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고문
2017.07.13.
황룡표국 표사들이 펼친 방어진 안쪽에서, 진무량은 더욱 걸음을 서둘렀다.
표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둥그렇게 펼친 황룡표국의 방어진이 녹림의 공격에 의해서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녹림의 손이 표물에 닿을 것이었다.
다행히 유서하 또한 운기를 위해 방어진 안쪽으로 향한 상태였기에, 진무량은 쉽사리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유서하의 모습에서는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제대로 운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 최소한의 내공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로만 짧게 운기를 마친 상태였다.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다행히 여기 있었군. 잠깐 할 말이 있어.”
“도와주실 생각이신가요?”
유서하가 진무량을 찾지 못한 이유. 그중에는 진무량이 남궁세가에서 보여준 모습도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궁지를 죽이려 했던 그 순간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진무량은 다른 사람에게 정체를 발각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렇기에 유서하는 여기서 진무량의 내공을 해방시켰다가, 그 화가 황룡표국의 표사들에게 닿는 것을 우려했다.
진무량이 말했다.
“내공을 사용할 생각은 없어.”
“알겠어요.”
대답을 마친 유서하는 곧바로 녹림도들을 상대하기 위해 방어진 밖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진무량이 낚아챘다.
“그게 전부야?”
손목을 잡힌 유서하가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지금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겠다, 이 사실을 검선에게 알리겠다 등등 협박할 거리는 꽤 많잖아.”
“제가 당신을 동료로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협박 따윈 하지 않아요. 애초에 제가 표사들을 구하고 싶어서 나선 것이니,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에요.”
유서하는 곧 진무량에게 잡힌 손목을 뿌리쳤다.
“지금 제가 좀 바빠서요. 할 말은 나중에 하시죠.”
유서하는 다시 방어진 밖으로 향하려 했다.
“황룡표국이 이길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지.”
뒤에서부터 들리는 진무량의 목소리에 유서하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뭐라고요?”
“지금 황룡표국 표사놈들 도우러 가는 거잖아. 내가 도와주겠다고.”
“방금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내공은 사용하지 않아. 이깟 놈들 정도는 내공 없이도 충분하지.”
그때 눈이 큰 쟁자수 한 명이 허겁지겁 진무량을 향해 달려와 말했다.
“소협께서 말씀하신 대로 준비해놓았습니다.”
유서하를 향해 오기 전, 진무량은 쟁자수들이 숨어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민 진무량의 한마디는 쟁자수들이 움직이기에 충분한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ㅡ표사들이 녹림 놈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눈이 큰 쟁자수가 말을 이었다.
“부피가 큰 표물들을 높이 쌓아 놓았고, 보검이 들어있는 표물 또한 따로 빼두었습니다.”
“수고했소. 다른 쟁자수들에게 전해서 표행의 앞쪽에도 이처럼 표물을 쌓아 두시오.”
“알겠습니다.”
쟁자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무량이 고개를 돌려 유서하에게 말했다.
“바쁘다며? 빨리 움직이지.”
진무량은 분명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어 보였다. 유서하는 일단 그와 함께 움직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알겠어요.”
진무량과 유서하는 얼마 안 가서 쟁자수들이 표물을 쌓아둔 곳을 발견했다. 부피 큰 표물들을 이용해서 쌓아올린 표물들은 높이 솟아있었다.
진무량은 따로 빼둔 상자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쟁자수가 말한 명검들이 들어있었다.
명검이 들어있는 상자를 챙긴 뒤,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따라 올라와. 여기를 올라갈 거야.”
“네?”
도무지 유서하는 진무량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표물을 쌓아올린 곳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진무량은 부피가 큰 상자들을 모아 쌓아올린 표물에 오른 뒤, 아래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군.”
뒤를 따라온 유서하가 진무량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가요?”
진무량은 가지고 온 상자 속에서 명검을 꺼내면서 대답했다.
“여기서 네 음공으로 녹림도를 상대할 거야. 네 음파가 어디까지 닿는지 알려줘.”
“왜 하필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어차피 달리 좋은 방법도 없잖아. 그럼 내 뜻대로 움직여. 반드시 황룡표국이 이기게 해 줄 테니까.”
“……알겠어요.”
유서하는 표물로 쌓아올린 곳에 끝자락으로 가서 녹림도와 황룡표국이 겨루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유서하는 곧바로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당신이 보이는 녹림도라면 누구든지 음파로 공격할 수 있어요.”
“좋아.”
