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기습
2017.05.18.
유서하와 견무겸, 두 사람은 남궁세가를 빠져나와 백검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유서하는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견무겸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직 화살에 맞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서 조금 더 쉬어야 한다고 설득했으나, 견무겸은 듣지 않았다.
견무겸으로서는 유서하 혼자 위험한 곳에 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근래 혈월회를 조우하는 등 위험한 일을 꽤나 많이 겪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물론,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진무량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한참을 달린 유서하와 견무겸은 남궁세가의 무인들보다 한발 먼저 백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검문에 들어서기 전,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것을 느꼈다.
피 냄새.
굳이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올리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백검문 주변에는 비릿한 혈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유서하는 주변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백검문에 대문을 통과했다.
백검문 내부를 확인한 순간, 유서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검문의 내부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피의 비가 내린 것마냥 사방이 온통 붉게 물들고, 몸이 조각난 시체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유서하의 시선이 부러진 검 옆에 쓰러진 시신에 닿았다.
아직 눈을 감지 못한 시신은 뭐가 그리 두려운지 경악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단 그 시신뿐만 아니었다.
모든 시신들이 하나같이 질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유서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시신을 하나씩 살피다 보니, 백검문의 무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가 희미하게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다.
먼저 시신들의 상처가 모두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런 끔찍한 혈겁을 일으킨 건 한 사람의 소행임이 틀림없었다.
백검문의 무인들은 이곳을 몰살시킨 의문의 인물과 격렬한 혈전을 펼쳤을 것이다.
유서하의 시선이 유독 시신이 많이 쌓여있는 곳을 향했다.
허나 백검문의 무인들의 힘으로 그 상대를 막기에는 역부족.
유서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등에 손바닥 자국이 깊이 새겨진 시신이 보였다.
백검문의 고수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가고, 점점 수세로 몰리다보니 몇몇 이들은 겁에 질려 도망친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도망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나 검을 쥐고 사는 강호인이라면 더욱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쳤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자존심까지 굽히고, 살고자하는 본능에 이끌려 백검문의 무인들은 도망쳤을 것이다. 헌데…… 혈겁을 일으킨 장본인은 그런 자들마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죽인 것이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누구나 인간은 하나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것이 가지는 무게는 똑같은 법.
유서하는 시체가 되어버린 백검문 무인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주변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바라봤다.
부르르.
유서하는 의식하지 못한 새에 말아 쥔 양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그녀를 견무겸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가씨…….”
오랜 기간 함께 행동하면서, 그녀가 정이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녀가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쿨럭!”
그때 무너진 건물들에 잔재 속에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유서하는 지체 없이 기침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얼핏 봐도 끔찍한 중상을 입은 모습의 사내가 있었다.
온몸에 수없이 많은 찰과상이 있었고, 얼굴은 코가 함몰되어 그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게다가 두 눈마저 멀어버린 듯 그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궁천추의 부관인 부엽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부엽이 죽을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이, 이보시오. 거기…… 사람이 있소?”
유서하는 부엽 주변에 있는 무너진 건물의 잔재들을 치우며 대답했다.
“상처가 벌어질 수 있으니 말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의원에게 데려가 줄게요.”
유서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부엽의 몸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부엽의 몸에서는 피와 더불어 끈적한 진물들이 흘러내려 유서하의 몸에 묻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잠시 주춤거릴 만도 하건만, 유서하는 그런 일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부엽은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지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나, 남궁세세가로 좀 데려가주시오…….”
유서하는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부엽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알겠어요. 금방 데려가줄 테니 조금만 참아요!”
파밧!
유서하는 부엽을 둘러메고 힘껏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내 그녀는 가장 빠른 경공, 유성비보를 밟으며 남궁세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 남궁세가의 현판이 보이자, 부엽의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유서하가 말을 걸었다.
“남궁세가의 의방으로 가고 있어요. 조금만 참아요.”
부엽은 그 말을 듣고 반쯤 잃어버렸던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목을 흔들며 신음하듯 말했다.
“필요 없소……! 가주님, 제발 가주님이 있는 곳으로…….”
유서하는 갑자기 부엽이 움직이다가 상처가 벌어질 것을 염려해 큰소리로 외쳤다.
“알았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부엽을 부축하고 있는 유서하와 견무겸은 곧 남궁세가의 대문에 도착했다.
유서하는 나란히 달리고 있던 견무겸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견무겸은 그녀의 눈짓으로 전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남궁현일을 부르기 위해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의방에 도착한 유서하는 가장 먼저 부엽을 침상 위에 눕혔다.
부엽의 몸 상태를 살피며 유서하가 말했다.
“지금 왕삼 노야가 필요한 것을 챙겨서 오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요.”
부엽이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 가주님을……!”
덜컹!
그때 의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부엽이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하던 남궁현일이 나타났다.
부엽의 모습을 확인한 남궁현일이 거칠게 외쳤다.
“이게 어찌된 것이냐?”
남궁현일은 견무겸에게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한걸음에 의방으로 달려왔다.
