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33화 (33/143)

33화. 격

2017.07.27.

남 표두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설마 저를 신투로 의심하시는 겁니까?”

“훗, 연기력은 제법 봐줄 만하군.”

진무량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태까지 자연스러운 행동, 그리고 당장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는 모습만 봐도 남 표두는 신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만하군.’

허나 진무량은 남 표두가 신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진무량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 표두가 신투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녹림이 표행을 습격했을 때였다. 더 정확히는 남 표두가 삼귀와 겨루는 순간이었다.

말에 앉은 진무량이 섬뜩한 눈빛으로 남 표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네놈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내 심기를 거슬렸던 환영문 놈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죽었을 텐데.”

진무량이 처음 황룡표국의 사람들과 만나던 날, 그는 꿈을 통해서 과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진무량의 적이었던 상대가 바로 환영문이다.

진무량의 입에서 환영문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남 표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그는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곧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말했다.

“소협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뭘 몰라? 지금 네가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는 인피면구가 환영문의 것인데.”

남 표두는 숨이 멈춰버린 사람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오랜만에 환영문의 인피면구를 보고, 나도 꽤나 놀랐어. 헌데 아직도 그 약점은 고치지 못했나보군.”

혼이 나간 듯한 남 표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진무량이 말했다.

얼마 전 과거를 보여 주는 꿈을 통해서 환영문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꼭 그 때문에 환영문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영문의 무공은 대단한 것이 없었기에, 딱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허나 환영문에서 만들어진 정교한 인피면구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환영문은 축골법을 통해 체형을 바꾸고, 인피면구로 얼굴을 속였다. 그리고 어디든 잠입해서 마교를 혼란에 빠뜨리고, 정보를 조작했다. 하여 그 당시 마교에서 환영문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환영문과의 오랜 전투 끝에, 진무량은 그들의 인피면구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인피면구를 피에 닿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아주 미묘하지만 인피면구의 색이 변한다. 그것도 아주 미묘한 반응이었으나, 오랜 시간 환영문과 겨뤄온 진무량은 그 미묘한 반응을 충분히 가려낼 수 있었다.

남 표두가 삼귀를 베어내면서 피가 튀어 얼굴에 닿았을 때, 과거 환영문의 인피면구와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그리고 진무량은 찰나의 순간동안 보인, 남 표두의 인피면구에서 일어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 진무량은 남 표두가 신투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 후로 언제나 남 표두를 주시해왔다.

당시 유서하는 진무량의 행동을 보고 신투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진무량은 그때 이미 신투의 정체를 알고, 남 표두를 주시하고 있었으니까.

굳어있던 남 표두의 표정이 흉악하게 바뀌면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을 올렸다.

찌이이이익.

섬뜩한 살을 찢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남 표두의 인피면구가 벗겨졌다. 그러자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오십 대 정도의 얼굴이 드러났다.

“네놈이 어떻게 환영문을 알고 있는 것이냐?”

진무량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는 특유의 조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자신이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고 멸문시킨 문파인 것을.

진무량이 말했다.

“내 질문에 대답하면 말해주지. 네놈 말고 표물을 훔쳐간 놈이 있던데, 알고 있는 자인가?”

“그놈은 내가 키우고 있는 제자다.”

진무량과 대화를 하고 있는 자는 유서하가 쫓고 있는 신투의 사부로, 전대의 신투였다.

전대의 신투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의 역량을 알아볼 겸, 황룡표국의 표물을 훔치기 위해서 신투를 표행에 잠입시켰다.

진무량이 말했다.

“그런 거였나? 내가 아는 여인이 네 제자를 쫓고 있을 텐데, 생각보다 여유롭군.”

“흥! 고작 그런 자들에게 잡힐 경공술은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래?”

진무량은 무덤덤하게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만만하게 여길 여인은 아닐 텐데. 뭐 내 상관할 바 아니니까.”

유서하가 신투의 제자를 잡아도 그만이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애초부터 자신의 목적은 금정신단이지, 도둑 잡기가 아니었으니까.

전대 신투가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이제 네놈 차례이다. 어떻게 환영문을 알고 있는 것이지?”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하는 진무량을 보고 신투는 기가 막혔다.

“네놈의 질문에 대답하면, 환영문과 무슨 관계인지 말해준다고 하지 않았더냐?”

“아.”

진무량은 방금 생각난 것처럼 탄성을 내뱉은 후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있었나? 그렇다면 미안하군.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다 듣고 나니까 별로 말해주고 싶지 않아졌어.”

전대 신투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외쳤다.

