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7화 (17/143)

17화. 신념

2017.06.01.

붉은 피가 떨어지는 창을 비껴들고 진무량이 남궁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유서하는 곧바로 금의 연주를 멈췄다.

주변을 스산하게 울리던 그녀의 곡조가 멈추니, 주변이 더욱 적막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두근!

유서하의 연주가 멈추는 순간, 진무량을 뒤덮고 있는 막대한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무량은 일단 남궁지를 제쳐두고, 이번에야말로 내공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파악하기 위해 의식을 몸속으로 돌렸다.

원래대로라면 단전으로 모여야 할 내공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와중에도 내공의 흐름을 읽던 진무량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몸속에서 내공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연주소리에 맞춰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헌데 내공은 단전으로 모이지 않을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흩어져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내공을 일으키려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예전과 똑같았다. 내공은 몸속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숨어버렸고,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다.

“후우.”

진무량이 깊게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그러고는 몸속을 바라보고 있던 의식을 밖으로 돌렸다.

자연스레 시선이 향하게 된 곳에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을 입은 남궁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유서하가 있었다.

다시 남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남궁세가에서 이곳까지 오기 위해 경공술을 펼친 것을 시작으로 꽤나 오랫동안 내공을 사용해서인지, 이번에 찾아온 고통은 유독 더 심했다.

수천 개의 바늘이 마구잡이로 몸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과 같은 통증.

쿵.

진무량이 창을 바닥에 찍고서 그것에 몸을 기대었다

‘제길.’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으나 진무량은 전혀 내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약한 모습을 감춰야했던 상황 속에 살아왔다. 찰나의 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득달같이 검이 날아들었던 인생이었으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는 행위는 사방에 깔린 적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진무량에게 있어 큰 수치였다.

비단 내공을 잃은 지금 순간뿐 아니라, 설령 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라 해도 약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몸을 기대기 위해 짚고 있던 창을 뽑아들고, 진무량은 다시 한 걸음씩 남궁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앞을 유서하가 가로막았다.

“지금 뭘 하시려는 거죠?”

“당연한 걸 왜 물어? 저놈을 죽이려는 거지.”

진무량이 유서하를 지나쳐서 남궁지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허나 그의 앞을 다시 한번 유서하가 가로막았다.

유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돼요.”

진무량은 더 이상 남궁지를 향해 다가가지 않고, 제자리에서서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왜 날 막는 거지? 저놈을 살려둬 봐야 너에게도 좋을 것이 없잖아. 아니, 내가 네 입장이었으면 직접 죽였을 거야.”

꽤나 과격했지만,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비록 중상을 입었으나 남궁지는 아직 의식이 있었기에, 손무엽과 겨루는 모습을 보면서 진무량의 정체를 알게 되어버렸다.

만약 남궁지가 이 사실을 남궁세가에 알린다면 유서하는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무림공적을 숨겨준 셈이 되기 때문이다.

무림공적에 대한 정파인의 분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무림공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죄가 된다.

헌데 무림공적과 함께 행동했다?

무림맹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제아무리 비천검문이라 해도 봉문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비천검문은 신뢰를 잃고 아예 문파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명문 문파라 해도 이 지경이 날 정도이니, 무림공적과 함께 있었던 당사자의 처우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유서하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 행동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도는 알고 있어요.”

진무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자신을 막는단 말인가.

“좋아. 그럼 이놈을 살린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유서하가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진무량은 멸시하는 눈빛으로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허나 그녀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진무량과 맞섰다.

“저에게는 남궁지 소협을 죽이는 일이 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제가 무림에 나서게 된 건 올바른 일에 힘을 써서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예요. 언제나 그 신념대로 행동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남궁지 소협을 죽이는 건 제게 있어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죠.”

“저 녀석에게 너의 그 신념도 통하지 않고, 설득도 안 먹히면 그때는 어쩔 생각이지?”

“당신이 그러지 않았나요? 검을 쥐고 사는 건 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위험한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제게 중요한 건 올바른 일을 하는 것뿐이죠.”

“…….”

유서하의 당당한 태도와 눈빛에서 그녀의 각오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유서하의 행동을 납득할 수는 없었다.

진무량이 뚫어지게 유서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거지?”

“그 말을 반대로 돌려 드리죠. 왜 자신을 위해서 남을 희생시켜야 하는 거죠?”

진무량은 유서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가 자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와 달리 유서하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것은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봤을 때 나타나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스럭. 부스럭.

