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의문의 서찰
2017.06.15.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객잔의 방 안.
유서하는 다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묵묵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얼마 전 알게 된 유월천의 생각은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강호의 닥쳐올 위기를 막기 위해서 진무량을 이용한다니.
‘정말 그 방법이 최선일까.’
유서하의 표정에 근심이 더욱 깊어졌다.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중련이라는 거대한 세력의 위협에 맞서면서 최대한 희생을 줄이고자 함이 아버지의 진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
최대한 희생을 막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것을 실현할 방법이었다.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강제로 이용하는 그 방법만은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유서하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에 빠져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 이렇게 망설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이제는 확실히 마음을 다잡고 행동에 나서야 했다.
며칠 동안 혼자서 끊임없이 고민했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고민되는 대상과 직접 마주하는 것뿐이었다.
어떤 식으로 대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에, 최근 며칠 동안 진무량과 마주치는 것을 피해왔다.
지금도 진무량을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 망설여졌다.
유서하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다잡았다. 당면한 문제를 피하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유서하의 발이 진무량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인적이 없는 텅 빈 공터.
진무량과 유서하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꽤나 오랜만이군. 무슨 일이지?”
“특별한 일은 없어요. 다만…….”
유서하가 말끝을 흐렸다.
일단 진무량과 마주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입장에서는, 진무량이 던진 질문도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 아닌데…….’
딱히 볼일이 있다기보다는, 진무량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또한, 일단 진무량과 마주해야 자신의 생각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허나 막상 마주해 보니, 진무량이 던진 간단한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유서하가 간신히 생각해낸 말을 꺼냈다.
“……식사는 하셨나요?”
진무량과 유서하는 함께 객잔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적당히 요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유서하는 계속해서 진무량의 눈치를 살폈다.
진무량의 행동은 유월천과 만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 일이 있기 전과 똑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유서하는 의문을 느꼈다. 분명 진무량이 지금과 다르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해.”
어색한 유서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진무량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유서하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당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군요.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난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아. 그 시간에 상대가 나를 원망하게 만들 생각을 하지.”
진무량이 유서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변한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진무량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전과 달리 유서하는 괜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유서하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말했다.
“저는 당신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상황이 어떻든 간에…… 앞으로 저는 당신을 이용하게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태연스러운 어조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내공을 되찾기 위해서 너를 이용할 생각이었어.”
“…….”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어차피 난 내가 행동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허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
유서하는 진무량과의 관계를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처음 진무량과 만났을 때는 이렇게 복잡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현암사로 데려가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대상일 뿐이었다. 허나 도중에 진무량과 함께 행동하면서 도움도 받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겪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언제부터인가 진무량을 그저 평범한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아버지의 뜻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진무량과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그를 이용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유서하는 진무량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리고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을 동료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유서하는 질문을 하면서 진무량이 어떤 식으로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조심스러운 유서하의 태도와 달리, 진무량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무심한 어조로 진무량이 대답했다.
“그러든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이용하기는 더 편하겠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유서하는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마침 점소이가 주문했던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요새 여러 가지 고민으로 음식 생각이라고는 전혀 해본 적 없는 유서하였다. 허나 마음가짐이 변하고 나니, 눈앞에 차려진 간단한 음식들이 조금씩 먹음직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 * *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허름한 방.
소천광은 침상에 앉은 채, 몸에 감긴 붕대를 풀고 있었다.
진무량에게 입었던 상처는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아직 무공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몸을 움직이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끼익―.
비명과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낡은 방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일전에 소천광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무혁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천광은 적무혁의 모습을 보자마자 머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셨습니까.”
적무혁이 혀를 짧게 차면서 대답했다.
“흘. 쓸모없는 놈. 몸은 좀 움직일 수 있겠느냐?”
“이제 괜찮습니다.”
소천광은 주름진 적무혁의 눈가를 보고,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계획했던 모든 일이 생각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그의 심기를 어지럽힐 만한 것은 잃어버린 서찰밖에 없었다.
소천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찰을 되찾지 못한 것입니까.”
노인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남궁세가의 그깟 애송이 하나 처리하지 못하다니, 멍청한 놈.”
노인이 말하고 있는 자는 철전패왕 손무엽이었다.
손무엽이라면 쥐새끼를 잡는 것쯤은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헌데 이렇듯 완벽하게 일을 그르치다니…….
손무엽의 죽음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구중련에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힘을 사용하면서까지 되찾으려 했던 서찰을 끝내 얻지 못한 것이 적무혁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소천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아서라. 지금 남궁세가는 독이 바짝 오른 상태다. 게다가 보고에 따르면 검선도 그곳에 있다고 하니, 더 이상 건드렸다가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다.”