“뭐라고?”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걸 빼먹었군. 내가 하는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좋아. 변덕이 심하거든.”

탁.

진무량은 단숨에 타고 있는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잡설은 이쯤하지. 내가 볼일 있는 건 네가 아니라 저쪽이라서 말이야.”

진무량은 전대 신투가 훔친 황룡표국의 표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중에서 내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그것만 나에게 넘긴다면, 이 상황은 못 본 척 넘어가 주지. 어떤가. 이 정도면 꽤 좋은 조건 아닌가?”

전대 신투는 진무량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발목에 숨겨둔 날카로운 단검 두 자루를 빼들었다.

전대 신투는 단도의 검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쥐면서 진무량을 노려보았다.

“거절하지. 네놈이 환영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환영문과는 어렸을 때 인연을 끊은 몸. 다만, 나의 인피면구를 알아볼 수 있는 네놈을 살려둘 수는 없다.”

진무량 역시 신투에게 맞서기 위해 거대한 창을 비껴들었다.

“신투에 대해 조사한 것을 보니, 도둑질을 할 때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사람이 늘 한결같으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진무량의 제안을 받아들이거나 값비싼 몇 가지의 표물을 들고 달아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허나 신투에게 있어, 자신이 사용하는 인피면구를 알아볼 수 있는 진무량의 존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다.

전대의 신투가 내공을 운용하면서 살기를 내뿜으니 그 기세가 제법 사나웠다.

진무량은 살기어린 전대 신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창을 비스듬하게 들어올렸다.

전대 신투의 역량을 가늠해봤을 때,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몸이었다면 한 순간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지금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모든 무공의 밑바탕이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내공이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의 상태라면, 신투와의 승부를 쉽게 예견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불리한가.’

진무량은 신투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누군가와 겨루는 것은 역시나 낯선 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수라장을 겪어 온 진무량조차도.

진무량은 창을 움켜쥐면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지금 당장 사용하지도 못하는 내공을 생각하면서 한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전대 신투를 쫓아 이곳에 오면서, 그와 겨루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곳을 찾아왔다.

내공을 되찾겠다는 뜻을 세웠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은 이상, 시도해보지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지 위험하다는 변명으로 이번 기회를 져버린다면, 다음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 한들 이번보다 더 쉬울 것이란 보장 또한 없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지금의 기회를 날려버린다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혈마옥에서 나온 뒤로, 내공을 잃은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창술을 단련한 것은 지금의 순간을 위해서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냈다.

‘나머지는 목숨을 걸고 상대와 맞서는 것뿐.’

파바바밧!

경공술이 특기인 신투가 순식간에 땅을 박차면서 진무량과 거리를 좁혔다.

쉬익!

전대 신투의 손에 들린 단도가 달빛을 머금으면서 번쩍하고 빛이 나더니, 진무량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진무량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단도를 향해 거대한 창을 휘둘렀다.

진무량과 신투는 서로 물러서지 않았고, 그로 인해 진무량의 거대한 창과 신투의 단도가 정면으로 부딪혔다.

깡!

사용하는 무기의 겉모습만 놓고 보더라도, 당연히 힘으로 인한 승부는 진무량의 창이 앞서야 했다. 허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내공을 담은 신투의 힘을 이기지 못한 진무량의 신형이 뒤쪽으로 밀렸다.

‘제길. 역시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는 무리인가.’

진무량의 생각은 길어질 수 없었다.

일격으로 전대 신투는 단도로 공격할 수 있는 최적의 거리까지 파고들었다. 곧바로 기세를 탄 두 개의 단도가 날아들었다.

챙!

진무량은 창을 일자로 세워서 나무가 있는 부분으로 신투의 일격을 막아냈다. 허나 신투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고, 곧바로 반대쪽 손에 들린 단도로 진무량의 목을 노렸다.

휘익!

진무량은 뒤로 신형을 젖히면서 신투의 단도를 피했다.

신투는 자신의 단도를 요리조리 피하는 진무량을 단번에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으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일단 부상을 입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 먼저다.’

이내 신투는 단도를 크게 휘두르지 않고, 연속으로 짧게 끊어 치는 초식을 사용했다.

챙! 챙! 챙!

양손에 쥔 단도가 연속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진무량은 가끔 스치는 정도의 상처를 입을 뿐, 전대 신투의 단도를 거대한 창으로 모조리 막거나 피해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피해 낼 수 있는 거지?’

전대 신투는 진무량을 공격하면서 의아한 심정을 느꼈다.

