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녹림의 습격 (2)
2017.07.09.
특이한 음공을 쓰는 유서하는 녹림도들의 주목을 끌기 충분했다.
녹림도들은 눈앞의 표사들을 밀쳐내면서, 방어진 안쪽에서 음공을 펼치는 유서하를 노렸다.
하지만 바람처럼 날아드는 견무겸으로 인해 그들은 모두 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쉬익!
극쾌의 정수가 담긴 견무겸의 검은 지독히도 빨랐다.
그가 펼치는 초식은 비천검문의 절기 중 하나로, 그 빠르기가 성난 바람과 같다 하여 검선 유월천이 직접 이름을 붙인 검법이었다.
광풍쾌검(狂風快劍)!
스스슥!
대여섯 명씩 달려드는 녹림도들의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견무겸의 검이 휘몰아쳤다.
강호에서 최고로 꼽히는 비천검문. 그곳에서도 뛰어난 호위무사로 꼽히는 견무겸의 무공은 일반 녹림도들이 받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가온 견무겸을 향해 유서하가 말했다.
“난 괜찮으니 서둘러서 표사들을 구해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다보니 견무겸이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서하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서하의 곁에 머물다보면 견무겸의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견무겸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유서하의 무공은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 어떤 문파의 후기지수와 견주어 봐도 전혀 모자라지 않는다.
특히 내공을 다루는 능력만 놓고 따진다면 유서하는 단연 최고다. 가장 익히기 까다롭다고 알려지는 음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
제아무리 뛰어난 녹림도가 위협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유서하는 충분히 그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견무겸은 짧은 대답과 함께 유서하의 곁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벌떼같이 몰려든 녹림도들에게 고전하고 있는 황룡표국의 표사들을 구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거대한 대검을 든 녹림도와 황룡표국의 표사가 격렬한 격전을 벌였다. 수십 합이 넘게 검을 겨루던 그들의 승부는 한순간에 갈렸다.
녹림도가 휘두르는 거대한 대검에 힘을 견디지 못한 황룡표국의 표사가 결국 쥐고 있던 검을 놓친 것이다.
녹림도는 자신의 몸뚱이만 한 대검을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쓰러져 있는 표사를 향해 말했다.
“넌 죽었어.”
하늘 높이 치켜든 녹림도의 대검이 쓰러진 표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챙!
묵직한 녹림도의 대검을 아래서부터 받아낸 것은 견무겸의 검이었다. 그는 급히 달려오느라 불안정한 자세로 간신히 녹림도의 대검을 받아냈다.
“하압!”
힘찬 기합을 내뱉으며 견무겸이 녹림도의 대검을 위로 밀어냈다.
내리치던 대검이 위로 튕겨나가게 되니, 이번에는 녹림도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리고 견무겸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스윽!
순식간에 가로로 그어진 검이 녹림도의 가슴에 치명상을 입혔다.
사실상 녹림이 황룡표국을 몰아붙이고 있는 형세였으나, 조금씩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견무겸과 유서하의 존재였다.
그들의 눈부신 활약은 황룡표국의 표사들을 더욱 분전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그 사실이 녹림도들에게는 굉장히 불쾌하게 다가왔다.
한껏 기세가 오른 황룡표국의 표사들을 바라보던 일귀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육시랄! 이게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일귀의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느껴지자 재빨리 옆에 있던 이귀가 나섰다.
“형님. 이곳은 내게 맡겨 주시오.”
이귀의 판단은 재빨랐다.
본래대로라면 능히 제압할 수 있었을 황룡표국의 기세를 살려준 것은 견무겸과 유서하.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을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이귀의 대답을 들은 일귀는 단숨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풀었다.
“그래, 네가 나선다면 안심이지. 어서 황룡표국 놈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오거라.”
"맡겨만 주시오!"
뒤쪽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이귀가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강은 거기 있느냐!”
묵직한 체형의 사내가 인파를 헤치고 나오며 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태강이라 불린 사내가 앞으로 나서자, 자연스레 그 뒤로 열두 명의 수하들이 따라나섰다.
태강을 포함한 열두 명의 녹림도야말로 청협곡을 장악하고 있는 녹림이 자랑하는 필살의 무기였다. 여타의 녹림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승 무공을 익힌 자들.
이귀가 한껏 내리깐 목소리로 태강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겁 모르고 날뛰는 외눈박이를 맡겠다. 너는 정예 녹림도들을 모두 이끌고 음공을 사용하는 년을 확실하게 처리하라.”
“맡겨만 주십시오!”
