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금정신단
2017.06.25.
두두두두두!
깃발이 세워진 곳에서부터 수백 명의 멸천대가 일제히 말을 타고 짓쳐들어왔다.
갑자기 변한 상황에, 진무량과 맞서고 있던 환영문의 수장 홍기원은 사색이 되었다.
진무량을 완전히 몰아붙여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생각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진무량은 멸천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어야 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진무량을, 환영문의 전 인원을 투입해서 죽일 생각이었다.
허나 실상은 고립된 줄 알았던 진무량이 시간을 벌고 있었고, 그동안 멸천대는 환영문의 거점을 부수고 철저하게 자신들을 포위한 것이다.
즉, 애초에 자신과 환영문은 진무량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단 뜻이다.
“제기랄!”
홍기원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무 쉽게 진무량을 몰아붙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허나 그렇다 해도 설마 천 명에 달하는 환영문을 홀로 상대하면서 미끼 역할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멸천대의 대주가 직접 그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고는…….
‘잠깐.’
순간 홍기원의 눈빛에 작은 이채가 감돌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환영문도는 똑똑히 들어라!”
내공을 가득 담아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홍기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멸천대가 도착하기 전에 진무량을 죽여라! 그렇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어떤 분쟁이든 간에 대장을 죽이면 상대는 반드시 꺾이는 법!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당황했던 환영문도와 새외의 무인들은 홍기원의 목소리에 즉각 반응했다. 그의 말대로 진무량을 죽이기만 한다면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었다.
일대를 가득 메운 적들의 기세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순식간에 뻗어나온 그들의 거친 살기가 모두 진무량을 향했다.
결사항전을 각오한 자들만이 내뿜을 수 있는 거칠고 투박한 살기.
“지금이다! 죽여라!”
처절한 홍기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휙! 휙!
서로 앞다투어 진무량을 향해 달려가는 무인들의 옷자락이 바람을 스쳤다.
진무량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들에게 염옥창의 창끝을 겨눴다.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어.”
짧은 조소와 함께 염옥창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 순간, 점점 초점이 흐려지면서 앞이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두통이 찾아왔는데, 이것 역시 아주 익숙한 감각이었다.
꿈에서 깰 때마다 언제나 찾아왔던 그 느낌.
이내 주변에 모든 것들이 일그러지면서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
잠에서 깬 진무량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눈앞의 풍경은 꿈속에서의 황량한 벌판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방의 모습이었다. 주변에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금이 대충 새벽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무량은 몸을 일으켰다.
과거의 꿈을 꾸고 나니, 잊고 있었던 옛날 기억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좋았던 기억들은 별로 없다.
아무리 과거로 돌아가 봤자 좋은 기억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단지 오랜만에 꾼 과거의 꿈을 통해서 최근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느낄 수는 있었다.
살아있다는 확실한 감각.
전장에서는 건투나 선전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다. 필요한 건 오직 승리뿐.
적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묘한 쾌감.
서로의 목숨을 걸고 피와 살이 튀는 곳에서 승리한 그 순간,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추연희나 멸천대와 함께 있던 시간을 뺀다면,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느꼈던 것은 목숨을 건 전장에서밖에 없었다. 처절한 사투 끝에 승리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그 묘한 쾌감이 전부였다.
살고 싶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앞을 향해 달렸고, 편안한 죽음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승리했기 때문에 살아남았을 뿐.
그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진무량은 창문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잠깐 쉬었더니 피곤했던 기운도 거의 사라졌고, 다시 잠을 청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무량은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서 방에 있는 창문을 열었다.
달칵.
창문이 열리자 서늘한 밤공기가 불어왔다.
진무량은 무심한 눈으로 바깥의 풍경이 아닌, 허공의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 *
짹짹.
아침이 밝아오면서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진무량은 간단하게 조식을 먹기 위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한쪽 구석에 모여 있는 황룡표국의 표사들을 제외하면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진무량이 앉자, 얼른 점소이가 달려와서 주문을 받았다.