상대의 역량을 짐작하기 위해, 처음에는 일부러 진무량의 창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리고 자신의 단도는 너무나 쉽게 진무량의 창을 밀쳐버렸다. 그 순간 그는 진무량이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빠른 시간 안에 승패가 갈릴 줄 알았는데, 진무량은 바로 지척의 거리에서 자신의 단도를 모조리 쳐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시간문제일 뿐이다!’

어쨌든 진무량은 수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

끝없이 공격하다 보면 결국 반드시 빈틈을 찾을 수 있을 터.

그의 단도가 위에서부터 떨어지자, 진무량은 거대한 창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비틀어서 대처했다.

채쟁!

거대한 창이 단도를 튕겨내면서 희미한 불꽃이 튀었다.

진무량이 전대 신투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낼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서로 간에 이뤄낸 무공의 성취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진무량의 눈에는 신투가 어디로 공격할지, 어느 곳을 노리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그뿐 아니라 어느 공격이 허초인지, 다음 번 공격이 어디로 이어질지까지 모두 예상할 수 있었다.

신투가 펼치는 초식의 흐름 자체를 진무량은 완전히 읽고 있었다. 평소의 몸이라면 눈을 감고 겨뤄도 모두 피할 수 있을 정도.

‘이제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단도가 움직일 것이고, 그 일격을 막아낸 뒤 공세로 전환해야 한다.’

휘익!

진무량의 예상대로 신투는 오른손에 쥐어진 단도를 앞으로 뻗었다.

챙!

진무량은 짧게 잡은 창을 둥글게 회전시켜서 신투의 공격을 막아냈다. 허나 내공을 담은 신투의 단도를 튕겨내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써야 했다. 결국 진무량은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어디를 공격할지 안다고 할지라도, 결국 반격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허나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으로는 그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창을 움직이면 허점투성이인 신투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있었으나, 공세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한 걸음만이라도 물러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단 한 걸음. 많이도 적게도 필요 없이 단 한 걸음만 전대 신투가 물러나준다면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허나 그가 순순히 물러나줄 리 없었다.

전대 신투는 진무량에게 바짝 달라붙은 채 두 개의 단도를 맹렬히 휘둘렀다. 진무량의 신경이 완전히 단도에 집중되어 있을 때, 갑작스레 신투가 공격하는 흐름이 바뀌었다.

진무량은 곧바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신투의 다리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각법인가!’

진무량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전대 신투가 몸을 회전시키면서 다리를 뻗어온 것이다.

진무량은 곧바로 몸을 피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지금까지 전대 신투의 공격을 예상했던 것보다 한 박자 느렸다.

퍼억!

전대 신투의 발바닥이 정확히 진무량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으윽!”

신투의 각법을 맞고 진무량은 열 걸음 이상 몸이 뒤로 밀렸다. 중심을 잡기 위해 굳게 디딘 발에 땅이 움푹 파였다.

이내 진무량의 입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신투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각법이 확실한 타격을 입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큰소리치는 것으로 보아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는 놈인 줄 알았건만, 나의 착각이었구나!”

진무량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한 줄기 선혈을 닦아내면서 대답했다.

“한 대 맞으니까 정신이 좀 드는군. 방금 발차기는 제법이었어.”

“흥! 처음 본 순간부터 큰소리를 치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 지경이 되어서도 허세를 부리고 싶은가?”

“허세?”

진무량은 코웃음을 치고 난 뒤 말을 이었다.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다니, 보는 눈마저 없는 놈이었군. 난 그 누구 앞에서도 허세와 가식을 떨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강해 보이기 위해 거짓된 연기를 하거나, 누군가에게 아양을 떨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을 거짓 없이 그대로 표현했을 뿐.

그것은 힘을 잃기 전에도, 그 후에도 항상 변함이 없었다.

남을 속여야 하는 그 순간마저도.

“퉤.”

진무량이 입 안에 남아있는 피를 뱉어내면서 신투를 향해 말했다.

“다시 한번 덤벼봐. 내 말이 허세인지 사실인지 보여줄 테니까.”

“언제까지 큰소리를 칠 셈이더냐!”

전대 신투의 경공술은 그야말로 한줄기 빛처럼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진무량과의 거리를 좁혔다.

씨익.

진무량은 달려오는 신투를 바라보며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애초부터 지금의 몸 상태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혈마옥을 빠져나온 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죽음을 가까이 한 적이 없어서, 간단한 해답을 놓치고 있었다.

챙!

창과 단도가 부딪치는 순간, 이번에도 어김없이 진무량이 뒤로 밀렸다.

신투는 다시 진무량이 방어 일변도로 행동할 것이라 예상하고, 빈틈을 찾아 단도를 찔러 넣으려 했다.

