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8화 (18/143)

18화. 약속

2017.06.04.

남궁현일은 유월천의 나지막한 혼잣말을 듣고, 그가 만나려는 상대에 대해서 궁금증을 느꼈다.

지금까지 봐왔던 유월천은 웬만한 일에는 절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옅은 투기를 내비칠 정도이니, 상대가 누구인지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남궁현일이 유월천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 남궁세가의 무인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가주님, 세가에서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의외에 보고를 듣고 남궁현일의 미간이 좁아졌다.

남궁세가에서 그리 멀리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세가 내에 사람들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가에서 전서구를 보내온 것이니, 긴급한 일이 생겼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어서 읽어 보거라.”

남궁현일에게 보고를 올리던 사내가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서찰을 읽어가던 사내의 얼굴이 점점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급박하게 남궁현일을 향해 말했다.

“손무엽과 혈월회 살수들이 세가를 침입했다고 합니다!”

“뭣이!”

남궁현일이 불같이 노하며 일갈을 내뱉었고, 그 주변에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 모두 갑작스러운 소식에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현일이 세가의 무인들을 향해 거칠게 외쳤다.

“모두 지금 즉시 남궁세가로 이동한다!”

* * *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세가로 돌아온 남궁지는 곧바로 의방으로 향해 왕삼에게 치료를 받았다.

심각한 부상이기 때문에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했으나, 남궁지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청운각으로 향했다.

청운각은 귀한 손님이 머무르도록 만들어진 건물로, 유서하 일행도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남궁지는 청운각에서 유서하가 머물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유 소저 잠시 들어가도 되겠소?”

문 너머에서 유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남궁지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유서하가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서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지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서로 간단하게 예를 취하고, 자연스럽게 방 중앙에 있는 커다란 탁자 쪽으로 이동했다.

서로 착석을 끝내자 유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이제 조금 괜찮아지신 건가요?”

“움직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소.”

“다행이군요.”

사실 남궁지가 찾아오기 전에 유서하가 먼저 그를 만나러 가려 했으나, 남궁지의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상태였다.

남궁지의 부상이 나아지면 다시 찾아가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남궁지가 유서하를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유서하가 마주앉은 남궁지를 향해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물어보셔도 돼요. 사실대로 대답해드리죠.”

남궁지는 희미한 의식 사이로 보았던 진무량과 손무엽의 대결을 다시 떠올렸다.

남궁지가 물었다.

“그때 손무엽과 겨룬 자는 자신을 마교의 사대신마라고 칭하던데, 그 말이 사실이오?”

“맞아요. 그는 사대신마 중 한 명인 귀혈악인 진무량이에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남궁지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세간에 떠도는 소문도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바로 눈앞에서 진무량의 무위를 직접 보았기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검선께서 무림에 거짓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오?”

남궁지의 어조가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검선 유월천이 진무량을 쓰러뜨렸다는 것은 강호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유서하가 대답했다.

“진무량이 살아있으니 그런 셈이겠지요. 저도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해요.”

검선께서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일순 궁금증이 일었으나, 남궁지는 우선 눈앞의 상황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남궁지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이유로 그런 위험한 자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본문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거예요. 허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에요.”

유서하가 정확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평생 동안 강호를 위해서 살아오셨던 아버지라면 강호에 해가 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으실 거란 확신 때문이에요.”

남궁지는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자신도 모르게 굳어졌던 얼굴을 풀었다.

“이런…… 미안하오. 대화를 하려 왔는데, 궁금한 것이 많아 물어보기만 했소. 유 소저께서는 제게 궁금한 것이 없소? 저 역시 숨김없이 말하겠소.”

유서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정한 듯이 입을 열었다.

“진무량에 대한 사실을, 가주님께 고할 생각이신가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소.”

너무나 확고한 남궁지의 대답.

그렇기에 오히려 유서하는 남궁지의 의도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무림공적을 처치한다면 남궁지는 물론 남궁세가 전체에 큰 영광이 남을 것이다.

그밖에도 진무량을 잡아야할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못 본 척할 이유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서하가 남궁지를 향해 말했다.

