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혈월회 (2)
2017.04.23.
곡언무는 두려움이 가득 담긴 두 눈동자로 진무량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온몸이 떨리는 것은 멈출 수가 없었다.
진무량은 가볍게 어깨에 먼지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음? 날 본 적이 있나? 쓰레기들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서 말이야.”
곡언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유서하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흐트러진 그의 무복 사이로 드러난 초승달 모양의 자문(刺文 : 문신)을 발견했다.
그것은 과거 혈월회의 살수들이 몸에 새겼던 자문.
혈월회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조금 남아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 확신으로 변했다.
‘정말로 혈월회가 안휘에 숨어있었어.’
허나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살수들이 활개치고 다닐 정도로 안휘의 방비는 약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혈월회의 파격적인 행동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닌 안휘에서 남궁세가의 삼공자, 백의유협이라 불리는 남궁헌을 직접 공격하다니.
‘혈월회가 노리는 게 대체 뭐지?’
모든 행동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이유가 존재한다.
허나 이런 상식밖의 혈월회의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까지는 추측할 수가 없었다.
유서하가 생각을 다 정리하기 전에 곡언무는 간신히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는 진무량의 목소리가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지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애써 외면했다.
당장 시급한 일은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
척.
견무겸은 곡언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검을 치켜들고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곡언무 역시 견무겸에게 곡도를 겨누면서 천천히 전체적인 움직임을 살폈다.
‘정면승부는 위험하니, 적당히 겨루다 기회를 봐서 도망쳐야 한다.’
견무겸과 곡언무. 서로에게 검을 겨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뭐하는 거지?”
그 순간, 지금까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그곳에는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서 있는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의문의 목소리를 낸 사내를 확인하는 순간, 견무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저자는 분명…….’
희미하지만 기억에 있는 사내였다.
환자같이 핏빛이 없는 하얀 얼굴에, 여인같이 호리호리한 몸.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대궁(大弓)을 메고 있는 행색은 잠깐 봤음에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진무량과 함께 대장간에서 보았던 그놈이다.’
견무겸은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를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 조금 전만 해도 이곳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방금 이곳으로 접근해 왔다는 것.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서하와 견무겸은 일류 반열에 올라 있는 무인. 이렇게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는 상대를 알아채지 못하는 건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아무런 말없이 공격해왔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 최악의 경우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때 곡언무가 머뭇거리는 어조로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를 향해 말했다.
“소천광 도련님! 어찌 이곳에……?”
특이한 건 곡언무의 반응이었다.
곡언무가 소천광을 대하는 반응은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갈 동료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마치 소천광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해칠까 봐 겁내는 것 같이 보였다.
“…….”
심지어 소천광은 곡언무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눈동자에 초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소천광은 고개를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릴 뿐이었다.
소천광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눈뜬 맹인과도 비슷한 모습.
유서하와 견무겸은 짐작이 가지 않는 소천광을 주의 깊게 살피며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
비단 그 두 사람뿐 아니라, 곡언무를 비롯해 아직 숨이 붙어있는 혈월회의 살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천광은 마치 주위의 시선을 모두 빨아들이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 이유는 하나.
각자의 감각이 모두 소천광을 위험하다고 감지했기 때문이다.
소천광이 무슨 행동을 취할지 바라보며 모두가 숨죽이던 그 순간.
“크크크.”
진무량이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참 오랜만이야, 이런 기분.”
진무량은 한참동안 느끼지 못해 무뎌졌던 감각이 살아나는 것을 만끽했다.
마치 시간이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하찮은 무인이 아닌, 목숨을 걸고 겨룰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
그런 상대를 살육하기 전에 느꼈던 그 짜릿한 전율이, 지금 온몸에 흐르고 있었다.
초원의 왕으로 불리던 사자가 주린 배를 달래기 위해 손쉬운 초식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투지를 타오르게 하는 표범 떼를 만난 것과 같은 감정이랄까.
소천광은 높낮이가 전혀 없이 자연스레 흐르듯이 말을 내뱉었다.
“역시 눈을 마주쳤을 때 널 죽였어야 했어. 넌 뭔가…… 꺼림칙했거든.”
마치 감정이라는 것이 완전히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가 소천광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소천광은 등에서 화살을 하나 뽑아 공중으로 툭 던졌다.
자연스레 지면을 향해 떨어져야 할 화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소천광의 화살은 기이하게도 지면을 향해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머물렀다.
“이번에는 죽인다.”
소천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중에 멈춰 있던 화살이 제자리에서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그리고 점점 그 회전하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거칠게 회전하는 풍압을 두른 화살은 마치 작은 태풍처럼 보일 정도였다.
‘선풍시(旋風矢).’
소천광의 손가락이 진무량을 향해 움직였다.
마치 땅에 앉아 있다가 순식간에 도약하는 새처럼, 회전을 잔뜩 머금은 소천광의 화살이 진무량을 향해 쏘아졌다.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태풍과 같은 화살은 거칠 것 없이 진무량을 향해 날아갔다.
디리리리링―!
