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함정
2017.05.14.
남궁세가의 이공자, 남궁천추는 근처에서 가장 큰 객잔을 통째로 빌려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일단 세가 밖으로 나오면 딱히 잔소리할 사람도 없고, 참견하는 이도 없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극락이나 다를 게 없었다.
남궁천추는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유서하와의 일이 떠올랐다.
‘그깟 호위무사 좀 건드린 것 가지고.’
남궁천추가 거칠게 술잔을 들어 올려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도저히 유서하의 쌀쌀맞은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깟 호위무사 따위야 얼마든지 바꾸면 그만이다.
헌데 고작 그따위 천한 놈을 감싸고, 감히 명문세가의 자제인 자신에게 그런 면박을 주다니!
남궁천추는 돌이켜 생각해봐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식식거리던 그는 아예 술병째로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도련님.”
남궁천추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부관 부엽(副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서 소문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서 세가에 보고를 올리셔야 합니다.”
쾅!
남궁천추는 술병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 일은 너희들에게 시키지 않았느냐! 아직도 다 끝내지 못했단 말이냐!”
부엽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남궁천추의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남궁세가에서 이곳으로 파견된 무인들은 지금도 이 일대를 전부 뒤지면서 소문의 진상을 찾아내려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다.
헌데 정작 총책임을 맡은 자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 가는 인물에 대한 보고가 끝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 중 조사해야 할 상대와 관계없는 자를 가려내서 수색 범위를 좁혀 나가야 하는데, 책임자인 남궁천추는 그럴 기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엽은 가슴에 돌멩이가 얹힌 것 같이 답답했다.
남궁천추가 이처럼 술만 마시고 있다면 수하들의 고생이 몇 배로 늘어날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무슨 말을 해도 남궁천추는 전혀 듣질 않으니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걱정이로구나.’
부엽의 시름이 깊어가는데, 객잔의 문을 열고 남궁세가 무인이 급하게 들어왔다.
덜컹.
급박하게 들어온 남궁세가의 무인이 술병에 둘러싸여 있는 남궁천추를 향해 예를 갖췄다.
“도련님, 급한 소식입니다.”
남궁천추는 누가 들어오건 말건 술병에서 입을 뗄 줄 몰랐다.
부엽은 씁쓸함이 묻어나는 말투로 방금 방을 들어온 남궁세가의 무인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이냐?”
남궁세가 무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몇 대원들이 정보를 모으기 위해 백검문을 찾았습니다. 헌데…….”
“어서 말해보아라.”
답답함을 느낀 부엽이 재촉하자, 남궁세가 무인이 주저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백검문 내부에는 시체들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확인해본 바로는 백검문의 문주를 포함한 문도들 전원이…….”
부엽은 방금 들은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전멸했단 말이냐?”
남궁세가의 무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고개를 더욱 숙이며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부엽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황급히 대처할 방안을 모색했다.
“……너는 지금 즉시 세가에 이 상황을 알려라.”
부엽은 이 사실을 세가에 알리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곳에 와 있는 무인들을 모두 모아서, 혹시나 위험이 있을지 모를 백검문을 조사할 생각이었다.
“그만…… 그만두어라!”
남궁천추가 부엽을 향해 발악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부엽은 남궁천추의 행동을 보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남궁천추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부엽에게 보고를 올리던 남궁세가의 무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이놈! 총 책임자가 이 몸이거늘 어찌 나의 명령을 듣지 않고 움직이려는 것이냐!”
한쪽 구석에 팽개쳐둔 검을 잡아채며 남궁천추가 외쳤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백검문을 공격한 놈이 멀리 도망치기 전에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
불길한 예감은 역시 틀리는 법이 없다고 하던가.
부엽이 서둘러 남궁천추를 말렸다.
“너무 위험합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몇 명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단 세가에…….”
“닥쳐라!”
남궁천추는 비틀거리며 부엽에게 다가가더니, 그를 향해 이마를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
“명문 문파도 아닌 백검문 따위나 건드리는 놈에게 내가 질 것 같으냐! 네놈이 나를 무시하니까 아랫놈들도 그러는 것이 아니더냐!”
