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26화 (26/143)

26화. 내기

2017.07.02.

패현에서 출발한 황룡표국의 표행은 순조롭게 무아산을 지나고 있었다.

갖가지 진귀한 표물들이 실린 수레를 끄는 인파 속에서 진무량과 유서하, 견무겸이 한자리에 모였다.

유서하가 먼저 견무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앞쪽 행렬의 방비 상태는 어때?”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경험이 많은 표사들답게, 표물을 지키는 데 있어 작은 허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아무리 신투라도 하더라도 쉽게 표물에 손을 댈 수 없을 것입니다.”

“음……. 그럼 뒤쪽 행렬을 더 중점적으로 살펴야겠네.”

“뒤쪽 행렬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문제라고 할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분명 방비가 허술한 부분이 보였어.”

유서하와 견무겸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무량이 말했다.

“앞쪽에 행수와 표두가 있는 만큼, 값비싼 물건들은 앞쪽에다 배치시켜 놓았나 보군. 그래서 어느 정도 방비의 차이가 있는 것이겠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서하는 곧 답을 내놓았다.

“저희는 뒤쪽에 합류하는 것이 좋겠어요.”

진무량이 말했다.

“신투라면 아무래도 비싼 물건이 있는 곳을 노릴 것 같은데.”

“그쪽은 황룡표국의 방비가 철저한 만큼, 저희가 돕는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애초에 신투가 쉽게 접근하지도 못할 테고요.”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경비가 강한 곳을 피해 오히려 뒤쪽을 노릴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뒤쪽 행렬에 신투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겠죠.”

진무량이 짧게 답했다.

“그럴 수 있겠군.”

“그럼 다시 한번 표행의 방비 상태를 확인하면서 천천히 뒤쪽 행렬로 이동하죠.”

다그닥. 다그닥.

그때 앞쪽 행렬에서부터 말이 달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머리에 붉은 띠를 맨 황룡표국의 고위 표사가 말에 올라탄 채 큰 소리로 외쳤다.

“정지! 모두 멈춰라!”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지 않고 머리에 붉을 띠를 맨 고위 표사는 그대로 뒤쪽 행렬로 움직였다.

유서하는 갑작스럽게 표행을 멈추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때마침 다른 황룡표국의 표사가 유서하를 찾아왔다.

“유 소저 되십니까?”

정중하게 질문을 건네는 황룡표국의 표사를 향해 유서하가 대답했다.

“네. 무슨 일이신가요?”

“이제부터 산세가 험해져 더 이상 마차로 표물을 옮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말을 달릴 수는 있으니, 행수님께서는 유 소저께서 앞쪽 일행과 합류하시기를 권하셨습니다. 물론 유 소저께서 타실 말도 준비해놓은 상태입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희는 지금처럼 따로 움직일게요.”

황룡표국의 표사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이제부터 길이 많이 험해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은 낭자에게는 호의만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주세요.”

* * *

무아산의 중턱쯤 오르게 되자, 산세는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하여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부피가 큰 수레를 버리고 표물들을 직접 어깨에 지고 움직여야 했다.

은소연과 몇몇의 고위 표사들은 말을 탔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짐을 지고 걸었다.

수많은 황룡표국의 사람들이 거칠고 좁은 길을 이동하다 보니, 행렬은 일렬로 길게 이어졌다.

유서하 일행은 그 행렬 중에서 가장 뒤쪽으로 이동했다.

세 사람은 모두 짐을 진 상태였다. 허나 각자 지고 있는 짐의 크기는 확연하게 달랐다.

진무량은 작은 부피에 무게도 굉장히 적게 나가는 표물을 한쪽 어깨에 가볍게 걸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유서하는 웬만한 장정도 들기 힘든 무거운 표물을 양쪽 어깨에 지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말을 내준다는 황룡표국의 제안을 거절한 것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왜 굳이 짐을 들겠다고 나선 거야? 고생하는 걸 좋아는 건가.”

자신의 몸집만 한 상자를 지고 있는 유서하를 향해 진무량이 말했다.

“고생하는 걸 좋아한다기보다는,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죠.”