스릉.
진무량은 상자에서 꺼낸 명검을 검집에서 뽑아들며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이 검들을 녹림도에게 던질 거야. 너는 내가 검을 던진 상대를 향해 곧바로 음파로 공격해. 그놈들은 녹림도 중에서도 가장 강한 놈들이니까 전력을 다해서 한 번에 죽여야 돼.”
진무량은 아무 이유 없이 녹림도와 황룡표국이 겨루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체적인 황룡표국과 녹림도들의 전투를 보면서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공의 수준이 뛰어난 녹림도와, 그렇지 못한 녹림도들.
어떤 조직이라 하더라도 무공의 수준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법.
진무량은 녹림도의 수뇌부를 찾는 일에 모든 정신을 쏟았다.
보통 사람의 안목이라면 이 난전 속에서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진무량의 안목은 그 보통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진무량은 살아온 모든 세월을 험난한 전장에서 보내왔다.
그것도 단순히 전장에서 오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없이 사선을 넘으면서 몇 번이고 한계를 뛰어넘었다.
비록 내공은 사라졌다고 하나, 수없이 많은 전장에서 겪었던 경험만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위기상황에 녹림도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라든지,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지키려는 모습 등, 녹림도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는 많았다. 거기다가 진무량 특유에 야성적인 감각까지 합쳐진 것이다.
이미 진무량의 머릿속에는 실력이 뛰어난 녹림도, 즉 녹림도의 수뇌부들이 누구인지 완벽하게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그럼 시작한다.”
진무량이 있는 힘껏 손에 쥔 검을 던졌다.
챙!
진무량이 날린 검을 녹림도는 어렵지 않게 쳐냈다. 검에는 내공이 담겨있지 않았기에, 그리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허나 진짜 노림수는 그 다음 유서하의 음파였다.
디리리리링―!
“크악!”
진무량의 검을 받아친 녹림도가 거칠게 외치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후에도 진무량은 계속해서 녹림도에게 검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유서하의 음파가 날아가 적중하는 식으로 한 명씩 녹림도를 쓰러뜨렸다.
‘이럴 수가.’
음파를 날리던 유서하는 차츰 변하는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점차 황룡표국 표사들이 펼치는 방어진이 안정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방어진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막기 급급할 뿐이었다. 허나 지금은 점차 방어진이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녹림은 지금 지휘권도 무너지고 있어.’
진무량과 함께 표물 위에 올라서 음파를 날리기 시작했을 때는, 유서하를 향해 수십 명이 무리지어서 방어진을 뚫고 공격하려 했다.
허나 지금은 따로따로 몇몇의 녹림도가 달려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그 정도 상대라면 유서하의 음파에 막혀 감히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전황을 바라보던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조금씩이지만 승리의 방향이 바뀌고 있어.”
진무량의 시선이 저 멀리에 있는 녹림의 대장, 일귀를 향해 움직였다.
그는 아직도 변해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애초에 승기를 잡을 기회가 있었을 때, 그것을 잡지 못한 것이 네놈의 역량인 것이지.’
처음부터 녹림도들이 모든 힘을 다해 공격을 해왔다면, 황룡표국은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대체로 머리가 나쁜 놈들의 특징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거나, 남들보다 느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귀는 그것을 둘 다 하고 있었다.
유서하는 상황을 살피다가, 저 멀리서 견무겸과 이귀가 겨루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견무겸은 여기저기 무복이 찢어지고 그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
현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유서하가 말했다.
“저기 무겸이 있어요. 일단 빨리…….”
곧바로 진무량이 유서하의 행동을 막았다.
“저놈은 도와서는 안 돼.”
“그게 무슨 뜻이죠?”
“저놈이 겨루고 있는 건 녹림도 중에서도 대장급이 분명해.”
진무량이 일귀와 수하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견무겸과 겨루고 있는 놈을 죽이면, 곧바로 저놈들이 뛰어내려 올 거야. 아직 방어진이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았어. 이 상황에서 녹림도들이 더 합류한다면 황룡표국은 녹림을 이길 수 없어.”
유서하의 눈에 고전하고 있는 견무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렇지만…….”
“지금 이 전황을 바꿀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너는 승리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해서는 안 돼.”
진무량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료에게 필요한 건 값싼 동정이 아니야. 네가 저놈을 돕는다면 여기 있는 표사들이 희생되겠지. 네가 아는 저놈은 과연 그걸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잠시 침묵했던 유서하는 손가락에 내공을 실으며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저희는 하던 일을 하죠. 최대한 빨리 방어진을 안정시키고 무겸을 돕겠어요.”
