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22화 (22/143)

22화. 황룡표국

2017.06.18.

유서하는 먼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남궁세가 근처에서 남궁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진무량, 견무겸과 함께 남궁지를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서 신투에 대한 정보를 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남궁세가를 떠나면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뒤늦게 도착한 남궁지가 서둘러 다가왔다.

남궁지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세가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조금 늦었소.”

“저희도 방금 도착했어요.”

남궁지는 기다렸을 유서하를 생각해 긴 말을 생략하고, 곧바로 품 안에서 얇은 서책을 꺼냈다.

“이것이 세가에서 조사한 신투에 대한 핵심 정보라오.”

남궁지는 신투에 대해 쓰여 있는 서책을 유서하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연으로 신투를 쫓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남궁세가도 신투를 잡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소. 만약 남궁세가에서 먼저 신투를 붙잡게 된다면 꼭 연락을 드리겠소.”

남궁세가 역시 이번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신투를 쫓을 생각이었다.

신투를 잡기 위해서 남궁세가는 그가 출몰할 가능성이 높은 곳을 다섯 곳으로 추렸고, 유서하는 이중에서 하나를 맡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선택한 곳은 황룡표국의 표행이었다.

남궁지는 유서하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나머지 네 곳은 남궁세가에서 파견한 고수들이 움직일 예정이었다.

남궁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황룡표국에 세가의 뜻을 전해놓았습니다. 다만 유 소저께서 그곳을 선택하기 전에 이미 연락을 취해버린지라, 아마 그들은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네. 그건 제가 설명하도록 할게요. 신경써주셔서 고마워요.”

유서하는 남궁지가 건네준 얇은 서책을 잘 챙겼다.

남궁지는 떠날 준비를 마친 유서하 일행을 바라보다가 슬쩍 진무량을 쳐다보았다.

“…….”

처음으로 무인으로서 호승심을 느끼게 해준 상대이자 반드시 뛰어넘고 싶은 목표가 눈앞에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피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상대였다.

허나 정작 그 상대는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마음대로 목표로 정했기 때문에, 진무량이 그에 응해 줘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진무량의 무관심한 반응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진무량을 바라보던 남궁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열심히 수련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만난다면, 그렇게 무관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라는 뜻을 전할 것이다.

자신의 검을 통해서.

남궁지는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가슴속 깊이 새겼다.

유서하가 남궁지를 향해 말했다.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여러 가지로 정말 많이 신세를 졌습니다.”

“피차 마찬가지요. 부디 무운을 빌겠소.”

서로 정중하게 예를 취한 뒤, 유서하 일행은 남궁세가의 입구를 지나 밖으로 향했다.

남궁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강호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눈으로 봤을 때, 진무량과 유서하는 서로 정반대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었다.

마교의 진무량.

비천검문의 유서하.

서로 접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두 사람이 함께 강호를 헤쳐 나간다.

“훗.”

남궁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도저히 그들의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앞으로 저들의 행보가 걱정이 되기보다는, 기대가 되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또 볼 날이 있겠지.’

* * *

황룡표국의 표행은 절강으로 가는 길에 있는 패현(覇賢)이라는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은 절강으로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들르는 곳이기에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패현은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특히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오랜 시간 바람에 깎여 만들어진 바위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절강으로 가려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을 보러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패현은 언제나 사람이 넘쳤다.

패현에 위치한 수많은 객잔 중에서도 가장 좋은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은 동호객잔이었다.

동호객잔은 주변에 어떤 객잔보다도 규모가 컸다. 무려 오 층에 달하는 높은 층수와 진귀한 음식을 파는 곳으로 유명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루를 묵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심해야 할 곳이었으나, 황룡표국의 표행을 담당하고 있는 행수 은소연(殷少連)은 망설임 없이 동호객잔을 통째로 빌렸다.

