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31화 (31/143)

31화. 제의

2017.07.20.

유서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은소연의 부탁에 꽤나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왜 진무량을 만나고자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진무량은 본래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 딱히 은소연에게 의심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워낙 예상외의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진무량이기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은소연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단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뿐인데, 그것을 거절할 마땅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복잡한 생각으로 걷던 유서하는 곧 견무겸과 진무량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견무겸은 유서하를 향해 다가가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신투에 대한 문제는 잘 해결하셨습니까?”

“앞으로 더 할 일이 남았지만, 일단은 잘 처리했어. 그보다…….”

진무량을 바라보며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은 낭자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진무량 또한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를 만나고 싶다고?”

“네. 어떻게 하시겠어요? 혹시 불편하다면…….”

유서하는 내심 진무량이 거절하기를 바랐다. 당사자가 싫다고 하면 은소연도 딱히 더 부탁하지는 않을 터.

진무량이 대답했다.

“한번 만나보지. 왜 나를 부른 건지 궁금하군.”

* * *

진무량은 홀로 은소연이 있는 장소로 찾아갔다. 은소연은 아직 남 표두를 비롯한 표사들을 부르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그곳에는 은소연과 진무량 두 사람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은소연은 먼저 정중하게 예를 취하며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알고 있으실 테지만, 저는 이번 표행의 행수를 맡고 있는 은소연입니다.”

“진무량이라고 하오.”

진무량은 순간 가명을 써야 하나 고민했으나,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선택했다. 천하에 진무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없이 많다. 본명을 알았다고 한들,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은소연은 마치 진무량이라는 이름을 기억에 새겨두려는 듯이 조용히 되뇌었다.

“진무량 소협이시군요.”

“헌데,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것이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진 소협께서는 비천검문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은소연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진무량은 약간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지금은 호위무사 직을 수행하고 있소만, 그런 것이 왜 궁금한 것이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은소연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진 소협의 능력을 비천검문에서 다 알지 못한다거나, 원하시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저희 황룡표국을 찾아주세요.”

진무량은 갑작스런 은소연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어렵게 말하고 있으나, 결국 은소연의 본론은 진무량에게 황룡표국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이오?”

“녹림이 습격했을 때, 진 소협의 활약을 보고 생각했어요. 만약 진 소협께서 앞으로도 황룡표국의 표행을 계속해서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큰 힘이 될 것이라고요.”

비천검문 소속의 유서하와 견무겸보다도, 은소연은 진무량을 더 높게 평가했다.

무공이 뛰어난 인재는 구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구할 방법이 있다.

허나 은소연은 진무량을 단순히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녹림과의 전투에서 직접 나서지 않았기에, 오히려 진무량의 무공 수준을 낮게 평가했다.

허나 진무량은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휘력.

다수가 어우러져 전투를 하는 경우가 많은 표행의 입장에서는 개인의 무력보다도 지휘력이 더 필요했다.

수시로 변하는 전황. 그 상황에 맞춰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리고, 정확한 판단으로 지휘를 내리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허나 그만큼 가장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진무량을 바라보는 은소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사내는 반드시 잡아야 해.’

이번 녹림과의 전투에서 진무량은 그 능력을 여실 없이 보여주었다.

은소연은 표행을 재정비하면서 녹림과의 전투를 표사들에게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일귀가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무량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들은 은소연은 크게 놀랐다.

진무량은 일귀를 막기 위해서 방어가 아닌 공격을 선택했다. 표사들에게 방어진을 풀고 오히려 일귀를 공격하게 만든 것이다.

녹림은 언제나 습격을 하는 입장이었을 테니, 공격에는 익숙해도 방어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해 보이는 사실이다. 허나 이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은 진무량밖에 없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핵심. 그것을 바로 의표라고 부른다.

그리고 진무량은 정확히 녹림의 의표를 찌른 것이다. 그리고 그 틈에 삼귀를 유인해서 처리하고, 이내 전황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이 사내를 황룡표국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도 아깝지 않을 거야.’