허나 진무량의 움직임은 전대 신투의 예상과 달랐다.

방어를 하기 위해 움직일 줄 알았던 진무량의 창이 전대 신투의 복부를 향해 날아든 것이다.

갑작스런 진무량의 행동에 신투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동귀어진! 같이 죽으려는 것이냐!’

그는 진무량의 의도를 파악하면서도, 자신의 공격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바로 지척의 거리에 진무량이 있었고, 자신의 단도가 진무량의 창보다 더 빠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걱!

신투의 단도가 진무량의 가슴팍을 그으면서 긴 상처를 남겼다.

본래 이런 공격이 성공했다면 다음 공격을 연이어 펼쳐 상대를 압박했겠으나, 전대 신투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먼저 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쇄도하고 있는 진무량의 창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에.

전대 신투는 오른손으로 진무량의 가슴팍에 상흔을 남기느라 불안정한 자세였다. 게다가 자주 사용하지 않는 왼손 하나로는 진무량의 창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깡!

간신히 진무량의 창을 멈추는 것은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전대의 신투는 왼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떨어뜨렸다.

어쨌든 진무량에게 중상을 입히고 자신은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았다. 자연스레 진무량의 기세가 한풀 꺾일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중상을 입었음에도 진무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는 거대한 창을 다시 휘둘렀다.

신투는 다급하게 단도를 거두어들여 진무량의 창을 튕겨냈다.

챙!

신투의 단도가 진무량의 창을 밀쳐낸 뒤, 다시 공격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에 따른 진무량의 대응은 이번에도 방어가 아닌 공격이었다.

진무량에게 있어 목숨을 건 사투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밤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일상과 같을 정도로.

과거 마교의 사대신마로 군림하고 있을 때도, 진무량은 언제나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쉬운 전투보다 목숨을 건 혈투를 즐겨왔다.

적을 유인하기 위해 다수의 적이 도사리고 있는 함정에 직접 빠지기도 하고, 수십 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적과 겨룬 적도 있었다. 그밖에도 손발이 묶인 상태로, 또 독에 중독된 상태로도 수많은 혈전을 벌여왔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사선에서 외줄을 타며 살아왔다. 그 모든 것을 이겨냈기에 강해졌고, 지금 이 순간 여기 살아있는 것이다.

진무량은 다시 한번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창을 뻗었다.

목숨을 도외시하는 것 같은 진무량의 공격에 신투는 점차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진무량과 비교했을 때, 전대 신투가 가지고 있는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서 반드시 상대를 베고자 하는 각오였다.

전대 신투의 이마의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분명 자신의 단도가 먼저 진무량에게 닿으면서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허나 그는 부상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창을 뻗어왔다.

전대 신투와 진무량은 또 다시 서로를 향해 단도와 창을 휘둘렀다.

‘으윽! 제기랄, 안 돼.’

전대 신투는 결국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진무량의 창과 부딪치는 것을 피했다.

저벅.

공격했던 단도를 거둬들이느라 전대 신투는 자세가 무너졌고, 결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진무량의 안광이 번뜩였다.

초식을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를 신투 스스로 내어준 것이다.

그 기회를 진무량이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양손으로 굳게 창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는 동귀어진을 각오한 공격을 제외하면, 일방적인 공격을 할 기회가 없었다.

‘허나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진무량은 자신이 익힌 무공 중에서, 내공이 없는 상태로 펼칠 수 있음에도 가장 위력적인 힘을 내는 초식을 펼쳤다.

‘용형십삼식 제일식 마영수라.’

쉬이이익!

수없이 많은 허초가 섞인 진무량의 창이 전대 신투를 덮쳤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초식. 본래의 힘을 백분지 일도 낼 수 없었기에 사라지지 않는 잔상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나, 수천수만의 변화를 가진 초식이었다.

챙! 챙!

전대 신투는 날아드는 창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듯했다. 허나 결국 진무량이 펼치는 초식의 변화를 전부 막아내지는 못했다.

콰득!

결국 진무량의 창이 신투의 어깻죽지를 뚫었다.

“크헉!”

전대 신투는 비명을 흘리며, 들고 있던 단도를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진무량은 전대 신투의 몸에 박힌 창날을 거칠게 비틀어 뽑았다. 그러자 신투는 그 자리에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았다.

창날에 꿰뚫려 피가 새어나오는 어깻죽지를 붙잡으면서 신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크윽……! 네놈은 죽음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진무량은 차가운 눈빛으로 가만히 신투를 쳐다봤다.

어떤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투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살아온 인생의 무게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진무량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와 난 격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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