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비밀 (1)
2017.06.08.
으득.
짧은 순간 진무량은 이를 갈았다.
저 능청스러운 태도를 또 다시 마주하게 되니 눈앞에 있는 유월천에 대한 살심이 더욱 더 깊어져갔다.
진무량의 눈에 비치는 유월천은 몸속에 백 마리의 능구렁이를 품고 사는 노인이었다.
그런 표독스러운 인간을 상대할 때는 먼저 흥분하면 반드시 말리는 법이다.
진무량이 말했다.
“그래. 삼 년 동안 죽도록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생각보다 더 반가운걸.”
“허허. 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 심정을 알 수 있겠네.”
진무량은 당장 손에 든 창을 유월천의 얼굴에 내리꽂아버리고 싶었지만, 호락호락 당해줄 노인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웃는 얼굴로 보이는 유월천의 눈꼬리가 더욱 아래로 쳐지면서 말했다.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떤가?”
진무량과 유서하를 데리고 남궁세가를 나온 유월천은 인적이 없는 곳을 향해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 나왔다.
유월천은 가던 길을 멈추고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비록 보고 싶진 않았어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데, 그런 꼴로 있어서야 되겠나?”
유월천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진무량의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어라.”
유서하는 순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괜찮다. 설마 아비가 저런 악인에게 패하기라도 할 것 같으냐?”
유월천은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면서 망설이는 유서하를 안심시켰다.
유서하는 바닥에 앉아 금을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정돈한 뒤, 금을 켜기 시작했다.
띵―! 디디디디딩!
연주가 시작되자 진무량의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허튼 소리를 지껄이면…….”
진무량은 쥐고 있는 창을 비틀어서 시퍼런 창날이 유월천을 향하게 했다.
“연주를 끊기 전에 죽을 수도 있겠군.”
유월천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가가면 베일 듯한 살기는 여전하구만. 속내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그것을 통해 상대를 떠보는 그 심리전 또한 똑같아.”
유월천과 진무량의 강렬한 눈빛이 허공에서 뒤얽혔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유월천이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것 아닌가?”
곧바로 이어지는 진무량의 대답.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초승달처럼 휘어진 유월천의 한쪽 눈이 미세하게 커지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자네는 언제나 핵심을 가장 먼저 꿰뚫는군.”
“어차피 네놈도 그 핵심을 말하려 이곳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유월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에 나는 강호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어떤 조직을 알게 되었네. 그들의 이름은 구중련. 처음에는 그저 사파의 무리인줄 알았으나, 그것은 아주 큰 오산이었지.”
진무량은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유월천을 향해 말했다.
“노망이 났나? 그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과거를 정확히 이해해야 현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법이네.”
유월천은 다시 말을 이었다.
“구중련의 움직임은 아주 은밀하고 또한 굉장히 철저했지. 나는 그들을 끝없이 조사하기 시작했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밝혀내었다네.”
“…….”
“구중련에는 수많은 정파와 사파, 심지어 마교의 고수들까지도 연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지.”
진무량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유월천은 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일정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강호에 알려진 고수들은 물론이고, 은거를 했거나 과거의 손꼽혔던 기인들 중에도 그들을 돕는 자들이 있었어. 내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나 알려지지 않은 자들도 있겠지. 나는 아직도 그들의 진정한 힘을 파악하지 못했네.”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본론만 말해.”
“흐음…… 알겠네.”
유월천은 진무량을 혈마옥에 가두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을 떠올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자네를 만나기 조금 전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무림맹은 자네를 잡기 위해 인근의 거의 모든 문파를 움직였지.”
유월천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펼친 완벽한 천라지망을 자네는 참으로 잘도 돌파해 나갔지. 만약 그때 추연희 소저를…….”
그때, 순식간에 진무량의 창이 날아들었다.
챙!
유월천은 순식간에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진무량의 창을 막아냈다.
유서하의 눈에는 유월천이 언제 허리춤에 검을 뽑아 막았는지, 진무량이 어떻게 공격을 가한 것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다가 뜨니 두 사람의 검과 창이 맞닿아 있었다.
금을 켜던 유서하가 서둘러서 연주를 멈췄다.
그녀의 연주가 멈추자 진무량의 몸에 또다시 고통이 찾아왔으나, 그는 그런 것 따위를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큰 분노 앞에 고통 따위가 끼어들 여지 따위는 없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그 이름은 입에 올리지 마라.”
내공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진무량은 유월천의 검과 맞대고 있는 창을 치웠다.
그때 유월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손이 진무량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참고하도록 하지. 헌데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니 신빙성이 없지 않은가.”
꽉 움켜쥔 유월천의 손에서 그의 내공이 진무량의 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윽!”
진무량은 몹시 당황했다. 상대방의 내공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칫하면 그대로 절명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진무량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근!
진무량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 상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직접 느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유월천의 내공이 흘러들어오자 몸 안의 내공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마치 유서하의 음을 들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이제야 좀 낫군.”
유월천은 진무량의 손을 가볍게 놓으면서 말했다.
진무량은 서둘러 당황한 마음을 추슬렀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내상을 만든 것은 유월천이었으니까.
유월천이 말했다.
“그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생겼을 텐데.”
진무량은 유월천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서 모든 비밀이 풀릴 것이 분명했다.
“계속 해 봐.”
“당시에 자네는 천라지망을 뚫기 위해 많은 힘을 소모한 상태로 나와 겨루게 되었지.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더군. 그때 자네를 구하러 와야 할 멸천대가 도착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사실 검선은 진무량과 그냥 겨룬다고 해도 본인이 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멸천대주인 진무량을 더욱 손쉽게 잡기 위해, 그리고 인명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그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추연희를 같이 공격했다.