“혹시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귀혈악인의 옆에 유 소저가 있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뜻이죠?”

“귀혈악인이 극악무도한 인물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함이 없소.”

남궁지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세가의 그 누구도 유 소저의 호위무사가 귀혈악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소. 진무량의 입장에서 보자면 손무엽이 세가를 침범했을 때도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오.”

유서하는 남궁지의 말을 끝까지 듣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혈악인은 내게 정체를 밝히면서 손무엽과 겨뤄주었소.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는 세가의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소.”

“그건…….”

“물론 귀혈악인이 세가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손무엽과 겨뤘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소. 나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을 정도의 인물이니.”

유서하의 말을 자르며 남궁지가 계속해서 대답했다.

“허나 그렇다는 것은 결국, 진무량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 유 소저라는 뜻이 되지 않겠소?”

“…….”

유서하는 남궁지의 말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기에 진무량이 움직인 것은 사실이었다.

남궁지가 유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죽이려 하는 진무량을 말렸을 때, 유 소저가 했던 그 말을 믿겠소. 제 목숨을 구해준 것과 세가를 도와주신 은혜를 이것으로나마 조금이라도 갚고 싶소.”

유서하는 작게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은혜라는 말은 가당치 않아요.”

“세가의 사람들을 구해준 것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 큰 은혜이오. 그리고 남궁세가는 절대 은인을 잊지 않소.”

남궁지는 양손을 모아 포권에 예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유 소저께 남궁세가의 힘이 필요할 일이 생긴다면 이 남궁지, 언제라도 은혜를 갚기 위해 반드시 찾아가겠소.”

유서하는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잇지 않고, 진솔한 남궁지의 태도에 답하기 위해서 같이 포권을 취했다.

남궁지가 포권을 풀면서 유서하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청이 하나 있는데……. 그를 한 번만 만나 봐도 괜찮겠소?”

남궁지는 청운각을 나와서 바로 근처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유서하의 설명대로 찾아가보니 어렵지 않게 진무량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인적이 없는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진무량은 뒤쪽에서부터 다가오는 남궁지의 기척을 눈치채고 가부좌를 풀었다.

“무슨 일이지?”

진무량이 어깨너머로 남궁지를 흘겨보며 말했다.

남궁지는 처음 만나는 진무량의 하대가 왜인지 모르게 어색하지 않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진무량의 어투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하대를 해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궁지가 유심히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마교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마교에서도 가장 높은 직위라고 할 수 있는 사대신마 중 한 명이었다.

남궁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겠소?”

“그런 것 정도는 알아서 생각해서 판단해.”

진무량은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서 말을 이었다.

“혼자 온 걸 보면 그 여자의 설득이 통한 것 같은데, 나를 찾은 이유가 뭐지?”

남궁지는 진무량을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어보면서 말했다.

“세간의 소문에 귀혈악인은 온몸에 비늘이 돋아있고 꼬리가 달려 있다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소.”

“확인했으면 그만 가봐.”

전혀 농담이 통하지 않는 진무량을 보고 남궁지는 그를 찾은 진짜 이유를 말했다.

“귀혈악인에 대한 허황된 소문은 무성하나, 얼굴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오. 그래서 이 두 눈으로 직접 귀혈악인이 어떤 사람인지 봐두고 싶어서 찾아왔소.”

지난날, 남궁지는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진무량의 무위를 보면서 진정으로 감탄했다.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사내가,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 볼수록 저절로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 일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나쁘지 않은 이유군.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직접 보는 것이 가장 빠르지.”

진무량이 뒤쪽에 있는 남궁지를 향해 몸을 돌려 앉으며 말했다.

“상대를 파악할 능력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남궁지는 진무량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눈앞에 진무량에게서는 그 어떤 기세나 강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자신이 눈앞에 있는 자의 상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턱대고 달려들기보다는, 나중을 위해서 진무량의 모습을 확실하게 눈에 새기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줬던 압도적인 강함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남궁지가 결연한 어조로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유 소저의 말을 듣고 그대를 모른 척하기는 했으나, 나도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겠지. 그대가 악행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퍼지면 내 가장 먼저 찾아가겠소.”

