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녹림의 습격 (1)
2017.07.06.
날이 밝자 다시 시작된 황룡표국의 표행은 해가 중천에 걸릴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각자 표물을 지고 걷는 황룡표국 일행은 무아산의 거친 산세를 통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무아산의 산세는 끝없이 험해졌다. 경로를 바꾸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제대로 된 길조차 나지 않은 곳들이 허다했고, 거친 협로와 급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표사들조차도 지친 기색을 내비칠 정도였으니, 쟁자수들을 비롯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간신히 몸만 가누고 있는 상태였다.
표행에 가장 선두에서 말을 타고 있는 은소연의 걱정도 깊어갔다.
무아산의 산세가 험해서 일행들이 지치는 것도 분명 걱정거리였으나, 그 외에도 은소연의 걱정거리는 하나 더 있었다.
“워. 워.”
은소연이 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말의 걸음을 늦췄다.
은소연은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남 표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 표두님, 아직도 정찰대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고 있지 않나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표행이 나아가야 할 길에 미리 정찰대를 보내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던 정찰대이다.
허나 세 시진 전부터 앞서 파견한 정찰대와 연락이 끊겨버렸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남 표두는 은소연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별일 아닐 것이라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산세가 워낙 험하다보니 약간의 착오가 생긴 듯합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
은소연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남 표두가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정찰대의 보고도 기다릴 겸, 표행을 잠시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은소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어요.”
남 표두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뒤를 따르는 황룡표국의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정지!”
그의 외침에 따라 황룡표국의 행렬이 천천히 멈추기 시작했다.
“모두 휴식!”
완전히 표행이 멈추자, 황룡표국의 쟁자수들은 각자 지고 있는 짐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길바닥에 벌렁 자빠졌다.
일어나자마자 산행을 시작해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험한 무아산을 오르는 길이었다. 쟁자수들이 앞다투어 불평을 털어놓았다.
“아이고. 이번 표행은 정말 죽을 맛이구먼!”
“그러게 말일세. 이렇게 힘든 것은 정말 오랜만이야.”
“특히 방금 지나온 좁은 길은 정말 최악이었어. 그렇지 않나?”
“헉! 헉! 난 이미 말할 힘도 없네.”
불평도 잠시, 쟁자수들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각자 휴식을 취했다.
표행이 멈추자 행렬에 맨 끝에 있는 유서하와 견무겸, 진무량도 지친 몸을 쉴 수 있었다. 함께 무아산을 오르던 그들은, 휴식을 취할 때도 자연스럽게 뭉쳐서 앉게 되었다.
둥글게 둘러앉은 채, 견무겸이 옆에 있는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강행군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쳐 보여 걱정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이긴 하지만, 녹림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니 어쩔 수 없어.”
진무량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고작 녹림 따위를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힘든 길을 가야한다니. 약한 놈들은 정말 불편한 게 많군.”
유서하는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인 진무량이 걱정이었다.
“당신은 괜찮은가요?”
“쓸데없는 걱정은 사절이야.”
대답을 마친 진무량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행동에 의문을 느낀 유서하가 물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어. 잠깐 표물들을 좀 둘러보고 싶어서. 앞쪽 행렬에 좀 갔다 올게.”
언제 다시 표행이 시작될지 모르기에, 진무량은 걸음을 서둘러서 표행의 앞쪽 행렬로 향했다. 이내 그가 도착한 장소는 주요한 표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역시 여긴 경비가 훨씬 삼엄하군.’
진무량이 멀리서 값비싼 표물들을 지키고 있는 황룡표국의 표사들을 살폈다.
더 이상 표물을 향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는 비천검문의 일행이라는 이유로 딱히 앞을 막는 사람이 없었으나, 더 이상 표물을 향해 다가가면 분명 제지가 들어올 것이었다.
‘영약을 모아두는 곳의 위치만이라도 파악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고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표사들에게 영약을 모아두는 곳이 어디인지를 넌지시 묻는 것이었으나, 이 정도로 삼엄한 경계를 펼칠 정도의 경계 태세라면 답을 듣지 못할 확률이 더 높다.