황룡표국 국주의 외동딸이자 이번 표행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은소연에게 그 정도 지출은 조금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숙박료와 식비예요.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물 예정이니 미리 지불하고 와주세요.”

은소연은 함께 자리하고 있는 표사에게 전표를 건네며 말했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귀한 집 여식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깔끔한 외모에 정갈한 복식, 가끔 한 번씩 드러나는 장신구는 모두 최고가의 물건이었다.

전체적으로 미인의 면모들을 갖추고 있는 와중에, 특유의 냉정해 보이는 눈매는 은소연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은소연은 함께 자리하고 있던 표사에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남 표두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황룡표국.

이름만 말하면 중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표국 중 하나였다.

은소연이 동호객잔을 통째로 빌린 이유는, 먼 길을 걸어오느라 지친 표국의 사람들을 편하게 쉬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표행은 황룡표국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황룡표국의 국주가 직접 담당해야 옳은 일이었겠으나, 국주의 지병이 도지는 바람에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은소연이 총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황룡표국의 국주는 은소연을 사실상 후계자로 생각해두고 있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그녀의 성격과 책임감 때문이었다.

언제나 과감하게 행동해서 이(利)를 취하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은소연의 성격을 황룡표국의 국주는 높이 평가했다.

은소연을 필두로 황룡표국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이번 표행에 쏟아부었다.

짐을 나르는 쟁자수부터 시작해서 표물을 지키는 표사와 표두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고로 선별된 인원만을 뽑았다.

황룡표국이 이번 표행에 이토록 신경을 많이 쓰는 이유는, 중원에서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왕가벽(王家璧)이 처음으로 황룡표국에 의뢰를 한 일이었다.

황금으로 수백 개의 연못을 매웠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왕가벽이다.

그가 이번 표행의 맡긴 물건들만 하더라도 천하에서 손꼽히는 명검들과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칭해지는 귀한 비단. 그리고 모든 무인들의 소원이라고 칭해지는, 내공을 증진시키고 내상을 치유한다고 알려진 영험한 영약까지.

값비싼 표물들을 수없이 담당해온 황룡표국이지만, 이번 표행에 실은 물건들은 다른 때에 비해 가격이 백 곱절 이상은 높았다.

당연히 위험이 따르는 표행이 될 테지만, 그럼에도 이번 표행은 반드시 맡아야 했다. 그 이유는 표행을 의뢰한 인물인 왕가벽에게 있었다.

그의 재력만 하더라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왕가벽이 황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황실에 많은 재상들을 배출한 왕씨 가문 사람이니, 만약 그와 좋은 인연만 쌓을 수 있다면 지금까지 황룡표국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황실과의 연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리 될 수만 있다면 황룡표국은 천하제일 표국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테니, 아주 중요한 표행이었다.

“행수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행수는 표행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은소연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은소연이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번 표행의 표두를 맡고 있는 남경(南暻)이라는 자였다. 그는 주로 남 표두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다.

남 표두는 방으로 들어와 은소연을 향해 말했다.

“표물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수고했어요.”

은소연은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까지 표행은 아무 문제없이 순조로웠다. 황룡표국과 좋은 관계를 쌓아놨던 곳만 골라서 지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여 크게 도적의 습격을 받지도 않고 시비를 붙는 일도 없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곳에서 절강으로 가는 길에 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었다.

녹림.

정확히는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라고도 불리는 그들은, 산을 휘젓고 다니는 무법자라고 할 수 있었다.

험한 산을 타고 다니며 도적질을 일삼는 자들.

허나 그들을 그저 일반 도적으로 치부하는 자들은 강호에 없었다. 그들은 평범한 도적들과 달리 모두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녹림십팔채는 어느 문파에 비해도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웬만큼 강인한 세력이 아닌 이상 녹림십팔채를 무시하지 못했다.

이번 표행은 지금까지 중 가장 규모가 컸고, 진귀한 물건들도 가득 실려 있었다. 녹림에 표적이 될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름없었다.