그때 들리는 금의 연주소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진무량을 향해 날아가던 선풍시는 무형의 무언가에 부딪친 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내 엉뚱한 곳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콰아아앙!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간 소천광의 선풍시가 주변의 있는 고목과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거대한 고목은 갈가리 찢겨, 본래의 형체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소천광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를 유지하며 말했다.
“방해꾼이 있었나?”
소천광의 화살을 비껴나가게 만든 건 유서하의 음공이었다.
유서하는 만들 수 있는 최대의 음파를 만들어 날아가는 소천광의 화살을 향해 날렸다.
무형의 음파가 화살과 허공에서 충돌했고, 그 때문에 소천광의 화살이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허나 소천광의 강대한 내공이 실린 화살과 정면으로 부딪친 건 유서하의 실수였다.
주르륵.
유서하의 입 밖으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간신히 소천광의 화살을 빗나가게 할 수는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유서하는 정면으로 소천광의 내력과 부딪쳐야 했다.
소천광의 힘은 유서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고, 결국 그녀는 내상을 입게 된 것이다.
견무겸은 재빨리 비천검문의 독문무공인 유성비보(流星飛步)를 펼치며 소천광의 옆구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네놈이 감히 아가씨에게!”
격분한 견무겸은 단숨에 검을 내리쳐 소천광을 두 동강 낼 생각이었다.
‘이럴 수가!’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견무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소천광이 어느새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이형환위(以形換位)!’
멀찍이 떨어진 소천광이 나직이 말했다.
“느려.”
견무겸은 다시 한번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갑자기 어깨에서부터 극심한 통증이 일더니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무겸은 통증이 시작된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소천광의 화살이 깊이 박혀있었다.
“크억!”
견무겸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는 소천광이 움직이는 것도 화살을 쏘는 동작조차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면서 절망감이 감도는 그때,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금을 연주해라. 아니면 여기서 모두 죽어.”
유서하의 입장에서 보면, 진무량의 금제를 푸는 건 분명 꺼릴 법한 일이었다.
진무량은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이미 한번 배신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유서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유서하가 금 위에 손을 올려놓고 연주를 시작하려 했다. 허나 마음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쿨럭!”
첫 음을 시작하려 하는 순간, 유서하는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소천광의 화살을 정면으로 막아내면서 입었던 내상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유서하는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훔치며, 결연한 표정으로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당신의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해드리죠. 단, 유지되는 시각은 반각. 그 안에 결판을 내야 해요.”
“충분해.”
유서하는 마음을 다잡고 금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내 그녀의 손가락이 일곱 개의 현으로 이뤄진 금을 튕기고, 뜯으며, 어루만졌다.
이번에 펼쳐지는 유서하의 연주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듣는 이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공포를 자아내듯이 음산하고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천광은 여전히 한쪽에서 표정 변화 없이 서 있었다. 그는 유서하의 연주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그는 지루하기만 한 이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 다시 한번 화살을 공중에 띄웠다.
‘선풍시.’
처음에 진무량을 향해 날렸던 것의 배가 넘는 화살이 광풍을 동반하며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콰아아아!
선풍시는 주변의 공간을 모두 집어삼키며 진무량을 향해 쏘아졌다.
디리리링―!
유서하의 손가락이 한층 빠르게 움직이며, 연주의 박자가 점점 빨라졌다.
엄청난 기세로 날아드는 소천광의 화살을 바라보며 진무량은 여유롭게 말했다.
“오래도 걸리네. 서두르라고.”
두근!
진무량은 자신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곳은 바로 단전.
지금까지 한 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던 게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단전에서 내공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쳤다.
씨익.
만연한 비웃음이 진무량의 입가에 걸렸다.
진무량은 날아오는 선풍시를 태연히 바라보다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왼쪽 어깨 근처까지 올렸다.
스윽.
진무량의 오른손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기세로 날아오던 선풍시가 거짓말처럼 힘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진무량의 시선이 바닥에 고꾸라진 화살에 잠깐 닿았다가, 다시 소천광을 향했다.
“장난은 그만하지?”
소천광의 눈이 커지며, 흐리던 초점이 처음으로 뚜렷해졌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진무량을 향했다.
“역시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진무량은 소천광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마공이 단전 안에서부터 끊임없이 끓어올랐다.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
가히 천지를 집어삼켜 버릴 것과 같은 기세가 진무량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소천광은 한층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등 뒤에 걸친 거대한 활을 꺼냈다.
그가 호적수로 인정한 상대에게만 사용하는 낙영신궁(落影神弓).
소천광은 낙영신궁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나도 마찬가지.”
진무량의 신형이 일순 흔들리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소천광과 거리를 좁혀갔다.
소천광은 돌진해오는 진무량을 향해 낙영신궁을 정확히 겨누어 시위를 놓았다.
‘파천괴시(播遷傀示).’
팽!
낙영신궁에서 쏘아진 화살은 지면과 맞닿아 날아갔고, 그 기세에 땅이 파도처럼 쓸려나갔다.
