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멸천대주
2017.04.30.
진무량은 입가에 걸린 조소를 순식간에 지웠다. 그러고는 당황한 척, 벽영오의 의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괜찮소?”
“저, 저도 부주의한 탓이 있으니, 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벽영오는 어수룩하게 행동하면서도 수상하게 보이는 진무량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은밀히 살피는 중이었다.
머릿속으로 진무량에 대한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우고 있던 그 순간.
의복을 털어주던 진무량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툭. 툭.
진무량의 손가락이 정확히 벽영오의 거골혈(巨骨穴)을 점혈했다.
점혈법은 인체의 급소를 공략하는 기술이다.
인체의 무수히 많은 요혈 중 한 곳을 찌르면 각기 다른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거골혈(어깨뼈와 양 팔의 뼈가 만나는 지점)을 점혈하면 순간적으로 몸이 마비되며 무력해진다.
진무량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려 하는 벽영오를 재빨리 붙잡았다.
“이런, 제대로 설 수 있겠소?”
진무량은 완전히 고의로 벽영오의 점혈을 제압했으나, 겉모습은 어딜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두 눈동자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서 딱히 이 광경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진무량은 힘이 풀린 벽영오를 부축한 채, 미리 봐두었던 인적이 없는 장소를 향해 움직였다.
* * *
진무량이 벽영오를 데리고 도착한 장소는 후미진 뒷골목이었다.
진무량은 주변에 인파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을 마치고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는 마비된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는 벽영오의 턱을 움켜쥐어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벽영오의 입에 넣었다.
벽영오는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저항할 수 없었지만, 지금 매우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 설마! 독단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가?’
마교의 첩자로 활동하는 벽영오는, 혹시라도 적지에서 신분이 드러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무공을 거의 익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첩자의 신분이 발각된다면 그에 따른 대처는 단 하나, 자결뿐이다.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자결을 하기 위해서 입속에 항상 독단을 숨겨두었는데, 눈앞에 사내는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의 입 안을 뒤지고 있었다.
툭.
진무량의 손끝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진무량은 그제야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상대의 입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손에 쥔 것은 벽영오가 항상 휴대하는 작은 환약 모양의 독이었다.
독에 대해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진무량은, 벽영오의 입속에 감춘 독단이 화골산이란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원이 밝혀졌을 때 자결하기 위해 독을 숨긴 건 알겠는데, 뼈조차 녹인다는 화골산(化骨散)을 넣어두다니……. 지독한 건 여전하네.”
화골산을 빼낸 뒤, 진무량이 벽영오의 점혈을 풀어주었다.
벽영오는 마비가 덜 풀려 뻐근한 몸을 이끌고, 거의 발광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저, 전 아무것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그런 것이 왜 입에 드, 들어있었는지……. 소협, 아, 아니 대, 대협,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눈에 눈물까지 고인 채 호소하는 벽영오를 향해 진무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교를 비추는 자는.”
멈칫.
진무량의 그 한마디에, 몸부림치던 벽영오의 몸이 바위처럼 굳었다.
벽영오가 순식간에 자세를 바꿨다.
진무량을 향해 온몸을 완전히 땅에 붙이는 형태로 절을 올리며 벽영오가 말했다.
“어둠속에서 영원하리.”
진무량은 절을 하고 있는 벽영오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암어가 예전과 똑같아서 다행이군. 암월단 소속인가?”
마교에서 첩보를 담당하는 곳 중 가장 정점에 위치한 것이 암월단이다.
그들은 늘 적지에서 활동하기에,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암어를 쓴다. 방금 진무량과 벽영오가 나눈 대화가 바로 그 암어였다.
정보를 완벽히 통제하는 조직인 암월단은,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적에게 암어를 흘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암어를 쓰는 자는 절대 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의문이 드는 점은 눈앞에 상대의 신분이었다.
‘대체 누구지?’
일단 눈앞의 상대가 암월단 소속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월단의 암어를 알고 있다는 걸로 추측해봤을 때, 분명 상대는 마교에서도 수뇌부에 있는 높은 신분일 것이었다.
벽영오는 말을 언제 더듬었냐는 듯,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암월단 소속, 벽영오라 합니다. 마교에서 새로운 명이 떨어진 것입니까?”
“아니. 너를 찾은 이유는 마교에 전할 말이 있어서이다.”
벽영오는 가만히 진무량의 말을 기다렸다.
“귀혈악인 진무량이 살아있다. 혼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니, 기회를 봐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마교에 전해라.”
진무량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벽영오는 순간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삼 년 전 죽었다고 알려진 진무량이 살아있다니, 쉽게 믿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혹시 귀하의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본인이 직접 전하는 말이다.”
벽영오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암월단의 암어를 알고 있기에, 마교에서도 높은 직책에 있을 거란 예상은 했다.
허나 상대가 사대신마 중 한 명이자 멸천대의 대주인 진무량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벽영오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멸천대주님을 뵙습니다.”
