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조우
2017.05.21.
남궁지는 밤늦게까지 남궁세가의 업무를 돌보고 나서야 자신의 처소로 향할 수 있었다.
지친 걸음으로 침상에 다가가 몸을 기대려는 순간, 밖에서 긴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다!”
“쫓아라!”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서둘러 검을 챙긴 남궁지는, 황급히 밖으로 향했다.
덜컹!
문을 열고 처소 밖으로 나간 남궁지의 눈에 비친 남궁세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을 연상케 했다.
사방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고, 세가의 무인들조차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지는 당장 튀어나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려던 충동을 참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침착해야 한다.’
그는 일단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세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자세히 살폈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함부로 지휘를 내리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되는 법.
잘못된 명령으로 움직이다보면 더 큰 혼란을 초래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아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까지 흘러가기 마련이다.
“…….”
가만히 상황을 살피던 남궁지는 의아한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방에서 불길이 일고 있으나, 세가를 침입한 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어느 한곳에서 큰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적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요란스러워.’
세가를 침입한 자들의 정체나 목적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통해 확실한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적은 우리가 당황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궁지가 내공을 실어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장 적과 마주하고 있지 않은 세가의 무인들은 모두 내게로 모이라!”
남궁지는 목소리에 내공을 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목소리가 세가 전체에까지 뻗치지는 못했으나, 그 주변을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남궁지의 목소리를 들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검혼관주(劍魂官主) 이상백, 도련님을 뵙습니다.”
“소수철검(素手鐵劍) 노각, 도련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소청검(素靑劍) 문일기, 명을 받들겠습니다.”
남궁지의 앞에 나선 이상백, 노각, 문일기의 뒤에도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숫자만 합치더라도 대략 오십.
남궁지는 자신의 앞에 모인 무인들과 함께 남궁세가의 혼란을 잠재울 작전을 빠르게 모색했다.
잠깐의 생각을 마친 남궁지가 호기롭게 외쳤다.
“겁을 상실한 놈들이 지금 남궁세가에 침입해 있다. 허나 전혀 당황할 필요 없다. 모두 침착하게 내 명령을 듣고 행동으로 실천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남궁지의 침착한 반응이 주위에 퍼져 나갔다. 모여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점차 머릿속에서 다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또렷한 이성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남궁지의 지휘가 시작되었다.
“검혼관주 이상백. 그대는 좌측에서부터 열 명을 이끌고, 적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오로지 불을 끄는 것에만 집중하라!”
“존명!”
남궁지의 시선이 노각을 향했다.
“소수철검 노각. 그대는 우측에서부터 스무 명을 이끌고, 무인이 아닌 자들을 보호하고 대피시킨다. 적과 마주친다면 그때는 구출을 우선으로 하도록 하라!”
“존명!”
마지막으로 남은 문일기에게 남궁지가 말했다.
“소청검 문일기. 그대는 남은 이들을 모두 이끌고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철저하게 섬멸하라!”
“존명!”
남궁지가 주변에 모인 세가의 무인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적은 우리를 혼란시키려 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힘없는 자의 구출을 가장 우선으로 하라.”
오십 명의 남궁세가 무인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존명!”
임무를 위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궁지가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힘차게 외쳤다.
“자 그럼 남궁세가의 용맹함을 적들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오라!”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혼자 남은 남궁지는 남궁세가의 내부를 전체적으로 돌아보면서 사람들을 진정시킬 생각이었다.
그때 문득,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못한 채 의방에 남아있는 남궁헌이 떠올랐다.
“먼저 의방 쪽으로 가봐야겠군.”
* * *
손무엽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의방 지붕에 있는 진무량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한걸음에 다가가 건방진 말을 내뱉는 상대의 머리통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허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뭐지?’
진무량에게서 압도적인 기세나 패기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에게선 한 줌의 기운조차 느낄 수 없었다.
허나 손무엽의 감각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저 사내는 위험하다고.
손무엽은 다른 그 무엇보다 자신의 감각을 신뢰했다.
지금까지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가장 큰 힘이 바로 그 감각이었으니까.
손무엽이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너 정체가 뭐냐?”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군. 지금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시간 없을 텐데.”
“…….”
“말했다시피, 금을 든 여인만 건들지 않는다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방해할 생각 없어. 난 그저 시끄럽게 날뛰는 놈들이 귀찮아서 여기 있는 것뿐이거든.”
손무엽이 의문을 던졌다.
“그들이 이곳으로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소란을 피우는 이유는 결국 남궁세가의 주의를 끌기 위한 속임수. 진짜 의도는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남궁헌을 죽이는 거겠지.”
“…….”
“그렇다면 과연, 목표로 하는 남궁헌이 있는 곳에서 소란을 피울까? 아니면 은밀히 남궁헌을 처리하고 남궁세가를 빠져나갈까?”
진무량은 남궁세가를 쳐들어온 이들을 보자마자 혈월회라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리고 혈월회의 목표가 남궁헌이라는 것까지도.
혈월회의 목적이 남궁세가 자체일 수는 없었다.
만약 이들이 정말 남궁세가를 몰락시킬 생각으로 움직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흔적을 놓칠 정도로 남궁세가는 무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가정은, 그들이 저번에 한 번 실패했던 남궁헌의 암살뿐이었다.
허나 진무량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손무엽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내가 남궁헌을 노리는 걸 저놈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손무엽은 답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 시급한 것은 진무량의 말대로 남궁헌을 죽이는 것.