저 멀리서 점혈이 풀린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가까이 오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남궁지를 죽일 수도 없는 상황.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결과야. 네 선택에 따른 결과로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책임 져.”

* * *

혈월회의 살수, 곡언무는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제기랄, 대체 왜 소식이 없는 거야!”

곡언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무엽의 전서구가 도착해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났다.

천탕산에서 남궁천추를 데리고 있는 동안 남궁헌을 죽이고 연락하기로 했는데, 예정했던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분노에 휩싸인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남궁천추를 찾기 위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인데 아무런 대책이 없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곡언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의 수하 종택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곡언무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손무엽의 연락을 더 기다리다가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그래.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생각해야겠다. 돌발 상황을 대비해서 남궁천추를 챙기고 남은 인원들을 모아 이 근방을 빠져 나간다.”

“알겠습니다.”

곡언무를 비롯한 혈월회의 살수들은 기절한 남궁천추를 데리고 황급히 천탕산을 내려갔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 남궁세가와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기 위해 호북성 방향으로 움직여야 했다.

곡언무는 근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종택에게 물었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면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지?”

“서쪽으로 움직이다 보면 현암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다시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향하면 될 것입니다.”

곡언무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뒤를 따르고 있는 살수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서둘러라! 빨리 이 근방을 벗어나야 한다!”

살수들이 저마다 경공술을 펼치며 더욱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천탕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선두에서 달리던 곡언무의 눈에 푸근한 인상에 노인이 들어왔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유독 도드라지는 인상의 노인이었다.

곡언무는 왠지 모르게 그 노인이 신경 쓰였지만,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라!”

곡언무와 혈월회 살수들은 그 노인을 지나치며 더욱 빠르게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더 산을 내려가다 보니 갈림길이 보였다.

곡언무는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는 종택에게 길을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으악!”

그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고개를 돌렸을 때 바로 눈앞에 있던 것은 방금 보았던 노인의 모습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곡언무는 발까지 헛디디고 말았다.

뒤를 따르던 살수들은 곡언무의 비명을 듣고서야 자신들의 무리에 수상한 노인이 끼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곡언무는 재빨리 노인과 거리를 벌렸다.

“당신은 누, 누구시오?”

앞이 보이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둥글게 휘어진 눈매를 가진 노인이 대답했다.

“흐음……. 그저 평범한 촌부일세.”

너무나 태연스러운 대답.

허나 노인의 정체가 그 대답처럼 평범한 촌부일 리 없었다.

접근하는 기척을 느끼기는커녕,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는데도 노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뒤따르던 자들도 노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자가 평범한 촌부일 리가 없었다.

노인이 곡언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들은 잡스런 살기를 풍기면서 어디를 그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 건가?”

곡언무는 노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뒤에 있는 살수들에게 은밀하게 전음을 보냈다.

ㅡ죽여라.

곡언무의 전음을 알아들은 살수들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단번에 검을 뽑아들고서 노인을 향해 달려갔다.

눈앞에서 검을 치켜든 살수들이 달려오고 있음에도 노인의 반응은 태평했다.

“쯧쯧. 그래도 어른이 물었으면 대답은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쉬익!

노인의 목을 노리고 휘두른 살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노인은 가볍게 검을 흘리면서 거리를 벌렸다. 검을 휘둘렀던 살수는 눈앞에서 상대를 놓쳤다는 사실에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노인이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네는 검을 휘두를 때 어깨의 힘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니까 자세가 무너져 속도가 나오지 않는 게지.”

방금 노인을 공격했던 살수가 재빨리 다시 한번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노인을 향해 검을 뻗었다.

노인이 가볍게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말을 해줬는데도 전혀 고쳐지지가 않는구먼.”

그와 동시에 노인의 신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날아드는 검을 부드럽게 허리를 젖혀 피한 뒤, 상대의 어깨에 일장을 날렸다.

퍼억!

노인에 손바닥에 적중당한 살수는 저 멀리 튕겨나갔다. 노인의 몸놀림은 너무나 가벼워보였으나,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또 다른 살수가 재빨리 노인을 향해 파고들었다.

“성급한 젊은이로구먼.”

혈월회의 살수들 역시 속도로는 꽤나 자신이 있었으나, 노인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도리어 먼저 상대에게 접근한 노인은 다시 한번 일장을 내질렀다.

퍼억!

이번에도 속절없이 살수 하나가 날아갔다.