진무량에게 백 명의 표사들을 맡긴다면, 능히 이백 명의 표사가 할 수 있는 일을 이뤄낼 것이다.

그 숫자가 백 명이 아니라 천 명이라면?

은소연은 자신의 눈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저 사내는 반드시 투자한 이상의 값어치를 해낼 거야.’

은소연이 말했다.

“언제라도 진 소협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곳이 필요하다면 저를 찾아주세요.”

진무량이 비웃음을 띠며 은소연 말에 대답했다.

“만약 내가 황룡표국으로 간다면 무엇을 해줄 생각이오?”

“적어도 비천검문에서 얻으시는 수입의 백 배 이상을 약속드리지요.”

“겨우 그 정도?”

은소연은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반응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보수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더 많은 은자라도 내어드리지요.”

“은자건, 금덩이이건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나를 설득하기 위해 그쪽이 제시할 수 있는 건 돈뿐인 것 아니오.”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돈이라는 것은 확실하오. 구 할 이상은 금덩이로 마음을 바꿀 수 있을 테니. 허나 모든 사람이 돈으로 움직이지는 않소.”

“그게 무슨…….”

“돈은 분명 훌륭한 무기이지만, 내게 통하는 것은 아니란 뜻이오.”

은소연은 가만히 진무량의 모습을 살폈다.

미남인 외모를 빼면,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행색이었다. 허나 그와 마주할수록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은소연이 말했다.

“그렇다면 진 소협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뭐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흥미요. 헌데 아쉽게도 황룡표국에는 그 흥미가 일지 않아서 말이오.”

뜻대로 되지 않자, 은소연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그렇다면 비천검문에서는 소협께서 바라시는 흥미가 있는 건가요?”

“비천검문과 함께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 약점을 잡고 있기 때문이오. 뭐, 약간 흥미가 이는 대상이 있긴 하지만.”

할 말을 마친 진무량은 은소연을 향해 짧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내게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가보겠소.”

* * *

다음 날, 황룡표국의 표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녹림의 습격으로 인해 몸이 불편한 표사들이 많았지만, 각자 표물을 짊어지고 무아산을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다행히 무아산의 거친 산세는 거의 통과한 상태였기에,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모두 내리막이었다. 지친 표사들에게 그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진무량과 유서하는 여전히 표행의 가장 뒤쪽에서 걷고 있었다.

“어제는 은 낭자와 무슨 이야기를 한 거예요?”

유서하의 물음에 진무량이 대답했다.

“네가 신투를 잡을 방법이 뭔지 알려주면, 나도 말해줄게.”

“……그건 알려줄 수 없어요.”

“그럼 나도 마찬가지야.”

유서하는 잡념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됐어요, 그럼.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은 낭자가 제게 언급했을 거예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겠죠.”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 나도 그런 사실 하나 알고 있는 게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 말해줄 필요 없을 것 같아.”

“……정말이지, 언변으로 당신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네요.”

다시 묵묵히 표물을 지고 걷던 중,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말을 걸었다.

“요새는 딱히 표물을 살피지 않으시네요, 전에는 꼭 한 번씩 표물을 확인했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어졌거든.”

유서하는 달라진 진무량의 행동이 의문스럽게 느껴졌다.

녹림과 전투를 한 이후부터, 진무량은 신투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신투 이야기가 나오면 꽤나 적극적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신투에 대해 물었던 것도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번 떠보듯이 말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때 전방에서부터 표사들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정지! 잠시 표행을 쉬어간다!”

* * *

표행이 잠시 멈추자, 무아산의 산세를 살피던 황룡표국의 표사가 말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산행도 거의 끝나가는 것 같구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황룡표국의 표사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질문을 던진 표사의 눈에서 희미하게 보라색 빛이 흘러나왔다. 그의 정체는 황룡표국의 표사로 변장하고 있는 신투였다.

신투는 녹림과의 전투에서 황룡표국이 승기를 잡았다고 느껴지자, 얼굴이 멀쩡한 표사 시체 한 구를 재빨리 빼돌렸다. 그리고 죽은 표사의 인피면구를 만들어 변장한 뒤, 표행에 끼어들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황룡표국의 표사로 변장하고 있는 신투가 말했다.