세가의 장로들과 가신들 역시 그를 따라 의방에 도착했다.
부엽은 남궁현일의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천추 도련님께서 철전패왕 손무엽…… 그놈에게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허억. 허억.”
한차례 거친 숨을 몰아쉰 부엽이 어렵사리 다시 말을 이었다.
“백검문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조사하다가 그만……. 쿨럭!”
순간 남궁현일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필사적으로 뭔가 더 전할 것이 있어 보이는 부엽의 말을 듣기 위해서 침묵을 지켰다.
부엽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추 도련님을 찾고 싶으면 내일 해가 지기 전까지 천탕산의 정상으로 찾아오라고…….”
부엽은 차마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남궁현일이 부엽의 손을 잡으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다. 내 분명히 너에게 전해 들었다.”
그때 왕삼과 네댓 명의 의원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왕삼은 부엽을 향해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부엽의 상처를 열중해서 살피던 왕삼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유서하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빨리 치료를…….”
왕삼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남궁세가의 장로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으나, 그 누구도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고요해진 장내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남궁현일이 입을 열었다.
“수고 많았다. 내 절대 너의 충의를 잊지 않으마.”
부엽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욱 주면서 침통한 목소리로 남궁현일이 말을 이었다.
“남겨진 네 처자식 또한, 내 책임지고 평생토록 돌보겠다.”
부엽의 입가에 아주 조그만 웃음이 만들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마음 편히…….”
그 말을 끝으로 부엽은 숨을 거두었다.
남궁현일은 부엽이 숨이 끊어지고 난 뒤로도 한참동안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슬픔을 곱씹던 남궁현일이 부엽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가의 무인들을 집결시켜라.”
남궁현일이 분개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외쳤다.
“내 직접 천탕산을 찾아가, 이런 만행을 저지른 손무엽에게 혹독한 죗값을 치르게 해주리라!”
* * *
남궁현일은 세가 내에 있는 무인들 중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고수들과 뛰어난 무인들을 모두 집결시켰다.
남궁세가 전체 중에서 칠 할이 넘는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니 그 기세가 실로 엄청났다.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남궁현일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를 잘 나타내주는 모습이었다.
연무장의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남궁현일의 맏이, 남궁지였다.
남궁현일의 앞에 선 남궁지가 예를 올렸다.
남궁현일이 진중한 어조로 남궁지를 향해 물었다.
“내 너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남궁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남궁현일의 뜻을 예측할 수 있었다.
부엽은 남궁천추를 납치한 손무엽이 천탕산에 있다고 말했다.
보통사람의 걸음걸이로 따진다면 남궁세가에서 천탕산으로까지의 거리는 나흘. 허나 남궁현일과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전속력으로 움직인다면 하루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허나 그 시간 동안 남궁현일은 세가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동안 남궁세가를 통솔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남궁지가 말했다.
“세가의 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 아버님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듬직한 남궁지의 모습을 보자 남궁현일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내가 마음 편히 세가를 떠날 수 있는 것은, 듬직한 네가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세가의 변고가 생기면 즉시 전서구를 통해 연락하거라.”
“알겠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걱정 말거라. 감히 겁도 없이 남궁세가에 검을 들이댄 놈들을 모조리 응징하고, 천추를 되찾아올 것이다.”
* * *
남궁현일을 필두로, 남궁세가의 고수들이 천탕산으로 향했다. 수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남궁세가의 정문을 빠져나가다 보니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유서하와 견무겸, 그리고 진무량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멀어져간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는 유서하의 눈빛에는 깊은 근심이 서려 있었다.
유서하가 견무겸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겠지?”
눈앞에서 수많은 백검문의 무인들이 희생된 것을 보았고,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진심으로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헌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 상태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니 마음 한구석이 개운하지 못했던 것이다.
견무겸이 대답했다.
“남궁세가에서 본격적으로 나선 일입니다. 외부인인 저희가 참견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입니다.”
유서하도 견무겸의 의견에 동의했다.
만약 남궁세가가 조금이라도 곤란을 겪는 부분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허나 남궁세가는 이번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헤쳐 나가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이 나서는 건 방해가 될 확률이 더 컸다.
분명 머리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 허나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견무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정도 고수들이 움직인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
무거운 분위기 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무량이 입을 열었다.
“별일도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유난떨 필요가 있나?”
너무도 태연한 진무량의 반응이 견무겸의 심기를 건드렸다.
“별일도 아니라니? 너무 쉽게 말하는군.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아무리 마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슬픔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지 않은가.”
“검을 쥐고 산다는 건 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과 다름없어. 즉, 갑자기 죽는다고 해도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란 거지.”
태연한 어조로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건 늘 있는 일이잖아.”
견무겸이 말을 잇기 전에, 유서하가 먼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일이죠.”
“잘못된 일이면 뭐가 다르지? 결국 그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을.”
냉정한 진무량의 모습과 반대로 유서하는 평소와 달리 격앙되어 있는 상태였다.