그 순간 은밀히 따로 움직였던 다른 살수가 이번에는 노인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게다가 비겁하기까지.”

노인이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회전시켰다.

퍼억!

회전하는 힘을 그대로 손바닥에 실어 일장을 날린 노인에게, 뒤를 노렸던 살수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제야 노인이 엄청난 고수임을 깨닫은 살수들은 더 이상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경계를 취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노인은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를 가고 있느냐 물었을 뿐인데, 자네들 반응이 참 거칠…… 음?”

말을 하며 혈월회 살수들을 살피던 노인의 눈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채 묶여있는 남궁천추가 들어왔다.

그 순간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변했다.

노인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내뿜기 시작하자, 방금까지 평범해 보였던 촌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감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한쪽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며 노인이 말했다.

“적당히 상대해주려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군.”

“흐흡!”

곡언무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살행을 해 왔지만, 이 정도로 기세를 내뿜는 상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있긴 있었다.

허나 그건 차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귀혈악인 한 사람뿐이었다.

‘제길, 저 노인은 대체 뭐야!’

눈앞의 노인이 내뿜는 기세는 귀혈악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귀혈악인이 내뿜는 기세에서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살기가 전해져왔다면, 눈앞의 노인에게서는 마치 수천 마리에 맹독을 가진 독사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윽고 노인은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검을 뽑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봐주지 않을 테니 각오들 하시게.”

스릉.

검집을 빠져나오면서 찬란한 검신이 반쯤 드러났을 때, 갑자기 노인이 행동을 멈췄다.

“이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던 건가.”

노인은 반쯤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도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 노인을 봤을 때, 그 평범한 촌부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으, 응?”

곡언무가 의아해하는데 노인이 나직이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처리할 건 처리해 둬야겠지.”

순간적으로 노인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으아아악!”

당황한 그 비명소리의 주인은 남궁천추를 데리고 있던 살수였다. 노인이 그를 단번에 제압하고 남궁천추를 구해낸 것이다.

노인이 남궁천추를 살피는 사이, 곡언무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감히 눈앞에 있는 노인과는 겨룰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할 정도이니, 노인의 경지는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남궁천추를 빼앗긴 것이 뼈아픈 일이기는 했으나, 일단 지금 당장 살고 봐야 했다.

곡언무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흩어져서 후퇴해!”

살수들은 즉시 곡언무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사방에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혈월회 살수들이 있는 곳을 철저하게 포위한 상태였기에, 살수들은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천탕산 정상에 올라갔던 남궁현일과 남궁세가의 고수들은 주변 상황을 보고 혈월회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남궁현일은 그 즉시 혈월회 살수들이 남긴 미세한 흔적들을 쫓았고, 끝내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칭!

날카롭게 검을 뽑는 소리와 함께 남궁현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전원 생포하라! 주모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겠다!”

칭! 칭! 칭!

거칠게 검을 뽑아든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혈월회의 살수들을 덮쳤다.

살수들은 최대한 저항을 했지만, 기습을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상대였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정면으로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제길!”

분한 듯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곡언무를 제압한 것을 끝으로, 혈월회의 살수들 전원이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붙잡혔다.

주변 상황이 정리되자 남궁현일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에는 남궁천추를 구한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궁현일이 의문의 노인을 향해 말했다.

“도움을 줘서 고맙네.”

남궁현일은 그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둘은 같은 시대에 함께 활약하면서 깊은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노인의 정체는 검선이라 불리는 유월천이었다.

“내 도움이 없었어도 크게 곤란을 겪지는 않았을 것 같던데?”

유월천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남궁현일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헌데 이곳까지는 어쩐 일인가? 혹시 서하를 만나러 온 건가?”

남궁현일의 입에서 뜻밖에 유서하가 언급되자 유월천은 순간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다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떠도는 소문을 듣고, 서하와 길이 어긋난 듯해서 자네를 찾아가는 중이었네. 헌데 남궁세가에 있었나 보군.”

남궁현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월천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가 남궁현일을 향해 물었다.

“혹시 서하가 누구랑 같이 있었는지 기억하는가?”

“서하와 호위무사 두 명이 전부였네."

유월천이 나지막이 웃었다.

“흐음. 호위무사가 두 명이라…….”

서서히 휘어진 유월천의 눈꺼풀이 올라가면서 선명한 두 개의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럼 곧 만날 수 있겠군.”

말을 마치면서 유월천이 옅은 투기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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