진무량은 의문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남을 돕겠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거야?”

“무슨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유서하가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두 힘든 일을 하고 있을 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전부예요.”

그녀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있을 때 자신만 편안히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그리 크지 않은 도움이라도, 이렇게 일을 함께 나누면서 움직이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몸을 단련할 수 있는 기회도 되고, 무엇보다 고생을 나눔으로써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는 생각이 들 때면 보람차다는 생각도 든다.

유서하의 행동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협(俠)이란 꼭 거창한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힘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돕는 것.

유서하에게 있어 협이란 그런 것이었다.

유서하의 옆에서 짐을 지고 걷던 견무겸이 진무량을 향해 이죽거렸다.

“사람들도 돕고 네놈이 힘든 모습까지 볼 수 있다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군.”

내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운기조식을 통해서 어느 정도 피로를 덜 수 있다. 허나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진무량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무량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견무겸을 향해 가볍게 대꾸했다.

“구멍 난 신을 신고 말은 참 잘하네.”

“음?”

견무겸은 자신의 신에 구멍이 났는지 확인하려고 한쪽 발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진무량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거짓말이야.”

“너 이놈이……!”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유서하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경치가 참 좋네요.”

유서하는 산 중턱에서 고개를 돌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초록빛 산은 서서히 낙엽이 지면서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게다가 저 멀리 보이는 폭포와 단풍이 어우러지는 가을 산의 정취는 가히 장관이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다 보니 피로도 전부 가시는 것 같네요.”

진무량은 여전히 유서하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치가 좋은 거랑 피로랑 무슨 상관이야.”

서로의 생각은 달랐지만 표행길은 계속 이어졌고,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말을 탄 몇몇의 표사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다시 한번 표행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산에서의 밤은 순식간에 찾아오기 때문에, 노숙을 준비하기 위해 은소연이 내린 명령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움직인다!”

저 멀리에서 남 표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명령에 따라 황룡표국의 사람들은, 익숙하게 노숙을 준비해나갔다.

우선 황룡표국의 쟁자수들은 표물을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표사들은 표물을 지키기 위해서 번을 세웠고, 각자 맡은 일을 끝낸 사람들은 삼삼오오 누울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모닥불을 피우고 잠을 잘 준비를 했다.

진무량은 표물을 모아두는 곳에 자신이 지고 있던 표물을 대충 던졌다. 그리고 나무그늘이 길게 늘어진 곳을 찾아서 몸을 쉬었다.

유서하와 견무겸 역시 짐을 갖다 놓고, 진무량이 쉬고 있는 장소를 찾아왔다.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반갑지 않은 소식을 하나 전해야겠어요.”

“그게 뭔데?”

“오늘 야간에 번을 서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저만 지원하려고 했는데, 무겸도 같이 나서면서 당신까지 같이 지원하는 걸로 표사들이 생각했나 봐요.”

진무량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알았어.”

약간 당황한 목소리가 유서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괜찮으신 건가요?”

“별로, 상관없어.”

언제나 한밤중에 일어나서 창술을 연마하는 진무량이다. 그 전에 조금 빨리 일어나서 번을 선다는 사실이 그렇게 대수로울 것은 아니었다.

진무량은 딱히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유서하는 사전에 동의를 구하지 못한 채로 진무량이 번을 서게 된 상황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유서하가 설명을 덧붙였다.

“번을 서는 시간은 당신이 평소 수련하러 가는 시간에 맞춰서 잡아놨어요. 저와 함께 서면 되니까, 그 시간이 되면 제가 깨울게요.”

찌륵. 찌륵.

산중에 깊은 밤이 찾아왔다. 컴컴한 어둠속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곤충들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서하는 번을 설 시간이 되자, 스스로 잠에서 깨었다. 그녀는 노숙을 하면서 뭉친 몸을 적당히 풀어주고, 번을 같이 설 진무량을 깨우기 위해 다가갔다.

유서하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눈을 감고 있는 진무량을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두 걸음 정도로 가까워지자 진무량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깨울 필요 없어.”