그렇다면 쓸데없이 언쟁을 벌이기보다 먼저 그 목적을 이뤄야 했다.
게다가 진무량의 말은 남궁헌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손무엽은 신경 쓰이는 진무량을 무시한 채 의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허나 손무엽의 걸음은 불과 몇 발자국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남궁지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남궁지가 급히 제자리에 멈춰서며 낭랑한 목소리로 손무엽을 향해 외쳤다.
“그대는 누구인가!”
손무엽의 행색은 그동안 남궁세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남궁지의 목소리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손무엽은 더 이상 방해꾼이 끼어들기 전에 남궁헌을 죽일 작정으로 의방을 향해 다가갔다.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궁지는 그가 세가를 침범한 자들의 일행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챙!
단숨에 검을 뽑아든 남궁지가 등을 돌린 손무엽을 향해 달려갔다.
높이 검을 치켜든 남궁지를 보며 손무엽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쯧, 귀찮게 구는구나!”
쉬익!
사선으로 그어지는 남궁지의 검을 손무엽이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이어서 남궁지의 복부를 향해 날아드는 손무엽의 일권.
허나 남궁지도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남궁지는 출수했던 검을 끌어당기며 단거리에서 날아드는 손무엽의 주먹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쩌정!
주먹과 검이 격돌했고, 두 사람의 신형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남궁지가 손무엽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했다.
‘고수다.’
아직도 손무엽의 주먹과 부딪쳤던 검이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검 손잡이를 더욱 세게 움켜잡으며 남궁지가 외쳤다.
“나의 이름은 남궁지! 그대의 이름을 밝히시오!”
“…….”
손무엽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릴 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지금의 상황을 여유롭게 즐겼겠지만, 지금은 적지 한가운데 있는 처지였다.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애초에 목표했던 바인 남궁헌을 처리하고 빠르게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했다.
허나 눈앞에 있는 남궁지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 번 주먹을 맞댄 것뿐이지만, 저번에 겨뤘던 남궁천추와는 수준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손무엽은 남궁지를 제압할 방법으로 선택한 무공은 사자후였다.
외견상으로 보이는 남궁지의 나이가 꽤나 어려 보였기 때문에, 그의 내공이 깊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검문에서처럼 내공을 조절하면 소리 또한 멀리 퍼지지 않으니,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흐으으읍.”
손무엽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목소리에 내공을 싣고 사자후를 내뱉었다.
“네 이노오오옴―!”
드르르르르.
손무엽의 사자후가 울려 퍼지면서 주변 건물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크으윽!”
남궁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손무엽이 내뱉는 사자후는 남궁지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남궁지의 내공이 또래의 무인들의 비해 모자란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손무엽의 사자후를 받아내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남궁지는 본능적으로 귀를 막았으나 온몸이 손무엽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손무엽의 사자후가 이어졌다.
“너 같은 하찮은 버러지 따위가―!”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건 지붕 위에 있는 진무량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내공을 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손무엽의 사자후를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손무엽은 마지막 일갈을 준비하면서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감히……!”
디리리리링―!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손무엽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대신 너무나 아름다운 금의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의방 저쪽, 손무엽으로부터 삼십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유서하의 손끝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칠현금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우아한 자태로 현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하얀 달빛이 비추니 그녀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만하시죠. 너무 시끄럽네요.”
금의 연주를 멈추며 유서하가 말했다.
손무엽은 자신의 사자후를 저지한 것이 어린 여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얼떨떨한 목소리로 묻는 손무엽을 향해 유서하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음공만은 제가 한 수 위인 것이지요.”
그녀의 말은 손무엽의 사자후를 멈춘 것으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무공 자체를 비교한다면 유서하보다 손무엽이 더 뛰어날 것이다.
허나 사자후는 결국 소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무공. 음공의 대한 조예만 본다면, 유서하와 손무엽 사이에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었다.
곧이어 유서하의 옆에서 견무겸도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유서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유서하와 견무겸은 남궁세가의 침입한 자들과 겨루는 과정에서 그들의 몸에 있는 자문을 발견했고, 곧 그들이 혈월회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유서하 역시 혈월회가 남궁헌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진무량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남궁헌을 구하기 위해 의방을 향해 움직였다.
다만 의방으로 오는 도중에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을 구하느라 조금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견무겸은 구출한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오는 길이었다.
유서하는 손무엽을 제외하고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는지부터 살폈다.
수상하게 느껴지는 인기척은 단 하나.
유서하의 시선이 의방에 지붕 위를 향했다.
“여어.”
지붕 위에 있던 진무량이 유서하와 눈을 마주치자 아는 척을 했다.
“아니……?”
당황한 유서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진무량이 남궁세가의 의방 지붕 위에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혈월회가 남궁세가에 침입했을 때부터 진무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를 찾으러 다녔으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기에, 막연히 어딘가 숨어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 뒤에는 혈월회 살수들과의 전투에다 힘없는 사람들의 구출까지 이어지면서 그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의방 지붕에 있는 진무량을 향해 유서하가 말했다.
“……대체 왜 거기서 나타나는 거예요?”
“설명하려면 길어질 것 같은데.”
진무량의 뻔뻔한 모습을 마주하게 되니 유서하는 순간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와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남궁세가에 있는 동안 조심해서 행동해달라는 것이었는데…….
한숨을 내쉬며 유서하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틈만 나면 사라지니, 묶어놓기라도 해야겠네요.”
“아마 묶어놔도 어떻게든 사라질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