태강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열두 명의 녹림도 역시 한껏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비탈길을 빠르게 질주해 나갔다.
높은 지대에서 내려가던 그의 눈에 기세가 꺾인 삼귀가 보였다. 이귀는 목청껏 외치며 삼귀를 격려했다.
“삼귀 이놈아! 평소의 그 기세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게냐? 이 형님이 뒤를 봐줄 테니, 힘을 합쳐 황룡표국 놈들을 쓸어버리자꾸나!”
우렁찬 이귀의 목소리는 한풀 기세가 꺾인 녹림도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충분했다.
수십 명이 한곳에서 어우러져 싸우는 집단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다. 그리고 그 사기라는 것은 결국 마음가짐을 뜻한다.
‘이러다가 지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하던 녹림도들의 마음가짐이, 이귀의 등장으로 인해 ‘조금만 더 싸우면 이길 수 있다!’ 로 바뀐 것이다.
사기가 오름에 따라 녹림도에게 일어난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삼귀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표사 두 명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면서 이귀의 외침에 응답했다.
“이귀 형님이 뒤쪽을 맡아 주신단다! 뒤는 신경 쓰지 말고 눈앞의 적들만 도륙하라!”
“우오!”
녹림도들은 거친 함성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 기세가 꺾였냐는 듯, 녹림도들의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졌다. 이내 황룡표국의 표사들이 펼친 방어진이 조금씩 무너졌다.
이귀의 명을 받은 태강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태강은 정예 녹림도와 함께 표사들이 펼치고 있는 방어진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그리고 방어진 안쪽에 있는 유서하를 향해 파고들었다.
허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유서하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녹림도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곧바로 음파의 방향을 바꿨다.
티잉―! 티잉―!
현을 통해 튕겨진 음파가 태강을 향해 쏘아졌다.
“크윽.”
유서하가 날린 음파에 적중당한 태강의 움직임이 멈췄다. 허나 지금까지의 녹림도와 달리 그는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 뿐, 심대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태강은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잠시 숨을 골랐다.
‘방심했으면 그대로 죽을 뻔했군. 멀리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다.’
태강은 서둘러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향해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ㅡ섣불리 달려들지 말거라! 일단 사방에서 압박하면서 내공을 끌어올려 방어에만 집중하라.
선별된 녹림도들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곧바로 태강의 명령대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선별된 녹림도들에게 태강의 전음이 이어졌다.
ㅡ저년의 내공이 바닥날 때를 노린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한 번에 달려들어 저년의 목을 취한다!
티잉―! 티잉―!
유서하의 내공이 실린 음파는 선별된 녹림도들에게 정확히 적중했으나, 그들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현을 튕기던 유서하의 표정에 옅은 시름이 깃들었다.
‘단순히 현을 튕겨 만드는 음파는 통하지 않아.’
사실 유서하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의 절반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그녀의 음공이 발휘되려면 단순히 현을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곡조를 연주해야 한다.
검을 든 무인들에게 있어 초식에 해당되는 것이, 음공에 있어 곡조가 되는 것이다.
검을 든 무인들조차도 단순히 찌르거나 베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초식을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유서하의 음공 또한 곡조를 통해야만 온전히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수없이 변하는 음율 속에 내공을 실어 만들어진 힘은, 단순히 현을 튕기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허나 유서하는 자신의 음공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황룡표국의 표사들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음공을 펼치면 근처에 있는 표사들 또한 피해를 받을 것이다.
허나 언제까지 위력이 약한 음파만 날리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내공을 사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승부를 봐야 해.’
순간 현을 튕기던 유서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를 본 태강은, 드디어 유서하의 내공이 모두 소진된 것이라 판단했다.
“지금이다! 쳐라!”
순식간에 선별된 녹림도들이 사방에서 유서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후우.”
유서하는 작게 숨을 골랐다. 저렇게 적들이 다가온다면, 다른 표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적들에게만 공격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녀의 섬섬옥수가 빠르게 현을 타기 시작했다.
팅. 디리리링―!
단순히 현을 튕기는 것이 아닌, 아름다운 음률이 유서하의 손끝에서부터 만들어졌다.
점점 빨라지는 운율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그런 곡조였다.
띵 디딩― 디리링―!
ㅡ귀형음혼류 파음지망(破音蜘網)
그 순간 모든 소리가 멈추고, 그 자리를 음률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성, 그리고 단말마들이, 유서하가 연주하는 음률에 묻힌 것이다.
