언사라도 한번 내뱉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진무량의 말에는 그 누구에게서도 느껴본 적 없는 무게감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제길.”
신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냈다.
진무량에게 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어쨌든 자신의 본업은 도둑. 뻔히 위험해 보이는 자와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따지고 보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 셈이었고, 아주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황룡표국의 표물도 챙길 수 있었다.
‘아직 몸이 쑤시기는 하지만…….’
신투는 진무량이 던진 금두꺼비와 비단을 챙기고 난 뒤, 경공술을 사용해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진무량은 전대 신투에 대한 관심을 지우고, 표물들을 살폈다. 거침없이 함속에 들어있는 황룡표국의 표물들을 뒤지던 진무량의 손이 순간 멈췄다.
이번에 열어본 상자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함들이 잔뜩 보였기 때문이다.
영약을 보관할 때는 만에 하나라도 약효가 변할 것을 우려해 함 속에 넣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진무량은 조심스럽게 나무로 만들어진 함을 하나씩 꺼내서 살펴보았다.
나무로 만든 함의 겉면에는 다행히도 안에 들어있는 영약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있었다.
함은 여러 종류가 있었고, 안에 들어있는 영약 또한 모두 달랐다.
하나둘 함을 살펴보던 중, 진무량은 드디어 자신이 찾고 있는 영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정신단.
달칵.
진무량은 나무로 만들어진 함을 꺼낸 뒤,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영약 특유의 청량한 향이 퍼져나갔다.
“이거군.”
함 속에는 엄지손톱보다 조금 더 큰 하얀색 구슬 모양의 환단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진무량은 그중 한 알을 조심스럽게 집어서 손바닥에 올렸다.
강호에서 수없이 회자되던 최고의 영약이 눈앞에 있었다.
금정신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황룡표국의 표사는, 곁에만 있어도 내공이 정순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갈 정도로 금정신단은 신묘한 기운을 뿜어냈다.
진무량은 가만히 금정신단을 들여다보았다.
혹시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여러 가지 생각이 한 번에 일었다.
사실 내공을 되찾는 것이 그리 놀랍거나 대단한 일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뿐.
딱히 과거에 아름다운 추억 거리는 없다. 거의 모든 순간이 피로 얼룩져있었으니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목숨을 건 사투에서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쾌감이었다.
꼭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에 내공을 되찾으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힘을 갈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유다.
강호에서 결국 약한 자는 억압받기 마련.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 아무것도 아니게 들릴 수 있으나, 그것이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강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힘이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검선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마교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허나 내공을 되찾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감히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억압할 수 없으며, 원하는 것 또한 모두 이룰 수 있다.
멈칫.
유월천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진무량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와 관련된 유서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기까지인가.”
내공을 되찾으면 더 이상 유서하와 같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사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유서하는 분명 특이한 존재였다.
여태껏 진무량은 웬만한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나, 유서하라는 여인은 분명 흥미로운 상대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진심으로 상대를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자신과 반대로 생각하는 유서하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함께 있을수록 조금씩 그녀를 알 수 있었다.
유서하가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만약 유월천의 여식이 아닌, 그저 평범하게 유서하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생각이군.’
허나 그럴 리는 없다.
유서하와는 어차피 적이 되어 만났어야 할 운명.
마교와 정파, 그리고 유월천을 생각했을 때, 유서하와는 함께할 수 없다. 특이한 상황으로 지금까지 함께 행동하고 있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유서하와 했던 내기였다.
‘내기는 내가 이겼어. 난 변하지 않을 거거든.’
진무량은 손에 쥐고 있는 금정신단을 단번에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