진무량이 나지막이 말하면서 바로 손이 닿는 곳에 둔 창을 챙겼다. 먼저 준비를 끝낸 유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번을 서는 곳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표물을 모아둔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금방 도착했고, 곧 앞서서 번을 서고 있는 두 명의 황룡표국의 표사들이 보였다.

“조금 일찍 오신 것 같은데, 지금 교대를 해도 괜찮겠소?”

황룡표국의 표사가 진무량과 유서하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유서하가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그럼 편히 쉬세요.”

“고맙소. 그럼 수고하시오.”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유서하게에 인사를 건네고, 자신들이 쉬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금세 어둠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두운 밤, 모닥불 하나를 마주보고 유서하와 진무량이 마주 않았다.

타닥. 타닥.

유독 조용한 장내에 장작 타는 소리가 울렸다.

진무량은 묵묵히 한쪽 구석에 모아둔 장작을 던져 넣어서 불길을 세게 만들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것을 유서하가 먼저 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신가요?”

“너에 대한 생각.”

전혀 예상치 못한 진무량의 대답에 유서하는 당황했다.

타닥. 타닥.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울렸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약간 당황한 듯한 유서하의 물음에 진무량이 대답했다.

“보통 이럴 때,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잖아. 그게 이상한 건가?”

유서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진무량의 말을 듣고 보니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답이었다.

“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

유서하는 애써 난처한 기색을 감췄다.

예상치 못한 진무량의 질문은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또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유서하는 그저 모닥불에 비친 진무량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무량이 유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하지. 특히 정파 쪽에서는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고. 근데 넌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아서.”

“당신의 생각이 맞아요. 전 당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이고 싶지도 않아요.”

조용히 고민하던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저는 과거의 당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죠.”

“네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은 뭔데?”

“저와 함께 행동하는 동료요.”

진무량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난 너와 동료가 될 생각이 전혀 없어. 그 정도는 너도 알고 있잖아.”

“네, 저도 알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죠. 당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까요.”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저는 여전히 당신을 이용해서 저희의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요.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저는 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잠시 동안 확실하게 생각을 정리한 유서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동료라는 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그저 같은 일을 함께하는 사람. 그 정도면 돼요.”

진무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 생각이 뭔지는 알겠어. 근데 난 너와는 달리 널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야.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나로서는, 네가 필요할 때가 많을 것 같거든.”

“상관없어요. 전 제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그러다보면 또 모르죠. 강호의 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언젠가 당신과 제가 진심으로 힘을 합치는 날이 올 수도 있잖아요.”

진무량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람은 결코 본질이 변하지 않아. 그러니 내가 검선의 여식인 너와 진심으로 힘을 합치게 될 날은 없어.”

“당신과 저는 뭐든지 반대로 생각하네요.”

유서하는 힘이 실리지는 않았으나, 강렬한 눈빛으로 진무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라도 변할 수 있어요. 자기 스스로 그것을 강하게 믿고, 또 함께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타닥.

고요한 어둠 속에서 모닥불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진무량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서책에서나 나올 법한 꿈같은 이야기로군. 그런 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일을 바라는 자들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야.”

“그렇다면 저와 내기하실래요?”

뜬금없는 유서하의 질문에 진무량이 대답했다.

“이기고 지는 것을 명확히 판단할 근거가 없잖아. 승패가 확실하지 않은 내기는 안 해.”

“도망치는 건가요?”

“뭐?”

인상을 찌푸린 진무량을 향해 유서하가 말했다.

“서로 자신의 뜻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할 때, 내기만큼 좋은 것이 없잖아요. 승패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갈릴 거예요.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렸을 때 스스로 알 수 있겠죠. 누가 이겼는지.”

유서하는 일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젠가 내기에 졌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술 한 잔 사기로 하죠.”

진무량이 짧게 웃었다.

"괜찮군. 내가 걸어오는 내기를 피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난 사람이 절대 변할 수 없다는 쪽에 걸지.”

유서하는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전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쪽에 걸겠어요.”

“참고로 말하자면, 난 한 번도 내기에서 진 적이 없어.”

“그렇다면, 한 번 질 때가 됐군요.”

진무량과 유서하는 동시에 자신감이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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