유서하의 목숨을 노리고 사방에서 달려들던 녹림도들은 기이한 상황에 놀라며 순간 경계를 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한테 꽤나 근접한 상황. 단숨에 유서하의 목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녹림도들은 그대로 유서하를 향해 돌파를 강행했다.
허나 결국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태강을 포함한 선별된 녹림도 모두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린 것이다.
“뭐야, 이게!”
몸이 허공에서 멈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선두에서 유서하를 향해 달려들던 태강이 너무 당황해서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뿐이 아니었다. 유서하를 향해 달려들던 다른 이들도 모두 허공에서 움직임이 멈춘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린 양, 녹림도들은 모두 허공에 멈춰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띠링―!
가볍게 현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유서하의 곡조가 끝났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멈췄던 녹림도들은 폭발적인 충격과 함께 신형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으악!”
“쿠어억!”
빠른 곡조를 통해 자신의 주변에 촘촘한 거미줄과 같은 거대한 막을 만든다. 그리고 곡조가 끝나는 순간, 주변을 거미줄처럼 둘러싼 내력을 한꺼번에 폭발시킨다.
그것이 바로 유서하의 절기 파음지망이었다.
원거리에서 날아드는 화살, 또는 내공이 담긴 검기와 같은 공격을 막을 때 사용하는 음막. 그것을 변형시켜, 상대방에게 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도록 유서하가 직접 변화시킨 음공이었다.
허나 유서하는 스스로 펼친 음공이 완벽하지 않음을 느꼈다.
녹림도를 상대로는 통했지만, 음률에 실은 내공을 완벽하게 조절할 수 없었다.
파음지망을 완벽하게 펼칠 수만 있다면, 천하에 모든 것을 튕겨낼 수 있는 절대 방어의 음공이 탄생할 것이라 그녀는 자신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내공이었다.
유서하는 몸속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직 완벽하게 펼칠 수 없는 음공.
하여 처음 정예 녹림과 맞닥뜨렸을 때는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음공을 억지로 펼치다 보니, 기혈이 뒤틀릴 것 같았다.
‘짧게라도 운기를 취해야 해.’
우선은 무리해서 끌어올린 내력을 정리하는 것이 시급했다. 다시 내공을 사용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기혈이 뒤틀릴 것이었다.
표사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했으나, 우선은 무리해서 끌어올린 내력을 다스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야만 다시 표사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서하는 일단 운기를 위해 방어진 안쪽으로 이동했다.
* * *
전속력으로 비탈길을 내려온 이귀는 곧 견무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견무겸은 눈앞에 나타난 이귀가 지금껏 상대했던 평범한 녹림도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했다.
이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도 날뛰더니, 갑자기 조용해졌군. 멍청하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면 단번에 목을 뚫어버리려 했는데.”
스릉.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이귀가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이귀의 검은 흔히 연검이라고 불리는 검이었다. 폭이 어린아이 손바닥만 할 정도로 좁고, 두께 또한 아주 얇다.
당장 쇠도 씹어 먹을 것 같은 덩치의 이귀가 연검을 쥐니, 마치 평범한 사람이 젓가락을 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어울리지 않은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는 보통 녹림도들과는 그 격이 달랐다. 이귀야말로 일귀, 삼귀와 함께 실질적으로 녹림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이귀는 허공에 가볍게 연검을 휘둘렀다.
파르르르.
그러자 그의 연검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마냥 허공에서 이리저리 휘어졌다.
자신의 검이 바람을 가르며 만드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귀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넌 특별히 이 몸께서 직접 상대해주지.”
“흥. 네놈이 뭐라도 되는 것마냥 떠드는구나.”
견무겸은 가소롭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견무겸은 천하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인물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이귀의 자신감은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건방진 놈!”
이귀는 견무겸의 당당한 태도에 격분하여 외쳤다. 그리고 곧바로 검에 내력을 흘려보냈다.
칭!
이리저리 휘던 이귀의 연검이 청아한 소리와 함께 곧게 뻗어졌다.
“아둔한 놈! 네놈이 죽는 이유는 감히 탈명삼귀 중 이귀라 불리는, 이 몸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귀는 연검을 치켜들고 견무겸을 향해 돌진했다.
견무겸은 달려오는 이귀에 움직임을 읽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그의 연검을 튕겨냈다.
칭!
이귀의 검이 바깥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견무겸은 곧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이귀의 어깨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이귀의 검이 튕겨나가는 것을 보고, 견무겸은 반드시 자신의 공격이 먹혀들 것이라 생각했다.
팅!
‘이럴 수가!’
견무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완전히 튕겨 나간 줄 알았던 이귀의 연검은 단순히 휘어진 것뿐이었다. 연검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가볍게 견무겸의 검의 궤도를 틀어버렸다.
