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과거
2017.06.22.
웅성웅성―.
유서하가 죽립을 벗고 얼굴을 드러내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유서하의 모습을 보면서 주위 사람들과 한마디씩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죽립으로 가려진 유서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겉으로 드러나는 늘씬한 몸매를 보면서 제법 아름다운 여인일 것이라 짐작은 했다.
헌데 죽립을 벗고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완벽에 가까운 비율의 이목구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미인들을 봐온 황룡표국의 일행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황룡표국의 일행들 중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술렁이는 것이, 유서하의 아름다움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심지어 은소연마저도 유서하의 외모에 순간 놀랐으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의 분들이 오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 생긴 건가요?”
“남궁세가에서 신투를 잡는 일을 비천검문이 돕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은소연은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비천검문은 결코 남궁세가에 비해서 그 위세가 부족한 곳이 아니었다. 하여 은소연은 여전히 정중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속마음은 적잖이 실망한 상태였다.
남궁세가에서 도움을 준다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유서하 일행의 겉모습을 보니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했던 만큼 실망감만 더 크게 다가왔다.
허나 은소연은 그런 내색을 조금도 겉으로 보이지 않았다.
은소연은 유서하가 표행의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 짐작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비천검문의 소속이었다.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황룡표국의 표행을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마친 후, 은소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쉴 수 있는 방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은소연은 말을 마치면서 남 표두를 바라보았다.
남표두는 곧바로 유서하에게 다가갔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 * *
은소연은 유서하 일행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인원수에 맞춰 방을 내주었다. 진무량과 유서하, 견무겸은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향했다.
유서하는 이곳으로 오는 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기 위해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바로 옆에 있는 진무량의 방을 향해 움직였다.
유서하의 기척을 항상 주시하고 있던 견무겸은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이동했다.
유서하는 진무량의 방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아니.”
방문 너머에서 진무량의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견무겸은 진무량의 대답을 신경 쓰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네 허락은 필요 없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진무량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커다란 침상에 편안히 누워있었다. 그는 누운 채로 고개만 돌려서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인데?”
“별일 없어 보이니 들어가서 말하도록 하죠.”
유서하는 진무량의 방 중앙에 놓여 있는 다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앞으로의 계획과 신투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진무량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곧바로 유서하에게 등을 돌려서 누웠다.
“난 관심 없으니까 다른 곳에서 의논하도록 해.”
유서하는 어느 정도 진무량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진무량은 굳이 신투를 잡기 위해 애를 쓸 이유가 없었다.
진무량이 전면으로 나서는 순간은 아마 자신이 위험에 빠졌을 때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상대는 엄청난 고수도 아니었다.
아무리 신투가 유명하다 하더라도 그는 결국 도둑일 뿐. 진무량의 힘을 빌릴 정도로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물론 진무량이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역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
유서하가 말했다.
“같이 움직이는 입장이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죠.”
유서하는 우선 표행을 책임지고 있는 은소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도 은소연 낭자는 우리를 그다지 반기고 있는 것 같지 않네요.”
조금 전 유서하와 대화하던 은소연은 조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허나 처음 그녀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중, 순간 지었던 표정을 유서하는 놓치지 않았다. 분명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은소연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찾아올 줄 알았을 텐데, 자신들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겉모습만 따지고 본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진무량이 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잠깐이라도 본다면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테지만.
견무겸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과한 친절은 부담스러울 뿐이고, 주목 받지 않는 것이 무슨 일이든 하기 편할 것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유서하는 은소연에 대한 생각을 접고, 애초의 목적대로 신투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서하는 남궁세가에서 받은 신투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책을 품속에서 꺼낸 뒤, 견무겸을 향해 내밀었다.
그동안 유서하와 견무겸은 신투를 잡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 서책을 돌려보고 있었다.
신투의 대한 정보가 적힌 서책을 건네면서 유서하가 말했다.
“이젠 돌려주지 않아도 돼. 서책 안의 내용은 모두 외웠어.”
“알겠습니다.”
견무겸은 서책을 받은 뒤에 유서하를 향해 물었다.
“신투가 나타난다면 혹시 그를 잡을 묘안이 따로 있으십니까?”
“일단 이곳의 상황을 좀 더 둘러보고 정해야겠지.”
유서하의 표정이 신중하게 변했다.