황룡표국이 객잔을 통째로 빌린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지 마음대로 시켜도 된다는 남 표두의 말이 있었다.
“소면 한 그릇.”
“알겠습니다!”
진무량의 주문을 받고, 점소이가 총총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진무량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 황룡표국 표사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들 오늘 표물 관리는 끝났나?”
모여 앉은 세 명의 황룡표국 표사 중 한 명이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표사 생활이 십 년이 넘었는데, 그 정도는 기본 아니겠는가.”
먼저 질문했던 표사가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처음 표사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자네가 나를 선배로 착각해서 굽실거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년이나 되었나.”
“굽실거리다니! 자네야말로 실수를 밥 먹듯이 해서 내가 뒤치다꺼리를 얼마나 해줬는데.”
“뭐야? 그렇게 따지면…….”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지금까지 나서고 있지 않던 표사가 두 사람을 말렸다.
“그만들 좀 하게. 자네들처럼 만날 때마다 싸우는 것도 쉽지 않을 걸세.”
“흥.”
발끈했던 표사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멈췄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싸움을 말렸던 표사가 화제를 던졌다.
“표물을 확인할 때 무슨 일 없었나? 정 표사는 명검을 관리하다가 검이 말을 걸었다고 하던데.”
이번 황룡표국이 운반하는 표물들이 워낙 진귀한 것들이 많다 보니, 표물을 관리하는 표사들 사이에서 과장이 섞인 요상한 소문이 유행하고 있었다.
표물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에 말을 꺼냈던 표사가 나섰다. 언제 싸웠냐는 듯 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명검? 그딴 것은 아무것도 아니네. 난 영약을 관리하는데, 영약이 있는 함 근처에만 가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진다니까.”
“말도 안 돼. 함 속에 있는 영약에서 무슨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러는가.”
“이 사람이! 자네가 직접 보지 못해서 그런 거야. 특히 금정신단(金頂神丹)은 근처에만 가도 내공이 정순해지는 기분이 든다니까.”
금정신단은 내공을 증진시키고 내상을 치료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영약 중 하나였다. 전설로 전해지는 신의가 백 년에 한 번 열리는 재료로 만들었다는, 그야말로 최고의 영약이라 칭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함 속에 있는 영약 근처에만 가도 내공이 정순해진다고? 하여간 과장은 심하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자네는 금정신단 근처만 가도 침을 아주 질질 흘릴걸!”
“뭐라고! 내가 자네 같은 줄 아나?”
표사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이번에는 아까 싸움을 말렸던 표사도 지쳤는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별 생각 없이 황룡표국 표사들의 대화를 듣던 진무량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쓸모없는 대화 속에서 금정신단이 언급된 순간부터였다.
‘영약이라…….’
진무량은 무의식중에 엄지로 입술을 만지면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유월천에게 당한 내상 때문이었다.
분명 일반적으로 내상을 입었을 때 보이는 증상은 아니다. 허나 어쨌든 내상의 범주 안에 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
그리고 금정신단은 내상의 특효를 보이는 전설의 영약.
만에 하나라도 금정신단이 자신의 내상을 치유해줄 수만 있다면…….
꽈악.
자연스럽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내상을 치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금정신단 정도라면 뭔가 몸에 반응이 올 수도 있었다.
진무량의 생각이 깊어졌다.
지금까지는 황룡표국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허나 황룡표국이 금정신단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혹시나 자신의 내상을 치료할 계기가 될 수도 있는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내상을 치유하는 건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금정신단의 대한 생각을 이어가던 중, 문득 유서하가 쫓고 있는 신투가 떠올랐다.
'신투라는 놈도 표물을 노린다고 했지…….’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신투라는 도둑놈이건, 황룡표국이건.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다.
황룡표국과 신투. 이 두 가지를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씨익.
‘그 영약은 내가 가져야겠군.’
진무량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견무겸의 방으로 향했다.
덜컹.