막대한 기운이 담긴 화살이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진무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속도를 더욱 올리며 화살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쳐갔다.
영락없이 소천광의 화살에 적중당할 것처럼 보였던 진무량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지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허공이었다.
그것도 잠시, 진무량의 신형이 다시 한번 사라졌다.
감히 눈으로 쫓는 것조차 불가능할 속도.
진무량이 자랑하는 보법 중에 하나인 무영섬전보(無影閃電步)였다.
사라졌던 진무량의 신형이 이번에 드러난 곳은 소천광의 등 뒤였다.
“그런 무식한 공격을 누가 맞아 주던가?”
후욱!
진무량의 창이 섬광처럼 소천광의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이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분명 뼈와 살을 뚫는 묵직한 감각이 전해져야 했으나, 창을 쥔 그의 손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환영처럼 사라진 소천광은 어느새 진무량과 열 걸음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있었다.
“그 정도 보법(步法)으로 나를 잡으려 한단 말인가?”
단 한 번 서로를 향해 공격을 했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
진무량은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비웃음을 흘렸다.
“제법이군.”
진무량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는 창의 중간 부분, 창간이라 불리는 곳을 옆구리에 단단하게 밀착시켰다.
“평소라면 좀 놀아줬겠지만, 지금은 좀 바빠서.”
스으으으.
진무량을 중심으로 서서히 검은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층 더 기세를 끌어올린 진무량으로 인해 공기가 무겁게 바뀌고 있었다.
“네가 평생 오르지 못할 경지를 보여주지.”
소천광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순식간에 화살 세 개를 동시에 낙영신궁 시위에 걸었다.
‘단선삼시(斷閃三矢).’
소천광은 팽팽하게 당겼던 낙영신궁의 시위를 놓았다.
세 개의 화살이 각기 다른 궤적을 그리며 진무량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들은 일제히 진무량을 덮쳤으나, 그의 주위에 모여든 검은 기운에 의해 모조리 튕겨나갔다.
어깨에 박힌 화살 때문에 꼼짝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견무겸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진무량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광풍이 점차 형상화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묵색 강기(剛氣)로 변했다.
신검합일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강기.
평범한 무인이라면 평생 구경조차 못할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묵색 강기를 온몸에 두른 채 진무량이 말했다.
“이번에도 쥐새끼처럼 도망칠 수 있을까?”
소천광은 경공을 사용해 순식간에 진무량과 거리를 삼십 보 이상 벌렸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쫓아올 것 같던 기세의 진무량은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망쳐봐야 소용없어.”
불길한 기운을 띤 묵색 강기가 점차 진무량의 창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형십삼식(龍形十三式) 제삼식(三式).’
진무량이 멀리 떨어진 소천광을 향해 일직선으로 창을 뻗었다.
‘천공포(天公浦)!’
콰아아아아!
진무량의 창끝에 감돌던 흑색 강기가 삼십 보 이상 떨어진 소천광을 덮쳤다.
감히 피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 게다가 강기의 예리함은 천하제일의 명검에 필적한다.
묵색 강기는 지나치는 모든 걸 철저하게 부숴버렸다. 그로 인해 주변 삼십 장 정도의 공간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잠시 뒤, 흩날렸던 짙은 흙먼지가 사라지면서 소천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기에 휩쓸린 그의 모습은 온몸이 검으로 난자된 것과 같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쿵.
더 이상 몸을 가눌 힘이 없어진 소천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탄기공을 사용해서 위력을 줄였지만 이미 전신이 망가진 상태였다.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곡언무가,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곡도를 떨어뜨렸다.
그는 윗니와 아랫니를 딱딱 부딪히면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너, 너는……!”
진무량은 곡언무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혈월회 놈이라면 날 봤을 수도 있겠지.”
진무량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혈월회 놈들 그토록 두려워했으면서 그새 잊어버리다니. 세월이란 참으로 대단하군.”
진무량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좀 알아보겠나?”
곡언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머릿속에서 ‘펑’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진무량이 얼굴을 가린 모습을 보니 더욱 기억이 선명해졌다.
저 압도적인 창술과, 마주 보기만 해도 온몸을 짓누르는 것과 같은 존재감.
모든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인물을 입증해주었다.
새카만 말을 타고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그자.
검을 섞어보기는커녕 먼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그자.
혈월회가 사도맹에 속해있었을 적 항상 살생부에서 첫 번째 줄에 위치했던 그자.
“귀혈악인……!”
곡언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된 것을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때의 그 끔찍했던 기억마저 지워버렸던 것이다.
눈앞의 상대가 귀혈악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곡언무는 공포보다 더한 마치 재앙을 마주한 것 같았다.
진무량은 겁에 질린 곡언무에게 무시한 채, 아직 쓰러져 있는 소천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미세하게 숨이 붙어있는 소천광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유서하가 연주하는 금의 연주소리가 멈췄다.
그와 동시에 진무량의 단전에서 흘러넘쳤던 내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크윽! 하필 지금…….’
진무량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점차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기 시작하더니, 이내 끔찍한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