진무량이 자신을 돕기 위해 오던 멸천대를 추연희 쪽으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그때 검선에게 잡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검선이나 진무량이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유월천의 시선이 진무량이 쥐고 있는 창날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참으로 강했어. 내공을 그렇게 소진한 상태에서 칠무제라 불리는 나와 겨뤘음에도 쉽게 밀리지 않고 사흘 밤낮을 겨뤘으니까.”
창날을 향했던 유월천의 시선이 진무량의 눈을 향했다.
“허나 결국 내공도 체력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나한테 물을 시간이 있으면 하던 말이나 계속해.”
“하하. 그러도록 하지. 결국 자네는 나한테 패했고 간신히 목숨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지. 처음에 내게 물었지? 왜 죽이지 않았느냐고. 그것에 대한 답을 해주지.”
유월천은 감겨 있는 것 같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항상 너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던 유월천의 인상은 전혀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겨우 숨만 붙은 채 의식을 잃은 자네를 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네. 이자를 죽이기보다는,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진무량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유월천은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나에게는 그 생각을 실현시켜줄 무공이 있었다네. 내가 평생을 바쳐 이룬 무공의 이름은 금마쌍장(禁魔雙掌)이라 하지. 이 무공은 마공을 익힌 상대의 내공을 완전히 봉인한다네. 그리고 이 봉인을 푸는 방법은 나의 내공을 상대에게 전하는 것밖에 없지.”
유월천이 시선을 돌려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서하는 나의 핏줄임과 동시에 나와 똑같은 심법을 익혔기 때문에 내가 봉인한 자네의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게지. 음을 통해 자네에게 내공을 전달하면서 말일세.”
진무량은 잠깐 동안 사용할 수 있던 내공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유월천이 손목을 움켜쥐며 흘려보냈던 내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네놈의 더러운 생각이 뭔지 알겠군.”
“나의 설명은 이제 끝났다네. 자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진무량은 끝까지 가식적인 유월천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혓바닥을 번지르르하게 놀리고 있지만, 결국 네놈의 뜻은 거대한 사냥감을 잡기 위해 말 잘 듣는 사냥개가 필요한 것 아닌가.”
“…….”
“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내공이라는 목줄을 쥐고 있으니 함부로 덤벼들 수 없는. 참으로 기발한 생각을 해냈군.”
유월천의 얼굴에는 한 점의 미소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 말이 맞네. 게다가 그 사냥개의 실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쓰임새마저 다양해. 협을 추구해야하는 정파인에게는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네. 헌데 자네는 그런 것도 없지 않은가.”
진무량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오명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고,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겠지.”
“자네와는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참 좋아. 그래. 그런 사냥개가 난 필요하다네.”
진무량의 입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을 뿐이네. 그렇다면 묻지. 자네는 내 제안을 거절할 것인가?”
진무량은 허점을 찾기 위해 유월천이 했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없이 되뇌어봤다.
허나 전혀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떠오르는 최악의 수는, 정파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죽음으로써 유월천에게 오명을 씌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최악의 수다. 이미 자신이 죽고 난 후에 유월천이 어떻게 되더라도 의미가 없고, 치밀한 그가 아무런 대책도 세워놓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그래 참으로 잘 짜인 판이군. 벗어날 길이 없어.”
“부정하지 않겠네.”
유월천의 뜻대로 따라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지금은 내공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 상태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내공을 되찾기 전까지는 유월천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진무량은 자신의 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좋아. 네 말대로 따르지. 일단 살아남아야 목줄도 끊고, 주인이라 착각하는 놈의 심장도 물어뜯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네.”
굳어졌던 유월천의 표정이 다시 원래의 짙은 웃음을 짓고 인상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난 자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어. 언제나 상대방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면서 믿게 만들고, 단 한 번의 진정한 거짓말로 뒤통수를 치는 그 방법을 말이야.”
“그걸 안다고 해도 모든 일에 대처할 수는 없다는 것까지 내가 직접 알려주지.”
“기대하겠네.”
“내가 내공을 찾는 순간, 각오는 해둬야 할 거야.”
진무량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월천을 향했다.
“너의 흔적이 닿아있는 모든 인간을 죽일 테니까.”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절로 몸이 떨려올 정도의 살기.
유월천이 대답했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진무량은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고, 유월천은 그를 막지 않았다.
휑한 분위기에 벌판에는 유월천과 유서하만이 남아있었다.
유월천의 속내를 듣는 것은 진무량과 마찬가지로 유서하도 처음이었다.
“…….”
유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불편한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유월천이 지긋이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버지께서는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혈마옥에 가기 전 유월천이 유서하에게 했던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진무량이 강호에 불어닥칠 피바람을 잠재워 줄 수 있는 인물이니 데려오라는 것.
이런 식으로 약점을 잡아서 진무량을 이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유서하를 향해 유월천이 말했다.
“그래. 옳은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
유월천의 부드러운 손이 유서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바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진무량을 시키는 것이란다. 그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어.”
진무량은 단지 마교의 인물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림공적이라 칭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상대한 수없이 많은 무인들이 목숨을 잃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고 행동하는 그의 잔혹한 성정은 특히 악명이 높았다.
유서하의 어깨를 두드리던 유월천의 손이 멈추면서 말을 이었다.
“아비는 지금 살고 있는 무림을 참 좋아한단다. 평생 동안 살아온 곳이자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희로애락을 함께한 곳이니까.”
유월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렇기에 무림의 평화를 위협하는 자를 응징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