남궁천추는 한바탕 고성을 지르고도 분이 삭지 않는 듯 한참을 식식거렸다.
이내 남궁천추는 남궁세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을 운용해 몸 안에 취기를 몰아냈다.
남궁천추가 보고를 올리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을 불렀다.
“너는 지금 즉시 백검문으로 앞장서라.”
부엽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애절한 목소리로 남궁천추를 말렸다.
“적어도 세가에 이 사실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놈이 도망치기 전에 잡는 것이 우선이다. 한시라도 빨리 백검문으로 가서 그 흉악한 놈을 잡은 뒤, 내 직접 세가에 보고를 올릴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남궁세가의 무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궁천추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무얼 하고 있는 게야!”
“죄송합니다. 즉시 백검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남궁세가의 무인과 남궁천추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부엽은 마지못해 남궁천추의 뒤를 따랐다.
그는 문득 창궁대연신공을 운용해 술을 깬 남궁천추의 현재 모습이, 조금 전 술에 취했을 때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궁천추 일행은 축시(새벽2시) 무렵이 되서야 백검문에 도착했다.
그들이 백검문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백검문 안에서 미세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남궁천추는 미세한 인기척을 감지하고 조심스럽게 백검문을 향해 접근했다.
그때 안에서 급박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도망쳐라!”
남궁천추는 자신들의 접근이 적들에게 발각된 것을 눈치채고 검을 뽑아들었다.
“놈들을 잡아라!”
남궁천추가 호기롭게 외치며 달려 나갔다.
그는 도망치는 적을 잡기 위해 단숨에 지붕으로 뛰어올라 천풍신법(天風身法)을 펼쳤다.
얼마 안 가 남궁천추는 복면을 쓴 일련의 무리를 발견했다. 몸에 초승달 자문을 새긴 혈월회의 살수들이었다.
달빛도 빛을 잃은 한밤중에 지붕 위를 넘나드는 추격전이 펼쳐졌다.
혈월회 살수들의 경공술도 빠른 편이었지만, 남궁천추의 속도가 한 수 위였다.
순식간에 혈월회 살수에게 근접한 남궁천추가 외쳤다.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외침과 동시에 휘둘러지는 남궁천추의 검.
허나 그는 끝까지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좌측방향에서 날아온 연월표 때문이었다.
캉!
남궁천추는 재빨리 검로를 바꿔 연월표를 튕겨냈다.
상대를 베어버릴 절호의 기회를 놓친 남궁천추가 분한 듯이 외쳤다.
“이런 비겁한 짓을 하다니!”
혈월회의 살수들은 남궁천추를 철저히 무시한 채, 계속해서 그와의 거리를 벌려갔다.
남궁천추가 이를 갈았다.
“내 너희를 반드시 붙잡으리라!”
남궁천추가 다시 복면인을 쫓으려 할 때, 뒤쪽에서 다가온 부엽이 서둘러 그를 말렸다.
“도련님, 조심하셔야 됩니다. 적의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남궁천추는 순간적으로 멈칫했지만, 계속해서 멀어지는 복면인을 바라보며 검을 힘껏 쥐었다.
“어찌 눈앞에 있는 적을 두고 돌아갈 수 있단 말이냐.”
남궁천추는 다시 혈월회 살수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남궁천추는 어느새 시내를 벗어나 주변이 휑한 공터에 도착했다.
모든 힘을 다해 내달리던 혈월회의 살수들은 갑작스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혈월회 살수들과 남궁천추 사이로,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철전패왕 손무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누구냐!”
호기롭게 외치는 남궁천추에게 손무엽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궁천추는 갑작스레 나타난 손무엽을 단순한 복면인의 동료쯤으로 여겼다.
‘적이라면 제압할 뿐!’
다짜고짜 손무엽에게 접근한 남궁천추가 상대를 제압할 요량으로 검을 휘둘렀다.
스윽.