진무량이 손에 들린 검을 녹림도를 향해 던지며 말했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군.”
쉬이익!
진무량의 손에서 검이 날아가는 것과 동시에 유서하의 금이 튕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디리링―!
* * *
챙!
검끼리 부딪히는 시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견무겸은 뒤로 신형을 날려 이귀와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의 찰과상만 보더라도 승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온몸에 크고 작은 찰과상을 입은 견무겸을 바라보면서, 이귀가 기세 좋게 외쳤다.
“다시 한 번 간다!”
승리를 확신한 이귀는 땅을 박차면서 순식간에 견무겸과 거리를 좁혔다.
촤르르르륵!
이귀의 연검이 무수하게 변화하면서 연신 견무겸의 몸을 스쳐갔다.
견무겸은 아예 공격을 하지 않고, 오로지 수비에만 전념하는 중이었다. 그의 방어를 뚫기 위해서 이귀의 연검이 더욱 현란하게 춤을 췄다.
푸슉.
이리저리 휘던 이귀의 연검이 견무겸의 팔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끝이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견무겸의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다. 이귀는 곧 연검의 내력을 불어넣어 빳빳하게 만들었다.
슈욱!
그 순간, 견무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견무겸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면서 방어를 고수했던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변화가 가득한 이귀의 연검을 모두 막아내기는 힘들다고 여겼다. 하여 견무겸은 단 한 번, 역전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귀가 검에 내력을 불어 넣는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때만은 이귀의 연검이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는 직선적인 찌르기가 될 것이 자명했다.
“하앗!”
견무겸이 기합과 함께 내공을 끌어올렸다.
아직 검기를 발현하지는 못하지만, 내공을 검에 실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검명이 울릴 정도의 경지.
견무겸이 순식간에 모든 내력을 검에 집중했다. 그러자 검이 낮게 울음소리를 냈다.
우우웅.
쾌검을 사용하는 견무겸의 무공 중에서도 가장 빠른 초식.
‘기류쾌검!’
쐐애액!
이귀와 견무겸의 공격이 동시에 들어갔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마냥, 두 사람은 공격을 마친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푸슉.
견무겸의 어깨에 기다란 상흔이 생기면서 피가 튀는 순간.
털썩.
이귀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견무겸의 쾌검은 이귀에 가슴팍을 정확히 베었다.
“이런, 제길…….”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이귀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어깨를 베이는 바람에 견무겸은 상대를 단번에 죽이지 못했다. 허나 이귀는 치명상을 입었기에 가만히 놔둬도 곧 죽을 정도의 상태였다.
견무겸이 쓰러져 있는 이귀를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니, 저승에 가서도 결코 편치는 않을 것이다.”
“와아아!”
견무겸과 이귀의 주변에 있던, 황룡표국의 표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녹림도를 향해 검을 던지던 진무량은 묘하게 열기가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즉시 견무겸이 이귀를 베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무량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쓸모없는 놈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일을 했네.”
황룡표국의 방어진이 안정되면서 슬슬 도와주려고 하던 중이었다. 헌데 알아서 이귀를 처리했으니,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
진무량의 사고가 앞을 향해 내달렸다.
이귀의 죽음은 녹림도의 사기에 있어 치명적일 것이었다. 또한 유서하의 음공으로 인해, 녹림의 강자들을 처리한 상황.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들으시오! 이 일대의 방어는 비천검문이 책임지겠소!”
진무량은 표물 위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외쳤다.
“이제는 공세로 나아가야 할 때. 후위에 있는 방어진을 풀고 녹림도의 대장을 공격하시오!”
내공을 담아서 외친 것은 아니지만, 진무량의 목소리는 주변 황룡표국의 무사들에게 똑똑히 전해졌다.
진무량의 근처에서 붉은 머리띠를 하고 있는 황룡표국의 무사가 응답했다.
“이곳을 믿고 맡겨도 괜찮겠소?”
진무량에게 말을 건네는 머리에 붉은 띠를 맨 황룡표국의 표사는, 후방의 방어진을 총책임지고 있는 최고위 표사였다.
그를 향해 진무량이 대답했다.
“비천검문의 이름을 걸고 이곳을 책임지겠소.”
“…….”