적무혁이 억지로 화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네가 쓰던 혈월회 놈들이 잡혔다는데, 별 문제는 없겠지?”
“처음부터 적당히 쓰고 버리려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구중련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아직은 본격적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야.”
그럼에도 남궁헌의 손에 들어간 구중련의 서찰은 여전히 신경 쓰였다.
서찰의 내용은 검선이나 남궁세가라 할지라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서찰은 오직 구중련에서만 통하는 암어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학자들이 모여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암어이다. 그 암어를 풀 수 있는 자는 천하를 뒤져보아도 쉽게 찾을 수 없을 터.
그럼에도 남궁헌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던 것은, 강호에서 구중련의 존재를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였다.
‘미세한 틈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늘…….’
허나 언제까지 지난 일에 연연할 수는 없었다.
잃어버린 서찰을 되찾는 것을 포기한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그 사내였다.
노인이 소천광을 향해 말했다.
“내 직접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너의 실패를 씻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무엇이든 명을 내려 주십시오.”
“귀혈악인이 어디 있는지 파악해 보거라.”
적무혁의 입에서 진무량이 언급되자 소천광의 눈빛의 살기가 아른거렸다.
“죽이실 생각입니까?”
“아니. 넌 그가 어디에 있는지만 파악해 놓거라. 내 직접 그를 만나봐야겠다.”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망설이는 소천광의 어조가 살짝 떨렸다.
그동안 적무혁의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아직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적무혁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강호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최악의 공포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적무혁이 말했다.
“오랜만에 몸도 좀 움직이고 그래야겠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부터 귀혈악인은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적무혁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렸다.
“포섭할 수만 있다면 아주 큰 힘이 될 수 있는 자니까.”
* * *
진무량과 유서하가 식사를 끝냈을 무렵, 견무겸이 두 사람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견무겸은 안휘에서 겪었던 일들을 남궁세가에 있는 검선에게 전하고 오는 길이었다.
견무겸이 유서하를 향해 다가가서 말했다.
“문주님께서 급히 아가씨를 찾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남궁헌 소협이 의식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유서하는 의식이 돌아온 남궁헌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음을 직감했다.
이번에 안휘에서 겪은 일련의 사건들의 중심은 결국 남궁헌이었다.
갑작스럽게 혈월회가 모습을 드러낸 것과, 은거에 들어갔던 손무엽이 남궁세가를 공격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자는 남궁헌을 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소천광이었다.
혈월회와 손무엽은 이전부터 강호에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허나 소천광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고수였다.
절정고수 수준의 무인이 아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힘보다 감춰진 힘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섭리이다.
그동안 숨어있거나 힘을 감추고 있던 자들이 갑자기 등장해서는 공통적으로 노린 목표가 바로 남궁헌이었다.
일반적으로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유서하가 말했다.
“지금 바로 출발할게.”
유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진무량과 눈이 마주쳤다.
“전 잠깐 남궁세가에 다녀올게요. 편하게 쉬고 있으세요.”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군.”
불미스러운 일이 겹친 뒤라 남궁세가는 꽤나 경계가 삼엄했다. 유서하는 그런 곳을 진무량과 함께 가는 것은 분명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견무겸은 진무량을 한 번 쳐다본 뒤,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이곳은 제가 남아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문주님께서는 남궁세가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유서하는 곧바로 남궁세가로 향했다. 남궁세가 내부는 꽤나 익숙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렵지 않게 서재를 찾을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서재는 꽤나 넓었는데, 사람이 지나다니는 통로 외에는 모두 서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책들은 오랜 세월을 나타내듯이 낡아서 해진 것들이 군데군데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모두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남궁세가의 서재를 둘러보던 유서하는 곧 유월천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왔느냐. 서있지 말고 일단 이리 와서 앉거라.”
유월천은 자신이 앉아있는 책상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월천이 가리킨 자리에 앉은 뒤 유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남궁헌 소협은 만나보셨나요?”
“그래, 지금 막 현일과 함께 만나고 오는 길이다.”
책상위에 놓인 한 장에 서찰을 바라보며 유월천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헌이가 구중련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것 때문인 듯하구나.”
유서하는 유월천이 말하고 있는 서찰을 유심히 살폈다.
서찰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내용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지는 않았으나, 서찰에 쓰인 내용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암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유서하가 말했다.
“이 서찰이 그 원인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십중팔구는 그럴 것이다. 이 서찰을 제외하면 헌이의 행적에 딱히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었다.”
“남궁헌 소협이 이 서찰을 얻게 된 경위는 알아보셨나요?”