손무엽은 남궁천추의 검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남궁천추와의 거리를 스스로 좁히며, 날아드는 검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남궁천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놈, 날아드는 검을 향해 주먹을 들이밀다니!’
쩌정!
검과 주먹의 부딪힘.
당연히 주먹이 베어질 것 같았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우어억!”
깊은 신음과 함께 남궁천추의 신형이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남궁천추의 수준으로는 내기를 두른 손무엽의 주먹을 베어내기는커녕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팍!
튕겨져 나가는 남궁천추의 몸을 간신히 부엽이 받아냈다.
“으으.”
미세한 신음을 흘리는 남궁천추를 향해 부엽이 다급하게 말했다.
“도련님!”
부엽과 남궁천추가 엉겨진 모습을 보며 손무엽이 한심함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검에서 예리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굳이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손무엽은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혈월회가 놓친 남궁헌을 죽이고 잃어버린 서찰의 존재를 없애는 것이었다.
손무엽은 가장 먼저 남궁헌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내 남궁헌이 중상을 입고 남궁세가에 혼절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그를 빼돌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움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남궁헌이 남궁세가 내부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손무엽이라고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남궁세가에게 정면으로 부딪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남궁세가의 전력을 분산시킬 방법을 모색했고, 그 결과가 바로 백검문의 몰살이었다.
그런 변고가 일어나면 인근에 위치한 남궁세가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해올 터, 손무엽이 생각한 최고의 경우는 백검문의 몰살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남궁세가의 요인을 납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요인을 인질로 삼아 남궁세가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그 사이 비어있는 남궁세가로 침입해 남궁헌을 사로잡는 것까지가 손무엽이 생각해낸 계책이었다.
다만 한 가지, 손무엽의 예측을 벗어난 것이 있다면 남궁세가를 유인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의 납치계획이었다.
남궁세가에 주된 요인이라면 쉽게 납치하기 어려울 것이라 여겨, 공을 들여 유인할 방법을 만들었다.
허나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손무엽은 경멸하는 눈길로 남궁천추를 바라보았다.
‘저딴 버러지인 줄 알았다면, 굳이 고생하지 않고 처음부터 백검문에서 사로잡았으면 됐을 것을.’
그때 남궁천추를 유인해 온 혈월회의 살수가 손무엽을 향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모파기와 행색으로 보아 남궁세가의 이공자 남궁천추가 틀림없습니다.”
순간 손무엽이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손무엽이 큰소리를 내지르며 웃어젖혔다.
“푸하하하하! 이런 버러지가 남궁현일의 아들이라고? 호랑이가 개도 아닌 쥐새끼를 낳은 격이구나!”
모욕적인 손무엽의 언사를 참지 못하고 남궁천추가 식식거리며 쓰러졌던 몸을 일으켰다.
“요행으로 한 번 나의 검을 튕겨냈다고 기고만장하는 게냐?”
남궁천추가 손무엽을 향해 검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진짜 실력을 보여줄 테니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남궁천추가 손무엽을 향해 뛰어들었다.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자, 남궁천추가 본격적으로 남궁세가의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쉬익! 쉬이이익!
남궁천추의 검이 그리는 궤도는 전혀 막힘이 없어 보였다.
허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남궁세가에서도 손꼽히는 대연검법(大衍劍法)을 펼치기에는, 그의 기량이 한참이나 모자랐다.
당연히 남궁천추의 검은 손무엽에게 닿지 못했다.
남궁천추의 검을 피하거나, 가볍게 손끝으로 흘리던 손무엽이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의 검법을 흉내나 내는 수준이구나. 무엇 하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저 배운 것만 따라하기 바쁘니 그 꼴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순식간에 손무엽의 움직임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콰득.
손무엽은 날아드는 남궁천추의 검을 한 손으로 검을 붙잡아버렸다.
검이 오는 방향부터 시작해서 힘과 속도, 그 모든 것을 예측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두 사람의 엄청난 무공의 차이를 반증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남궁천추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쳤다.