진무량은 일귀를 가리켰다. 일귀는 이귀의 죽음을 발견하고 격분하여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녹림의 대장이 이곳으로 오고 있소. 저놈은 방어로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오. 오히려 이쪽이 먼저 공격해서 저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만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황룡표국의 최고위 표사는 그리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진무량이 하는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판단하기에도,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얼굴이 벌게져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일귀의 존재였다.
황룡표국의 최고위 표사 또한 숱한 표행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아왔다. 진무량의 생각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그의 말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걸 판단할 수는 있었다.
붉은띠를 맨 황룡표국의 최고위 표사가 외쳤다.
“황룡표국의 용맹한 표사들아, 간악한 녹림도의 대장을 우리 손으로 무찌르자!”
멀어지는 황룡표국의 표사들을 보며 진무량이 나직이 말했다.
“다행히 황룡표국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군.”
황당한 목소리로 유서하가 말했다.
“말을 참 잘하시네요.”
“군중을 이끄는 것도, 사기를 치는 것도 기본적으로 말을 잘해야 하거든.”
진무량이 비천검문의 이름을 건다고 했을 때 유서하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허나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황룡표국의 표사들이 움직일 리 없다. 하여 그것에 대해 특별히 따지지 않았다.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일귀를 향해 표사들이 움직이면 녹림도들은 대부분 정리가 될 테니, 여기는 너랑 견무겸 정도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럼 난 따로 볼일이 있어서 가보겠어.”
“어딜 가시려는 거죠?”
“아직 녹림은 물러가지 않았어. 확실하게 끝을 내줘야지.”
진무량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채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귀를 향했다.
“이용하기에 아주 좋은 것도 있으니까.”
* * *
녹림의 탈명삼귀 중 막내인 삼귀는 표행의 선두 부근을 공격하다가 잠시 주춤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황룡표국이 펼친 방어진을 완전히 부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황룡표국의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혼란한 격전 속 녹림도 중 한 명이 삼귀에게 다가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삼귀님, 지금 뭔가 이상합니다! 근처에 있던 대장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어쨌든 상황이 좀 이상합니다!”
녹림이 위협적인 이유는 그들이 평범한 산적과 달리 무공을 익힌 무공을 익혔다는 것 이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표행을 덮치거나 누군가를 습격할 때 완벽하게 통제된 상태의 집단전에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숱하게 상대를 기습하면서 녹림도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익히게 된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 힘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진무량이 완벽하게 녹림의 대장들만 골라서 유서하의 음공을 통해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삼귀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방금 삼귀에게 보고하던 녹림도가 말했다.
“여기는 일단 제가 맡을 테니, 삼귀 님은 잠시 물러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단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삼귀는 언짢은 듯 눈을 찌푸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지금은 너무 공격에 치중하느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기세를 올려 공격하는 편이 황룡표국 놈들을 더욱 확실하게 처리하는 방법이었다.
삼귀가 말했다.
“알겠다. 이곳은 네게 맡길…….”
삼귀에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표사들이 펼친 방어진 안쪽에서 진무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무식하게 생긴 놈.”
삼귀는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피가 큰 표물들이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삼귀는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진무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무량이 삼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제 놈이 무식하게 생긴 건 알아서, 부르니까 딱 알아보네.”
“뭐라고? 네 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삼귀를 무시한 채, 진무량은 시체처럼 보이는 사내를 잘 보일 수 있도록 앞으로 내밀었다.
진무량의 손에 들린 사내는, 움직일 수 없도록 점혈을 제압당한 이귀였다.
이귀의 모습을 확인한 삼귀는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이럴 수가! 형님!”
이귀의 가슴에 깊게 새겨진 검흔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큰 중상을 입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진무량은 움직일 수 없는 이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삼귀를 향해 말했다.
“설마 형님이 잡혀있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삼귀는 진무량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 이놈!”
“호오. 정말 무식한 놈이군. 그런 태도는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모르나 봐.”
진무량은 이귀의 손가락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비틀어서 부러뜨렸다.
우드드득!
“으아아악!”
처참한 이귀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삼귀가 진무량을 향해 외쳤다.
“이 미친놈!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왜? 네놈들 이런 걸 꽤나 좋아하는 것 같던데.”
진무량은 망설임 없이 이귀의 다섯 손가락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전부 부러뜨렸다.
우득. 우드득. 우득. 우드드득.
“너 이 새끼……! 도대체 누구냐?”
분노로 치를 떨고 있는 삼귀를 향해 진무량의 섬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글쎄……. 너희보다 훨씬 더 나쁜 놈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