벽영오에게 사대신마의 자리에 있는 진무량은 가히 하늘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대신마는 마교의 교주인 천마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마교에서 가장 높은 직위.
그런 상대와 이렇게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벽영오에게는 큰 부담감이었다.
진무량이 벽영오를 향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내가 전하라고 한 말은 잊지 않았겠지?”
“그렇습니다.”
사실 벽영오는 진무량에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 죽었다고 알려진 진무량이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다른 곳도 아닌 남궁세가에 있는지 등, 의문은 수도 없이 많았다.
허나 그는 진무량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판단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 진무량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진무량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제게 남기신 그 전언, 한 자의 오차도 없이 마교에 전하겠습니다.”
* * *
유서하는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급히 밖으로 나와 진무량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남궁세가 주변을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진무량의 모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내상의 여파로 아직도 몸이 욱신거렸으나 유서하로서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진무량이 사라졌다.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물론, 진무량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몸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없을 때 진무량의 정체가 밝혀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이대로 진무량이 모습을 감춘다는 가정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봐야겠지.’
유서하는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평정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함께한 시간은 분명 길지 않았으나, 그동안 살펴온 진무량은 결코 생각이 없는 부류가 아니었다.
이대로 모습을 감춘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진무량은 분명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허나 어찌되었건 진무량을 직접 찾기 전까지는 모두 추측일 뿐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없는 이유는, 진무량은 어디로 튈지 도무지 예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참이나 진무량을 찾기 위해 움직이던 유서하가 다시 남궁세가의 정문이 있는 곳을 지날 때였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는 거야?”
유서하의 등 뒤에서 그녀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무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서하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황했으나, 그보다 먼저 목소리의 주인이 진무량이 맞는지부터 확인했다.
남궁세가의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수풀을 헤치며 걸어 나오는 사내의 모습은 진무량이 확실했다.
당황하고 있는 유서하와 달리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진무량이 말했다.
“한참동안 기다렸네.”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죠?”
“잠깐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까 네가 없잖아. 어쨌든 겉으로는 네 호위무사인 척해야 하다 보니 널 찾는 시늉을 하면서 다시 밖으로 나온 거야.”
진무량이 방금까지 있었던 수풀을 힐끔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막상 널 찾으려니 귀찮고,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지.”
진무량의 태연스러운 태도를 보며 유서하는 지금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내상이 완쾌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걱정과 우려를 동시에 하면서 진무량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헌데 한참동안 찾아다니던 당사자를 막상 만나 보니,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한 반응을 하고 있었다.
‘설마…….’
유서하가 의심스러운 기색을 감추며 진무량에게 물었다.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세가 밖을 나갔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죠?”
“답답해서 산책 좀 했어.”
유서하는 진무량의 행동이 의심스럽게 느껴졌으나,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었다.
마교 소속의 진무량이 남궁세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 유서하는 진무량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헌데 막상 의심을 거두고 나니, 너무나 태연스러운 진무량의 행동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성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이 근방을 이 잡듯이 뛰어다니고 있을 때, 진무량은 한가하게 산책이나 하고 있었다니……!
“그래서 산책은 어디로 가셨던 거죠?”
“이곳저곳 가봤는데 딱히 볼 건 없더군.”
유서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잊었어요? 남궁세가가 있는 곳에서 버젓이 산책이라니요!”
진무량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흐음……. 뭔가 어색하다 싶었는데, 네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봐.”
“이 사람이…….”
진무량의 말대로 유서하는 항상 침착하고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편이라, 지금처럼 겉으로 드러내는 법이 별로 없었다.
헌데 묘하게 거슬리는 진무량의 말을 듣고 있자니 도저히 참고 있기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무량은 무심한 눈빛으로 유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찾으러 돌아다닌 거였으면 나를 만났으니 됐고,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나를 걱정했다면 몸 성히 돌아왔으니까 다 잘된 거잖아.”
유서하는 뭔가 진무량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으나, 일단 그의 말이 전부 맞는 소리라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후우.”
유서하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언제까지 진무량에게 따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유서하가 진무량에게 말했다.
“일단 다시 남궁세가로 돌아가죠.”
유서하와 진무량, 두 사람은 거대한 현판에 남궁세가(南宮世家)라고 적힌 곳을 향해 걸어갔다.
* * *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뿐인 황량한 황야.
불어오는 거친 바람을 맞으며 그곳을 질주하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전부 말을 타고 있었으며, 멸천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는 연시우가 돌연 한쪽 팔을 들어올리며 멈추라는 신호를 냈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모든 무인들이 재빨리 고삐를 당겼다.
“히이이이힝!”
말이 내지르는 거친 소리와 함께 멸천대 전체가 제자리에 멈췄다.
연시우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유독 높게 솟아오른 모래 언덕을 바라보았다.
이런 황야에서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으나, 연시우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장소였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곳을.
연시우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눈을 감았다.
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소리로 변하고, 그 안에서 모래냄새가 풍겼다.
잡생각이 점점 사라지며,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 과거의 그때가 눈앞에 그려졌다.