어깨를 노렸던 견무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촤르르르륵!
곧바로 이어지는 이귀의 공세.
마치 채찍과 같이 이귀의 연검이 사방으로 휘면서 견무겸을 압박했다.
칭! 칭!
견무겸은 필사적으로 방어에 몰두했으나, 수없이 휘어지면서 날아오는 이귀의 검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푸슉.
이내 이귀의 연검이 견무겸의 팔뚝에 긴 상흔을 새겼다. 순간 고통으로 인해 견무겸의 주의가 흩어졌다.
이귀는 견무겸의 상태를 본능적으로 느끼고서, 낭창거리는 연검에 내력을 불어넣어 단단하게 만들었다.
“흐읍!”
다급함에 견무겸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팅!
필사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한 견무겸은,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이귀의 연검을 간신히 튕겨낼 수 있었다.
찌이익!
허나 완벽하게 연검을 쳐낸 것은 아니었다. 곧게 펴진 이귀의 연검은 견무겸의 의복을 찢으면서 옆구리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견무겸은 태세를 정비할 요량으로, 재빨리 신형을 뒤쪽으로 날렸다.
옆구리에 입은 상처를 비롯해서 견무겸은 순식간에 여기저기 작은 상처들을 입은 상태였다.
이귀는 그런 견무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만족한 듯이 크게 웃었다.
“푸하하! 꼴이 아주 우습구나!”
이귀는 견무겸을 향해 달려오면서 그를 살폈다. 하여 견무겸이 쾌검을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의 상성은 최악에 가깝다.
쾌검은 보통 중검에 강하고 환검에 약하다.
흔들거리면서 수없이 변화하는 자신의 연검은 지독한 환검에 속한다.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작은 상성이라도 크게 다가오는 법.
이귀는 견무겸의 쾌검으로는 자신이 펼치는 몽환검법(夢幻劍法)의 무수한 변화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을 내렸다.
그는 서서히 연검에 실린 내공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빳빳하게 세워졌던 검신이 다시 부드럽게 변했다.
이귀가 기세 좋게 외쳤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승리를 확신한 그는 땅을 박차면서 순식간에 견무겸과 거리를 좁혔다.
촤르르르륵!
이귀의 연검은 견무겸을 찌르면서 수없이 휘어지며 흔들렸다. 그 모습은 마치 수십 개의 검이 분열한 것처럼 보였다.
견무겸은 이번에도 연검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기세가 오른 이귀는 현란한 초식을 사용하면서 그의 몸에 얕은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 * *
황룡표국의 표사들이 펼친 방어진 안쪽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쟁자수들이 부피가 큰 표물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쟁자수들 중 유독 눈이 큰 사내는 표물의 몸을 숨기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진무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내는 뭐하고 있는 거지?’
그때 입이 찢어진 얼굴상의 쟁자수가 재빨리 그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눈이 큰 쟁자수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보고 있어! 이런 때는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되는 거 알잖아?”
“그, 그건 자네 말이 맞네. 헌데…… 저기 있는 사내가 너무 이상해서 말이야.”
입이 찢어진 표사는 눈이 큰 표사가 말하는 사내가 진무량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창을 들고 있음에도 당장 나가서 싸우지 않고 방어진 안쪽에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존재는 분명 이상해보였다.
입이 찢어진 표사가 말했다.
“뭐 겁이라도 집어 먹었나보지. 표행을 처음 나서는 표사들도 가끔 비슷한 모습을 보이잖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자넨 저 사내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나?”
입이 찢어진 표사는 머리를 빼꼼 내밀어 진무량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여 곁에 있는 눈이 큰 표사를 향해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멀리서 보기에도 진무량의 모습은 겁을 먹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녹림도와 황룡표국 표사들이 겨루는 모습을 착 가라앉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진무량의 모습은 너무나 섬뜩하게 느껴졌다. 설사 그것이 무공을 아예 모르는 사람에 눈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럼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니, 뭘 보고 있는 걸까?’
어느새 다시 표물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눈이 큰 표사가 다급하게 말했다.
“어랏! 저 사내, 드디어 움직이는데.”
“뭐야?”
어느새 궁금증이 일었는지 입이 찢어진 표사도 고개를 빼꼼 내밀어 진무량을 쳐다보았다.
“근데, 왠지…… 우리 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 그런 것 같은데.”
당장 녹림도를 향해 달려가지는 않았으나,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진무량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진무량이 말했다.
“자, 이제 슬슬 반격을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