신투를 잡기 위해 남궁세가에서 준 정보를 계속해서 숙지했다.
적을 알아야 그에 맞는 올바른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법이다.
일반적인 도둑이라면 견무겸과 자신 둘만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허나 신투는 그저 그런 도둑이 아니었다.
신투의 특출한 점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경공술이었다.
이는 신투의 큰 강점이었다. 남궁세가의 정보에 의하면, 그가 물건을 훔친 후 도망치는 것을 뒤쫓은 사례는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경공술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에게 피해를 본 곳 중에는 꽤나 이름 있는 문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신투의 그림자조차 잡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경공이 얼마나 출중한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니 애초에 그가 표물에 접근할 수 없도록 조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허나 경공술보다 더 경계해야 할 신투의 최고 강점은 따로 있었다.
역용술.
그는 축골법으로 뼈를 조종해서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심지어 여인이나 어린 아이로도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변한 후의 연기력이 너무나 감쪽같아서 아무도 신투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니,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었다.
완벽한 도둑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신투였지만, 그에 대한 기록 중에 한 가지 약점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신투의 무공 수준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건을 훔치면서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사소한 충돌까지도 회피하는 것을 보면, 신투의 무공은 뛰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은 황룡표국의 경계를 파악하면서 신투가 파고들 틈이 있는지를 찾아야 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그곳을 중점적으로 돕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한참 신투에 대해 생각하던 유서하의 상념을 진무량의 목소리가 깨뜨렸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좀 나가라.”
* * *
커다란 달이 구름에 가려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진무량은 꽤나 지친 상태였다. 겉으로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남궁세가에서 패현까지 오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몸을 단련해 왔다.
새벽마다 창술을 연마하고, 끝없이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내공으로 피로를 풀 수도 없으니 몸은 더욱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진무량은 주변에 기척을 살핀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고단한 몸을 잠시 쉬기 위해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포근한 어둠이 찾아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와아아아아아!”
모처럼 편하게 안식을 취하고 있는 진무량의 귀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내지르는 함성소리가 들렸다.
진무량은 천천히 감긴 눈을 떴다.
꽤나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혈마옥을 빠져나온 뒤, 정신이 들기 전에도 느꼈던 아주 익숙한 감각.
이곳은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과거를 보여주는 꿈속의 공간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자신의 창이었다.
멸천대의 대주를 상징하는 염옥창을 굳게 쥐고 있는 자신의 오른손이 보였다.
“히히이이힝!”
그리고 힘차게 투레질을 하는 말(馬)의 울음소리.
그것은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해온 말, 흑풍이 기분 좋을 때 내지르는 울음소리였다.
스윽.
그리고 자연스럽게 왼손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피부가 느껴져야 할 곳에는 단단한 가면의 감촉이 전해졌다.
흉악한 나찰을 본뜬 검은 철가면이었다.
역시나 꿈속에서의 자신의 몸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제법 기분이 괜찮았다.
염옥창과 흑풍을 눈으로 보니,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를 만난 것과 같은 감정이 일었기 때문이다.
흑풍의 고삐를 쥐고, 다른 손에는 염옥창을 굳게 쥔 진무량은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한 눈에 다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보였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자들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보이는 언덕까지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검을 든 자들의 모습.
시선을 좌우 어디로 돌려도 모두 자신을 죽이려는 적들의 모습이었다.
각자의 병장기를 움켜쥐고,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이 붉게 변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묘한 흥분이 느껴지면서 몸에 전율이 흘렀다.
보이는 곳에는 전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적들이었고, 그 숫자는 족히 천 명은 되어보였다.
온통 적으로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타고 있는 말 한 기와 창 한 자루로 천 명을 당해내기 전에 기분이 이런 것일까.
묘한 흥분과 설렘으로 몸이 뜨거워지고 있으나, 반대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가는 모순된 감정.
씨익.
가면 속에서 진무량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과거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과 같은 심정인 듯, 비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저 멀리 떨어진 높은 언덕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인파를 제치고 날아드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귀혈악인 진무량! 얌전히 포기하고 그 목을 내놓아라!”
진무량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언제인지 기억해냈다.
멸천대의 대주직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상대는 환영문을 필두로 해서 뭉친 세외의 세력들이었다.
슈웅.
진무량은 거대한 목소리에 대답을 하는 대신, 가볍게 창을 자신의 몸 주위로 돌리기 시작했다.