진무량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견무겸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견무겸은 방 한쪽 구석에 앉아서 자신의 검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언제나 진무량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진무량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왔음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견무겸이 말했다.
“무슨 일이지?”
“신투의 대한 정보가 적힌 서책, 그거 잠깐 나한테 넘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견무겸은 진무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 견무겸의 방문 쪽에서 유서하도 모습을 드러냈다.
유서하 역시 자신의 방 안에서 진무량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견무겸의 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서하는 평소답지 않은 진무량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겼다. 지금까지 진무량이 견무겸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견무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진무량을 살피고 있는 도중, 유서하가 입을 열었다.
“신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아닌가요.”
“난 원래 변덕이 심해. 지금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그 정도는 알잖아.”
유서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진무량을 살펴봤다.
진무량이 변덕이 심했던 것은 맞지만, 이유 없이 변덕을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신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뭔가 노리는 것이 있군요.”
유서하는 진무량의 반응을 보고, 그가 원하는 것을 슬쩍 떠볼 생각이었다. 허나 진무량은 그녀가 생각했던 반응과 정반대였다.
“당연하지.”
비웃음을 띤 채로 진무량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니 두통이 찾아와, 유서하는 머리에 손을 갖다댔다.
이번에도 역시 진무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노리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면, 추궁하거나 가볍게 떠보면서 속내를 알아내려 시도했을 것이다.
헌데 저렇게 당당하게 나와 버리니, 직접적으로 뭘 노리고 있는지 묻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연히 진무량은 순순히 속내를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감춘다.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유서하는 자연스레 진무량이 신투의 정보를 원하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신투를 잡는 것을 방해할 의중이라면 굳이 정보를 달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의심을 사지 않고 가만히 계획을 듣다가, 그것을 망치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진무량이 신투와 손을 잡았을 확률 또한 없다고 봐도 된다.
‘신투와 알고 있는 사이는 아닐 텐데.’
신투가 마교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허나 만약, 과거 진무량이 멸천대주였을 때 신투가 물건을 훔치려 했다면?
“…….”
신투가 지금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마교에서도 최고의 위치에 있던 진무량이 신투 같은 도둑과 연관이 있을 확률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남은 건 신투를 잡으려고 하는 것뿐인데…….’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무량이 신투를 잡으려고 생각했다면 말릴 이유는 없었다.
같이 행동하는 사람조차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진무량의 예측불허의 행동은, 신투에게도 분명 위협적일 것이다.
유서하는 마음을 정하고 진무량에게 말했다.
“좋아요. 신투에 대한 정보를 드리죠.”
유서하의 허락이 떨어지자, 견무겸은 잘 보관해두었던 얇은 서책을 진무량에게 넘겨주었다.
진무량은 그 자리에서 책장을 넘겼다.
촤르르륵.
그는 서책을 펴고 첫 장을 펼치더니 순식간에 책장을 끝까지 넘기기 시작했다.
유서하는 진무량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무량은 마치 글을 읽지도 않고 서책을 넘기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책장을 끝까지 넘긴 진무량은, 그 서책을 다시 견무겸에게 던졌다.
탁.
견무겸은 진무량에게서부터 날아든 서책을 받으면서 말했다.
“뭐하는 거지?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적힌 내용은 전부 외웠으니까 그 서책은 이제 필요 없어.”
견무겸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세가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십 일을 보고도 아직 서책의 내용을 전부 외우지 못했다. 그런 것을 고작 잠깐 훑어보는 것만으로 다 외웠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유서하가 진무량에게 물었다.
“정말로 서책에 적힌 것을 다 외우신 건가요?”
“어.”
“신투가 처음 물건을 훔친 곳은 어디죠?”
“만상보(萬商堡).”
유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에 신투가 물건을 훔친 곳으로 알려진 곳은 어디죠?”
“황하물상(黃河物商).”
유서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정확한 답이었기 때문이다.
“볼일 끝났으니까 난 간다.”
진무량은 놀라고 있는 견무겸과 유서하를 두고 무심하게 돌아섰다.
견무겸은 자기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