“그러든지.”

진무량의 행동은 일견 오만불손해 보였으나, 정작 남궁지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 대신 남궁지가 느낀 것은, 진무량에게서 전해져 오는 절대적인 자신감이었다.

그의 행동은 자신이 최강이라는 절대적인 자신감을 겉으로 내비치는 것처럼 보였다.

남궁지는 몸을 돌리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때는 나도 지금과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오.”

* * *

남궁현일과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전속력으로 움직여서 남궁세가에 도착했다.

남궁현일이 세가의 대문을 통과하자 처참하게 그을린 남궁세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속으로 전부 다스리지 못한 화가 남궁현일의 입을 통해서 짧게 흘러나왔다.

평소 너그러운 성격으로 유명한 남궁현일이지만, 검게 그을린 건물들과 난장판이 된 남궁세가를 보니 격분한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포박한 혈월회 살수들을 확실하게 감시하라. 또한 지금 즉시 외당주와 내당주, 그리고 장로들을 즉시 모이라 전하라. 세가 회의를 열 것이다!”

평소에 화를 낸 적이 거의 없었던 남궁현일이 적나라하게 분노를 드러내자, 그를 따르던 세가의 무인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남궁현일은 세가의 침입 상황을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집무실로 갈 생각이었다.

유월천이 격분한 남궁현일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외부인이 함부로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으니, 난 이만 가보겠네.”

남궁현일은 경황이 없어 유월천에 대해서 신경 쓰지 못한 것에 미안해했다.

유월천은 그런 남궁현일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를 향해 말했다.

“만약 도울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부르게. 곧바로 달려가겠네.”

유월천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진심이 느껴졌다. 남궁현일은 그런 친구의 말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었네. 이곳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자네는 서하한테 가보게.”

* * *

유서하는 잠시 바깥 공기를 쐬고 싶어서 청운각 밖으로 나섰다.

멀리 나가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던 유서하의 눈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유서하가 반갑게 외치며 유월천을 향해 다가갔다.

가만히 있어도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월천의 눈매가 더욱 휘어지며 반가움을 표현했다.

유서하는 갑작스러운 유월천의 등장에 당황했지만, 그것보다도 반가운 마음이 훨씬 더 컸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유서하의 물음에 유월천이 능청스럽게 답했다.

“내 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알 수 있지.”

사실이 어찌 되었건 유서하는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너무나 반가워했다.

“헌데 그 녀석은 어디 있느냐?”

유서하는 유월천이 말하는 ‘그 녀석’이 진무량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유서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나보시겠어요?”

“그래 보기 싫지만 일단 만나봐야지. 녀석이 궁금해하는 것도 아주 많을 테니 말이야.”

* * *

남궁지가 떠난 후 빈 공터에서 진무량은 처음부터 내공을 다시 쌓아보려 했다.

허나 전혀 소용없는 일이었다.

과거 내공을 쌓기 위해서 익혔던 묵천심법을 통해 호흡을 해보았으나 단전 안에 느껴지는 기운은 아무것도 없었다.

진무량은 가부좌를 풀고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바로 손이 닿는 곳에 놓아둔 창을 쥐었다.

훅!

거대한 창이 공기를 갈랐다.

순간적으로 멈춘 창끝에 빛이 반사되면서 눈부시게 빛났다.

진무량이 다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욱 과격하게 몸을 움직였으나, 창의 흐름은 유려하게 흐르되 멈춤이 없었다.

사박.

그때 어느새 꽤 익숙해진 유서하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웅!

마지막으로 대각선으로 창을 크게 휘두르면서 진무량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유서하의 인기척이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도망 안 간다니…….”

진무량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유서하의 옆에 유월천이 서 있었던 것이다.

유월천의 얼굴을 본 순간, 진무량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인간이었다.

혈마옥에 갇혀서 생을 포기하고자 할 때마다 그 얼굴을 떠올리며 버텨왔다.

반드시 베어야 할 숙적.

자연스럽게 창을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허나 진무량과 달리 유월천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진무량을 바라보면서,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친구에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말을 건넸다.

“잘 있었나?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 벌써 삼 년 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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