“그래…….”
유월천은 남궁헌이 말했던 것과 남궁현일에게 들었던 상황을 합쳐서, 서찰을 갖게 된 경위에 대해 유서하에게 설명했다.
남궁헌은 무림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도둑인 신투를 잡기 위해 조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겨우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는데, 그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값비싼 물건들은 전부 빼돌린 상태였다고 한다.
혹시라도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다가, 남궁헌은 거기서 수상한 서찰 한 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남궁세가로 돌아오는 중에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뭔가 이상해.’
유서하는 유월천의 설명 중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을 발견했다.
이 서찰을 훔친 것이 신투라면 혈월회는 남궁헌이 아닌 신투를 쫓고 있어야 했다. 헌데 어떻게 그들은 서찰이 남궁헌에게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목표를 신투에서 남궁헌으로 바꿨을까.
결론은 자명했다.
남궁헌이 서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누군가가, 그 사실을 혈월회에게 전한 것이다.
즉, 남궁세가에 구중련과 내통하는 첩자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중련은 여전히 그 서찰을 신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이 서찰을 남궁헌 소협이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자들부터 조사를 시작해야겠어요.”
유월천은 유서하의 대답을 듣고,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서하가 자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면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결론이었다. 폭넓게 상황을 바라보고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했음이 틀림없었다.
허나 첩자의 관련된 의구심은 이미 남궁현일과 이야기를 했던 사항이었다.
유월천이 말했다.
“헌이와 같이 임무를 수행했던 자들은 모두 혈월회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아마 그들 중 누군가가 혈월회와 내통을 하고 있던 것이겠지. 그 일에 관련된 것은 현일이 처리한다고 하는구나.”
유서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근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남궁세가에 숨어든 구중련의 첩자가 정말로 혈월회와 내통을 하고 있었다면, 그들을 조사하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남궁세가와 내통을 하고 있던 자가 꼭 혈월회 소속이라는 법은 없었다.
유월천이 알려준 대로라면, 구중련에는 정사를 막론하고 수많은 무리가 연합해 있다고 했다. 남궁세가에 숨어있던 첩자와 내통을 한 자는 혈월회가 아닌 다른 곳 소속이고, 혈월회는 단순히 남궁헌을 죽이라는 명령만 받은 것이라면…….
‘혈월회를 통해서는 더 이상 밝힐 사실이 없을 수도 있겠어.’
유월천이 피로 얼룩진 서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찰에 적힌 암어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으나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을 마친 유서하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일단 이 서찰을 훔친 신투부터 잡아야겠네요. 그러면 적어도 이 서찰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유월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사소한 단서라도 구중련과 연관이 있다면 무조건 조사를 해야 할 때였다.
“그래. 일단 신투를 잡는 것이 우선이겠구나. 남궁세가에서도 그를 쫓고 있다고 하니, 신투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게다.”
유월천은 유서하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서하에게서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허나 지금은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망설이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유월천이 말했다.
“진무량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는 정리가 끝났느냐.”
“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어요.”
유서하의 대답은 확고했다.
아버지가 원했던 생각과는 자신의 결론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허나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군가의 강요나 설득이 아닌, 자신이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래, 내 너의 신중한 성격을 잘 알고 있다. 분명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겠지. 지금은 그거면 됐다.”
유월천이 책상에 놓인 피로 얼룩진 서찰을 챙기며 말을 이었다.
“신투를 잡는 것과 이 서찰에 출처를 조사하는 임무를 모두 네게 일임하겠다.”
유월천은 따로 서찰에 적힌 암어를 해독하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서 유서하에게 내밀었다.
“받아두거라.”
유서하는 호리병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굳이 보지 않고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특수한 향 때문이었다.
호리병에 들어있는 것은 비천검문에서 사용하는 잠혼향이 틀림없었다.
잠혼향은 천리추혼향의 일종이다.
천리추혼향은 주로 추격하는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보통사람들은 아무런 향도 느낄 수 없으나,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천리추혼향은 그야말로 천리밖에 있어도 그 향을 느낄 수 있다.
유서하는 유월천이 내미는 잠혼향을 받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
유월천이 잠혼향을 유서하에게 건네는 이유는,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존재인 진무량 때문이었다.
“만일을 위한 것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일단 받아두거라.”
유서하는 결국 유월천이 내미는 잠혼향이 든 호리병을 받았다.
유월천과 유서하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지, 지금의 눈빛만으로도 유서하는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서하는 가볍게 미소를 띠면서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믿음직한 유서하의 모습을 보면서 유월천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비천검문에서 만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