* * *
“그는 아군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무능력한 자입니다!”
“당장 그를 멸천대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그가 사라져야 마교가 흥할 것입니다!”
“그는 살육을 일삼는 미치광이가 분명합니다!”
얼마 전까지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 떠올라, 연시우의 신경을 거슬렸다.
똑같은 말을 하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잊히지 않고 귓가에 시끄럽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각기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모두 똑같은 뜻을 말하고 있었다.
그놈을 죽여라!
무의식중에 걷고 있던 연시우의 걸음이 멸천대(滅天對)라 쓰인 깃발 앞에 멈춰 섰다.
이곳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마교의 수뇌부들의 등쌀 때문이었다. 허나 막상 이곳을 찾게 되니 설레는 마음도 약간 일었다.
언제부턴가 당연하다는 듯이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멸천대의 새로운 대주를 만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마교의 수뇌들의 말대로 바뀐 멸천대주는 반드시 죽여야 할 위험한 자일까? 아니면 단순히 잠깐 반짝하고 사라질 인물일까.
이제부터 직접 그 인물과 대면해서 자신의 궁금증을 풀 것이었다.
만약 죽여야 할 자라고 판단된다면…….
‘마교가 꽤나 시끄러워지겠지.’
연시우는 문득, 이 앞을 지나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을 느꼈다.
연시우가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검은 갑주를 입은 멸천대원 두 명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척.
검은 갑주를 입은 멸천대원은 순식간에 연시우의 목에 시퍼런 창날을 겨눴다.
평소의 연시우였다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멸천대원의 창날을 거꾸로 돌려 그들의 목구멍에 박아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상대는 이런 하찮은 자들이 아닐 것이다.
연시우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창날을 들이밀고 있는 멸천대원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압도당할 것만 같은 살기가 그의 눈빛을 통해 전해졌다.
단순히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멸천대원들은 연시우의 강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멸천대원들 역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연시우가 앞섬에서 작은 나무패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쓸데없이 죽기 싫으면 얌전히 비켜라.”
연시우의 손에 들린 나무패에는 영월단(英刖團) 단주(團主)라 쓰여 있었다.
영월단은 마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막대한 힘을 가진 세력.
멸천대의 일개 무인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멸천대의 입구를 지키던 무사들은 그 패를 보고서 즉시 창을 거뒀다.
연시우가 말했다.
“안내해라. 나와 말을 나눌 수 있는 놈에게.”
* * *
연시우는 높이 솟은 모래 언덕 정상에 다다르자, 그곳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진무량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연시우는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귓가가 멍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귓가에서 수없이 꽝꽝 거리던, ‘그놈을 죽여라!’ 라고 외치던 자들이 말하는 ‘그놈’ 진무량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연시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진무량이 몸을 돌려 그를 쳐다봤다.
연시우는 진무량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싸늘한 침묵.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정적을 진무량이 먼저 깼다.
“무슨 일로 온 거지?”
연시우가 느끼는 진무량의 첫인상은 무관심 그 자체였다. 어느 누가 보아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 분명할 정도로 확고한 태도였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대놓고 불친절이 섞인 냉대라.’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자신과 마주한 자들은 모두 굽실거리거나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썼다. 아니면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번지르르한 말들만 지껄이거나. 어쨌든 그 둘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연시우는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진무량의 반응이 싫지 않았다.
이제부터 대화로 진무량이란 자를 가늠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결코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 법.
연시우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확실한 결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요하고 정확한 통찰이 지금 진무량을 향했다.
“글쎄, 내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관심 없어. 용건이 없으면 그만 가 봐.”
일말의 망설임이 없는 대답 후 돌아서는 진무량의 뒷모습을 향해 연시우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마교의 명령으로 자네를 죽이러 왔다고 하면 어쩔 텐가.”
걸어가던 진무량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연시우를 바라보았다.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는 건가?”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마교의 수뇌부들은 네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래서 나보고 너를 처리해달라는 귀찮은 부탁을 했거든.”
진무량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너부터 죽여야겠지.”
연시우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호오’ 라는 감탄사를 뱉었다.
“이따위 사도맹을 상대로 고전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이끄는 영월단을 감히 상대나 할 수 있겠는가?”
연시우는 높이 솟은 모래언덕 아래 펼쳐진 광경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사방에서 사도맹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즉, 이곳은 지금 사도맹에 의해 완벽하게 포위된 상태라는 것을 뜻했다.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고, 후퇴할 곳도 보이지 않았다.
전투에 대해 기초지식이라도 있는 자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지금 이곳은 열세를 넘어선 최악의 사지(死地)였다.
진무량이 한심하다는 듯 비웃었다.
“이곳을 바라보며 그 정도밖에 간파하지 못하는 자가 수장이라면, 영월단인지 뭔지도 그리 어렵지 않게 몰살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연시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갔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시시하고 유치하다고 느꼈다.
헌데 오랜만에 예측할 수 없는 진무량의 반응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연시우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나?”
“애초에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모두 계획하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