무엇보다 자신이 영약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게 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다.
진무량은 일단 좀 더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몸을 돌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할 때, 그의 날카로운 감각이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살기.’
촤아아악!
그 순간, 파공음과 함께 주변을 덮고 있는 풀숲 사이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퍽!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들어 땅에 박힌 것은 짧은 단창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황룡표국의 표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적이다! 모두 경계하라!”
이윽고 연속해서 수많은 단창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경험 많은 황룡표국 표사들의 대처는 신속했다.
순식간에 표사들이 단창이 날아드는 곳을 향해 각자 경공을 펼쳐 다가갔다.
칭! 칭! 칭!
황룡표국 표사들이 휘두른 검에 의해 날아든 단창들이 모조리 튕겨나갔다.
쟁자수들의 반응 또한 재빨랐다.
“모두 숨어!”
“이쪽이다!”
쟁자수들은 각기 맡은 표물을 챙긴 채 재빨리 표사들의 뒤쪽으로 숨었다.
더 이상 단창은 날아들지 않았으나,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어 단창을 날아든 숲속을 살폈다.
스릉!
남 표두가 거칠게 검을 뽑아들면서 거칠게 외쳤다.
“누구냐!”
남 표두의 외침에 반응하듯이 주변 숲속에서 의문의 무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리들의 숫자는 끝도 없이 많았다.
그들의 겉모습은 모두 비슷했는데, 여기저기 헤진 무복 위에 동물 가죽을 덧대고 있는 행색이었다.
남 표두와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한눈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겉모습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그들의 정체는 바로 녹림십팔채였다.
“우리가 누구냐고? 이 산의 주인이다.”
청협곡을 담당하는 녹림의 우두머리이자, 탈명삼귀 중에서 첫째라 불리는 일귀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황룡표국의 일행들이 훤히 보이는 높이 솟은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남 표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네놈들이 어찌 이곳에?”
황룡표국의 표사들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혹시 너희 이놈들을 찾고 있지 않았나?”
이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팔을 들어올렸다.
툭. 투두둑.
이귀가 들어올린 손을 펼치자, 피가 잔뜩 묻은 뭔가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너희의 선발대라고 하던데. 뭐, 이미 모두 내 손에 죽었지만.”
삼귀가 이귀의 말을 받았다.
“처음에는 죽어도 입을 안 열 것 같던 놈들이, 손가락 몇 개 자르니까 겁에 질린 꼴이 아주 가관이었지. 형님, 그렇지 않수?”
이귀는 조금 전의 일이 생각났는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킥킥, 그래 맞다. 그놈, 사실대로 다 불었는데도 내가 손가락을 잘라버리니까 짓는 표정이 아주 기가 막히더군!”
“형님들, 빨리 명령을 내려주쇼.”
삼귀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저 놈들도 몇 놈 잡아서 한번 해봅시다.”
상황을 모두 알게 된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동료들의 죽음에 격분했다.
남 표두는 분노로 인해서 눈알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녹림의 대장으로 보이는 일귀를 향해 검을 겨누면서 말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제아무리 녹림이 강하다고 하지만, 황룡표국의 정예 표사들 또한 숱한 표행을 통해 모두 제각기 많은 경험을 쌓은 자들.
어차피 녹림이 눈앞에 나타난 이상 무사히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는 사실은 황룡표국 표사들 모두 알고 있었다.
남 표두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간악한 녹림도들아! 감히 황룡표국을 건드린 대가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일귀는 기세 좋게 외치는 남 표두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황룡표국 일행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황룡표국 표사들의 숫자는 몰려온 녹림도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보이는 숫자만 놓고 따져보더라도 두 배는 넘는 정도의 차이.
허나 일귀는 그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황룡표국의 사람들을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탐욕스러운 눈으로 표행을 살피던 일귀의 시선이 은소연에게 닿았다.
“저년은 제법 반반하게 생겼군.”
일귀가 끈적한 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저년만 사로잡고 나머지는 모조리 도륙해라!”