“정확히 언제쯤이면 이 산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나? 어서 쉬고 싶어서 말이야.”

“행수님이 하는 말을 듣기로는 사흘 정도만 더 걸으면 된다고 하네.”

“정말 다행일세. 그럼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구먼.”

신투는 진심으로 안심하는 표정을 지으면 말했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무아산에서 끝을 보는 것이 좋다. 괜히 마을로 갔다가는 무슨 변수가 생길지도 몰라. 게다가 청협곡으로 간 표사들과도 합류할 터.’

표사로 변장한 신투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몸을 풀었다. 어깨가 시원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신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표행에 합류하면서 이미 표사들의 배치와 값비싼 보물들이 있는 곳은 얼추 파악해 놓았다.

준비는 모두 끝낸 셈이다.

‘오늘 밤에 승부를 봐야겠군.’

* * *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주변이 온통 검게 물들고, 적막하다고 느껴질 정도에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때때로 들리는 것은 가끔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잠을 자는 척 눈을 감고 자리에 누워 있던 신투는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주변을 슬며시 살피더니, 이내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신투는 빨리 표물을 훔치고 싶은 조급한 마음을 다스렸다. 그러고는 미리 봐두었던 값비싼 표물을 모아둔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신투의 겉모습은 완벽한 황룡표국의 표사였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표물이 있는 곳에 다가갈 수 있었다.

곧 저 멀리에서 모닥불의 불빛이 보였다. 신투는 발걸음을 멈추고 어둠속에 몸을 숨긴 뒤, 경계 상태를 살폈다.

표물 근처에서 번을 서고 있는 표사의 숫자는 네 명뿐이었다.

‘역시 경계가 그리 심하진 않군.’

신투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가늘어진 눈으로 주변을 더욱 철저히 살폈다.

번을 서는 인원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다고 생각되었으나, 녹림과의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쳤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바로 표물 근처에서 번을 서는 자들이 네 명일 뿐, 밖에서 침입을 막는 자들은 훨씬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봤자 나의 경공술을 따라올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을 테지만.’

경계 상태에 파악을 끝낸 신투는 값비싼 표물을 모아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누구냐!”

번을 서고 있는 황룡표국의 표사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자, 곧바로 검집으로 손을 가져가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외쳤다.

황룡표국의 표사로 변장한 신투는 모닥불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며 놀라는 연기를 했다.

“깜짝이야.”

번을 서고 있던 황룡표국의 표사는 자신이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자, 경계를 풀면서 말했다.

“자네가 여긴 무슨 일인가?”

“다음 번이 내 차례인데, 잠을 너무 일찍 깨서 말이야. 모닥불에 몸 좀 녹이려고 조금 일찍 왔네.”

번을 서고 있던 황룡표국의 표사는 신투의 말을 듣고, 완전히 경계심을 풀면서 자리에 앉았다.

“잠이 많기로 유명한 자네답지 않게 웬일로 일찍 깨었단 말인가?”

신투는 모닥불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나도 신기해하던 참이었네.”

신투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번을 서던 표사들이 주변을 살피느라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신투는 조심스럽게 앞섶에 손을 넣었다.

슉.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신투는 미리 준비한 수면향을 던졌다. 그러고는 소매로 자신의 입과 코를 막았다.

번을 서던 황룡표국의 표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어디선가 이상한 향이…….”

수상한 향을 알아차리기는 했으나, 번을 서던 표사들은 이미 수면향을 모두 깊이 들이마신 상태였다.

털썩.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머지 세 명의 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곰조차 쓰러뜨리는 향을 낸다고 하더니, 제법 효과가 괜찮네.’

신투는 곯아떨어진 황룡표국의 표사들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런 뒤 모닥불을 향해 소매로 바람을 일으켜 수면향을 멀리 날려버렸다.

신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표물을 향해 다가갔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끝을 봐야겠지.”

값비싼 표물들을 가질 생각으로, 신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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