훅! 훅!
가볍게 허공을 움직이던 염옥창이 바람을 찢어발기면서 거친 소리를 울려댔다.
그러면서 진무량은 서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가 익힌 마공의 근본을 이루는 묵천심법(墨天心法)이 검은 기운을 뿜어댔다. 염옥창은 그의 내력에 동조하듯이 검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불꽃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것처럼.
준비를 마친 진무량이 흑풍의 아랫배를 가볍게 찼다.
“히이이힝!”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흑풍이 적으로 이루어진 대해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다.
흑풍은 바람처럼 달려가 순식간에 적과 거리를 좁혔다.
콰드득!
염옥창이 번뜩이면서, 진무량은 가장 선두에 있는 적들을 베어내며 파고들었다.
염옥창이 폭풍 같은 기세로 적을 베어내면, 그곳을 흑풍이 바람처럼 내달렸다.
허나 적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수없이 많은 칼날이 진무량을 향해 쏟아졌다. 마치 비처럼 검이 쏟아졌고, 그 하나하나에는 모두 날카로운 기세가 실려 있었다.
이런 때는 생각을 하는 순간 죽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적에 검을 피하고 쳐내다가 찰나의 빈틈을 포착해, 그곳을 향해 창을 꽂아 넣어야 한다.
푸슉!
진무량의 창이 일직선을 그리며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말이다! 놈이 타고 있는 말을 노려라!”
선두의 무리가 진무량에게 돌파 당하자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상은 나쁘지 않으나, 어림도 없는 소리.
한순간이라도 진무량에게서 눈을 떼고, 그가 타고 있는 말을 노린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콰드득!
진무량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수많은 인파들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쒜엑!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뒤쪽에서 누군가의 검이 날아들었다. 날아든 검이 진무량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고통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허나 그것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당장 옆과 앞에서 검이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피하면 죽는다.’
염옥창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쩌엉!
앞과 옆에서 날아오던 검이 염옥창과 부딪치면서 검신이 부러져버렸다.
콰드득!
검이 부러진 적을 염옥창으로 베어내면서, 진무량은 흑풍과 함께 다시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죽을 것이다.
그런 위험한 상황이 이어질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오로지 사선(死線)에 서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들이 꿈틀거린다.
극의 달한 집중력 속에서 격정, 공포, 냉정함, 야성 모든 감각들이 뒤섞인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조리 뒤섞였을 때 만들어지는 것은 쾌감이다.
짜릿한 쾌감.
진무량의 그 감정은, 상대하고 있는 적에게 너무나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게 했다.
‘대체 뭐야!’
‘괴물이다. 이놈은 인간이 아니야!’
죽음이 눈앞에 있는 상황임이 분명함에도 겁을 먹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진무량은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결코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흑풍과 함께 내달리며 적을 베어 내다보니 주변을 둘러싼 적의 포위가 약해졌다.
진무량은 힘을 더욱 끌어올렸다.
모든 강호인들에게 있어 꿈의 경지인 검기, 그것마저 넘어선 강기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존재하다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전설 속의 경지라는 강기!
‘천공포!’
진무량의 손에서 염옥창이 앞으로 뻗어지는 순간. 천하에서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강기가 사방으로 쏘아져나갔다.
콰과과과광!
진무량의 주변이 초토화되면서 그곳에 있던 수없이 많은 무인들이 날아갔다.
대부분 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겨우 몸을 지탱한 자들도 내상으로 인해 입에서 붉은 선혈을 흘렸다.
진무량의 주변에 적이 나가떨어지면서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진무량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있는 천 명의 시선이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진무량이 말했다.
“이 정도면 끝났겠지.”
쿵! 쿵! 쿵! 쿵!
저 멀리 동쪽 언덕에서부터 시작된 파공음이 사방으로 이어져갔다.
진무량을 상대하던 적들은, 갑자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리가 난 곳들은 모두 진무량을 포위하기 위해 만든 환영문의 거점으로, 높이 솟은 언덕을 골라서 환영문을 상징하는 깃발들을 꽂아놓은 곳이었다.
우지끈!
환영문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한순간 모두 꺾였다.
척!
그리고 그곳에는 검은 바탕에 붉은 용이 승천하는 깃발이 걸렸다.
멸천대의 깃발이었다.
두두두두두!
멸천대의 깃발이 펄럭이는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