일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삼귀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
은소연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가며 삼귀가 기세좋게 외쳤다.
삼귀의 호령과 함께 황룡표국을 둘러싸고 있는 그의 수하들 또한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녹림도들이 표물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둥그렇게 방어진을 펼쳐 맞섰다.
챙! 챙!
삽시간에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 명이 넘는 무인들이 서로 뒤엉키는 혼전이 벌어졌다.
황룡표국 표사들의 실력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녹림과 호각세를 보이며 전투를 이끄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방어진 안쪽에 자리한 진무량이 예리한 시선으로 황룡표국과 녹림도가 겨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하겠군.’
진무량은 쉽게 승부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황룡표국의 압도적인 패배였다.
지금은 호각세처럼 보이지만, 결국 표사들은 녹림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인원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황룡표국이 패배할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전체적인 무공의 수준만 놓고 봐도 표사들 쪽이 떨어진다.
게다가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제대로 쉬지 못하고 짐을 날랐다. 체력이 금방 떨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
지금 호각세로 보이는 것은 녹림도들이 압도적인 상황을 즐기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녹림도들이 제 실력을 보여준다면 황룡표국은 버티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다.
탈명삼귀 중 일귀와 이귀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 녹림의 여유로움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일이 귀찮게 됐네.”
황룡표국과 녹림의 전투를 바라보던 진무량이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녹림은 귀찮은 방해물이었다.
평소라면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의 목적이 황룡표국의 표물인 이상, 얌전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표물에 섞여있는 금정신단을 녹림도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금정신단을 운반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녹림도들은 당장 그것을 먹어 치울지도 모르는 일.
‘내가 손에 넣으려는 물건을 겁도 없이 탐내다니.’
디리리리링―!
그때 들려오는 아름다운 금의 선율.
진무량이 익히 알고 있는 유서하의 연주 소리였다.
‘본격적으로 나선 건가.’
진무량은 저 멀리 유서하의 연주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표물을 살피기 위해 따로 행동하다 보니, 어느새 표행의 후미에 있는 유서하와 거리가 멀어져버렸다.
둥그렇게 펼친 황룡표국의 방어진 안쪽으로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유서하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또한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눈앞에 녹림도들을 쓸어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분명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황룡표국의 표사들 역시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무공을 익힌 자들. 충분히 진무량의 마공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일단은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겠군.’
유서하와 견무겸이 나선다면 분명 표사들에게 큰 힘이 될 터, 녹림도들이 당장 표물에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진무량은 스치면 베일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녹림도와 표사들이 겨루는 모습을 지켜봤다.
* * *
녹림도들의 공격은 표행의 앞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삼귀가 수하들을 이끌고 남 표두가 있는 곳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귀는 자신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표사들을 지휘했던 남 표두가 표행의 우두머리라고 여겼다.
허나 그 선택은 녹림의 입장에서 봤을 때 치명적인 실수라고 볼 수 있었다.
황룡표국의 반격은 표행의 가장 후미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유서하는 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내공을 가득 실은 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티잉―! 티잉―!
유서하가 현을 튕길 때마다 청아한 소리와 함께 무형의 음파가 허공을 수놓았다.
“쿨럭!”
“으악!”
유서하가 날린 무형의 음파의 적중당한 녹림도들은 피를 토하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어느새 검을 뽑아든 견무겸 역시 서너 명의 녹림도들과 상대하고 있었다.
녹림도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유서하는 가장 먼저 진무량의 존재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스스로를 질책했다.
‘진무량에게만 모든 것을 의존할 수는 없어.’
유서하는 당장 자리에 없는 진무량을 찾기보다는, 일단 눈앞의 녹림도들을 상대하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면 후미에 방어진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진무량은 무림공적으로 알려진 마교의 인물. 그의 힘을 감춰야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항상 진무량에게 의존하다 보면 사소한 분쟁이 생겨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찾게 될 것이다.
허나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모든 분쟁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진무량의 힘을 빌리는 건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일 때뿐이다.
티딩―! 티딩―!
현을 튕기는 유서하의 손가락이 더욱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