유서하가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당신은 언제든 백검문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혈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나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유서하를 바라보며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난 백검문뿐만 아니라 안휘에 존재하는 모든 문파들을 박살낼 거야.”
“…….”
유서하는 진무량의 생각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저런 태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허나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진무량에게 억지로 설득하거나, 강요할 생각 또한 없었다.
유서하는 진무량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며, 자신도 모르게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서하가 말했다.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더 이상 언쟁은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그런 것 같군.”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 본래는 아침 일찍 현암사로 출발하려 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까지는 남궁세가에 머물 생각이에요. 부디 그동안 조심히 행동해주세요.”
* * *
그날 밤.
달빛이 구름에 삼켜진 듯 온 세상이 어두웠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그 무렵, 남궁세가 근처 후미진 뒷골목에 손무엽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무엽은 팔짱을 낀 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스슥.
그때 미세한 인기척소리와 함께 혈월회 살수 두 명이 순차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발 먼저 도착한 살수가 손무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남궁현일과 그를 따르는 남궁세가 무인들이 천탕산 인근까지 도착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손무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살수가 손무엽에게 보고를 올렸다.
“혈월회 전 인원,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은밀히 포위를 마쳤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즉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좋아. 준비는 끝났군.”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손무엽이 말을 이었다.
“남궁현일과 대부분의 고수들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상대는 남궁세가이다. 충분히 주의를 기우려 행동해야 할 것이다.”
손무엽이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본격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우선 남궁세가에 침입하면 흩어져서 사방에 불을 지른다. 만약 그 과정에서 남궁세가의 고수와 마주하게 되면 즉시 도망쳐라. 위기 시에는 무인이 아닌 자를 공격하고, 아이나 여인은 발견하는 즉시 사로잡아 방패막이로 삼아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번 임무의 핵심은, 저들에게 혼란을 주어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내 근처에 몰려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 주변에 머물면서 남궁세가 놈들은 물론, 살수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손무엽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신호를 보내라.”
* * *
삐이이이익―!
적막함이 내려앉은 어둠속에서 귀를 찢을 듯한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궁세가의 외곽을 지키던 무인들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혈월회의 살수들이 남궁세가의 담벼락을 타고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기습이다!”
“침입자가 있다!”
경비를 서고 있는 남궁세가 무인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들은 재빨리 세가 내부로 침입한 살수들의 뒤를 쫓았다.
허나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살수들뿐만 아니었다.
화르르륵!
갑자기 사방에서 불길이 일더니, 점점 하나로 합쳐지면서 점차 그 기세가 맹렬하게 커져갔다.
삽시간에 남궁세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사방에서 침입한 혈월회의 살수들은 일부러 도망치면서 더욱 소란을 유도했고, 그 사이 불길은 점점 커져만 갔다.
꿋꿋이 남궁세가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손무엽은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꼈다.
혼란이 심화되다 보면 제아무리 남궁세가라고 해도 대처하는 반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탓, 파박!
손무엽은 남궁세가의 담벼락에 오름과 동시에, 다시 한번 그곳을 밟고 공중으로 신형을 띄웠다.
하늘 높이 떠오른 상태로 남궁세가를 내려다보며 구조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목적은 남궁헌이 있을 만한 곳을 찾는 것.
아무래도 중상을 입었다고 하니, 있을 만한 곳은 한정적이었다.
넓게 펼쳐진 남궁세가 내부에서 손무엽의 눈에 들어온 곳은 두 군데였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가장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장소.
그곳은 아마도 남궁세가의 직계가솔들이 기거하는 곳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손무엽의 시선이 지붕에 약재가 주렁주렁 달린 건물을 향했다.
‘의방.’
부상자가 머무르고 있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중 하나였다.
손무엽은 망설임 없이 의방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비가 약한 곳부터 찾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의방을 확인하고 손무엽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우드득.
양손을 모아 한차례 뼈마디를 부딪친 뒤, 손무엽이 천천히 의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음?’
손무엽의 감각이 수상한 인기척을 감지했다.
그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의방에 지붕.
손무엽이 걸음을 멈추며 의방에 지붕을 향해 외쳤다.
“누구냐?”
지붕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쳇, 들킨 건가.”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진무량이었다.
“역시 숨어있는 건 내 적성에 안 맞아.”
손무엽이 눈살을 찌푸리며 지붕 위의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 네가 하려던 일이나 마저 하도록 해.”
손무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건방진 놈이군.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지껄이는 건가?”
귀찮은 어조로 진무량이 대답했다.
“네가 누군지, 여기서 뭘 하든지 아무런 관심도 없어. 그러니까…….”
진무량은 갑자기 하던 말을 뚝 끊었다.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답답함을 느낀 손무엽이 거칠게 외쳤다.
“뭐라고 지껄이는 게냐?”
진무량이 대답했다.
“네가 무슨 짓을 하건 관심이 없을 수는 없겠군. 금을 들고 있는 여자만은 건들지 마라.”
손무엽이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진무량이 말을 이었다.
“건들면 넌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