물론 그에 따른 대비를 철저히 해 왔지만, 그럼에도 녹림과 부딪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하여 그들을 피하기 위해 은소연은 앞으로의 진로를 더욱 깊게 고심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면 바로 신투였다.

최근에 특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도둑. 신투.

심지어 강호 문파에 침투해 물건을 훔칠 정도로, 도둑으로서는 거의 최고의 경지라 알려진 자였다. 게다가 신투가 가장 즐겨 훔치는 것이 바로 표행을 통해 운송되는 귀중품이었다.

신투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얼마 전 남궁세가로부터 받은 서신이 떠올랐다.

“남궁세가에서 신투를 잡기 위해서 표행을 도우러 온다는 자들에 대한 소식은 없나요?”

녹림과 신투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찰나, 생각지도 못했던 남궁세가에서 먼저 접촉을 해왔다. 그들은 신투를 잡기 위해 황룡표국의 표행을 돕겠다며 먼저 제의해왔고, 은소연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빌릴 수만 있다면 작은 힘이라도 빌려야 하는 와중에, 다른 곳도 아닌 남궁세가의 제안은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름난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표행을 도와준다면 엄청나게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남 표두는 은소연의 질문에 대답했다.

“남궁세가에서 출발했다면 곧 이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쿵. 쿵.

밖에서 분주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수님. 남궁세가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은소연은 자리를 일어나면서 남 표두를 향해 말했다.

“딱 맞춰 왔군요.”

은소연은 예의를 갖추기 위해 의복을 정돈하고, 남궁세가에서 파견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일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통해서 일층으로 내려가던 중, 은소연은 황룡표국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서있는 일행의 모습을 얼핏 볼 수 있었다.

보이는 인원은 총 세 명이었다. 여인으로 보이는 자가 선두에서 죽립을 쓰고 있었고, 그 뒤로 두 명의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들이 남궁세가에서 온 자들인가.’

은소연이 그들에게 느낀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고작 세 명밖에 되지 않는 데다,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 여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강호에서 이름난 여고수는 결코 많지 않다. 게다가 남궁세가에 그런 여고수가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곳에 있는 세 명 중 한 사람에 대해서 기대할 것이 없어졌다.

뒤에 서 있는 두 명 중 한 사내는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한쪽 눈에 길게 새겨진 검상이 눈에 띄는 인상. 굳게 다문 입과 떡 벌어진 어깨를 보았을 때 제법 강인한 기세가 느껴졌다.

은소연의 시선이 그 옆에 있는 사내를 향했다.

‘이 사내는 뭐야?’

다른 한 사내는 굉장한 미남이었는데, 특히 날카로운 눈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외모가 아니라 너무 어려 보이는 나이였다. 겉모습으로만 본다면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는데, 만약 그렇다면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나 다름없다.

저 나이에 기대할 수 있는 무공의 경지는 그리 높지 못했다. 혹여 나이에 비해 경지가 높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어린 무인들에게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실전경험이 부족하다.

이는, 표물을 지키는 표사로서는 엄청난 결점이다.

당황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표물을 노리고 덤벼드는 상대는 기습을 가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급박하게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실전경험이 없는 자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내의 등 뒤에 메고 있는 거대한 창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무인답게 근육질의 몸이기는 했으나, 보통 저런 큰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은 훨씬 더 덩치가 컸다.

‘저런 무거운 창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까?’

지금까지 봐왔던 무공의 고수들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모습에 크게 실망했지만, 은소연은 순식간에 그런 기색을 감췄다.

어쨌든 이들은 남궁세가에서 온 자들. 무림에서 이름난 명가로 알려진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박대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은소연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가, 선두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황룡표국의 표행에서 행수를 담당하고 있는 은소연이라 합니다.”

은소연의 인사를 받은 여인이 죽립을 벗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한 뒤, 정중하게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저는 비천검문의 유서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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