손무엽은 붙잡은 남궁천추의 검을 옆으로 밀치면서 자신의 얼굴을 상대 쪽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애송아, 참고로 무인은 입이 아닌 검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팅!
붙잡은 남궁천추의 검을 두 동강 내버리면서 손무엽이 말을 이었다.
“네 검이 증명하고 있는 것은 주인이 버러지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겁에 질린 남궁천추의 머릿속에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허나 손무엽이 독 안에 든 쥐새끼와 같은 신세인 남궁천추를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청운뇌장(靑雲雷掌)!’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친 손무엽의 손바닥이 남궁천추의 가슴팍에 꽂혔다.
“우우욱!”
남궁천추는 온몸에 벼락을 맞은 듯한 타격을 입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혼절했다.
쓰러지는 남궁천추의 모습을 확인한 부엽이 애절하게 외쳤다.
“도련님!”
부엽은 냉정을 잃고 남궁천추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돌발적인 부엽의 움직임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혈월회 살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
남궁천추가 수세로 몰린 상황에서도 부엽이 함부로 나설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혈월회의 살수들의 위협이었다.
허나 남궁천추가 쓰러지는 순간, 냉정을 잃은 부엽은 미처 그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부엽의 흐트러짐을 놓칠 정도로 혈월회의 살수들은 녹록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서걱.
텅 비어 있는 부엽의 등에 기다란 검흔이 새겨졌다.
“커헉!”
남궁천추를 향해 몸을 날렸던 부엽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짧은 신음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부엽을 바라보던 손무엽이 입을 열었다.
“마침 잘 됐군. 남궁세가의 이 버러지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릴 놈이 필요했는데.”
손무엽은 성큼성큼 부엽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의 머리통을 잡아당겨 몸을 일으켜 세웠다.
피를 흘리며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부엽을 향해 손무엽이 말했다.
“그래도 이 몸이 친히 남궁세가의 가주에게 보내는 선물이거늘, 이런 상태로 보낼 수는 없겠지.”
손무엽은 마치 쓸모없는 짐짝을 집어 던지듯이, 부엽을 바닥에 팽개쳐버렸다.
그리고는 손무엽이 혈월회 살수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맡길 테니, 저놈을 내가 보내는 선물에 어울릴 만한 꼴로 바꿔 보거라.”
혈월회의 살수들이 의문을 내비쳤다.
“대협, 그것이 무슨 뜻인지……?”
부엽을 한 번 흘깃 쳐다본 뒤, 손무엽이 말했다.
“내 뜻을 남궁세가의 전할 때 필요한 건 저놈의 주둥이밖에 없다.”
혈월회 살수들은 그제야 어렴풋이 손무엽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필요한 건 주둥이 뿐이라면 다른 신체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
즉, 고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입만 열 수 있을 정도의 극심한 고문.
“그런 일이라면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대답을 마친 사내와 더불어 주변에 모든 혈월회 살수들이 흉흉한 웃음을 지었다.
* * *
이른 새벽녘에 잠이 깬 유서하는 남궁세가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남궁세가에 혈월회의 존재를 알렸고, 부상당했던 견무겸도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다시 현암사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도움을 받았던 남궁현일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면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진무량의 소문이 퍼진 경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임무를 속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나둘 떠날 채비를 해나가던 유서하는 밖에서 들려오는 기척을 느꼈다.
들리는 걸음소리로 미루어보았을 때, 다수의 무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무슨 일이지?’
유서하는 조금 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의방의 복도로 나오는데, 마침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왕삼과 마주쳤다.
분주한 기색이 역력한 왕삼을 향해 유서하가 물었다.
“세가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왕삼은 여전히 다급한 기색을 내비치며 유서하의 질문에 대답했다.
“백검문에 변고가 생겨 환자들이 호송되어 올 수 있으니, 미리 준비를 해놓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백검문에 어떤 변고가 생긴 건가요?”
“저도 자세히 전해 듣지는 못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왕삼은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유서하는 뭔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백검문을 찾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의방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견무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 안에서 왕삼과 유서하의 대화를 들은 견무겸은 대충 흘러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