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4화 (4/143)

4화. 담소

2017.04.16.

유서하는 진무량의 갑작스런 질문에 쉽게 답을 찾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월회라면 살수 조직을 말하는 건가요? 제 기억으로는 아마…….”

그때 유서하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혈월회는 한때 사파에서 최고라고 꼽혔던 살수조직의 이름이었다.

다만 최근에는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최고의 살수조직이라 이름을 날렸던 혈월회는 과거 진무량이 이끄는 멸천대에 완전히 멸문당했으니까.

분명 그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이었다. 허나 그 당시 강호인들을 전율케 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혈월회를 짓밟은 멸천대의 압도적인 무력.

멸천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완벽하게 혈월회를 몰살시켜버린 것이다. 너무나 충격적인 그 사건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었다.

그 사건 이후 혈월회는 두 번 다시 강호에서 볼 수 없었다.

유서하는 혈월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음에도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갑작스러운 질문의 의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성미가 급한 견무겸이 유서하보다 한발 먼저 물었다.

“혈월회라면 과거의 네놈이 완전히 몰살시킨 살수조직이 아니더냐?”

진무량은 거대한 창을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소문이 어떻게 돌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혈월회를 완전히 전멸시키지 못했어. 놈들을 거의 몰살시킨 건 사실이지만, 결국 우두머리를 죽이지 못했거든.”

유서하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억양이 신중해졌다.

“그렇다면 홍사사신(紅蛇死神) 소기성(邵起成)을 놓쳤다는 건가요?”

홍사사신 소기성은 혈월회의 수장으로서 한때 살수의 정점이라고까지 불렸던 자였다.

진무량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허나 방금까지 보이던, 거대한 활을 등에 지고 있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진무량이 말했다.

“제법 행동도 빠르군. 나와 너희의 시선을 눈치챘어.”

유서하 역시 거대한 활을 등에 메고 있는 사내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그 사내가 어디로 움직였는지 찾아보려 했지만, 주변의 인파가 너무 많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유서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금 그 사내가 혈월회의 살수라는 건가요?”

“아마도. 확실한 건 꽤나 실력이 있는 자라는 거야. 난 머저리들은 몰라보거든.”

견무겸은 적대감과 의심이 동시에 담긴 어조로 물었다.

“네놈은 내공을 모두 잃었는데 어떻게 상대의 실력을 느꼈다는 것이지? 우리를 현혹시키려 하는 것이 아닌가?”

진무량은 견무겸이 의심하는 태도에 대해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지.”

유서하는 이곳에서 더 이상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천천히 다시 한번 상황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볼일을 마쳤으니 일단 객잔으로 돌아가시지요.”

* * *

진무량과 유서하, 견무겸은 모두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해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반으로 갈라진 보름달과 부스러기 같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유서하는 객잔 방에 있는 큼직한 창문을 통해 한참동안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이 가져다주는 고요함 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렸으나, 그것이 유서하의 고민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혈월회는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사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위험한 세력이었다.

허나 그건 십 년 전의 일.

마교와의 분쟁 과정에서 혈월회가 진무량이 이끄는 멸천대에 패해 멸문했다는 것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진무량의 말대로라면 혈월회는 완전히 멸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혈월회가 멸천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한 사실. 그렇다면 그 뒤로 그들은 은밀히 몸을 숨긴 상태로 힘을 키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들이 남궁세가를 비롯한 정파의 강한 문파가 즐비한 안휘에 나타날 이유가 있을까?

유서하는 답답한 심정을 털어내고 싶은 듯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후우.”

아무리 생각해봐도 혈월회가 안휘성에 나타난 이유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허나 강호는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야말로 가장 많은 피가 흐르기 마련이다.

멸문의 위기를 겪었던 혈월회가 지금 얼마만큼의 힘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그나마 지금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혈월회의 살수로 의심되던 사내가 자신이나 일류 검객인 견무겸의 눈을 속일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렇다는 것은 결코 다른 이들도 그를 쉽게 식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최악의 경우, 만약 아버지가 언급한 그들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분명 진무량과 함께 본 사내가 수상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도 무턱대고 안휘에서 혈월회에 대한 조사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을 찾아낼 정도의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친분이 있는 곳이라면 안휘에서는 남궁세가밖에 없다.

비천검문의 명령을 미루고 남궁세가로 가서 혈월회가 안휘성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남궁세가에서 진무량의 정체가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

상황이 실타래를 엉켜놓은 것처럼 복잡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진무량이 봤던 사내가 정말 혈월회의 살수는 맞는 걸까?’

달칵.

그때 유서하의 귀에 진무량이 사용하고 있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서하는 신경을 집중해서 진무량의 기척을 살폈다.

예리해진 그녀의 감각은 진무량의 행동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당당하게 방문을 열고 나와 밖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유서하는 손에 잡히는 겉옷을 걸치고 진무량을 만나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유서하가 방문을 열고 나섰을 때, 그 앞에서 대기하던 견무겸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진무량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제가 살필 테니, 아가씨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갈게. 그와 해야 할 말도 있으니, 이번에는 자리를 좀 비켜줘.”

견무겸은 흉터로 얼룩진 왼쪽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놈과 둘만 있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하다못해 제가…….”

유서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견무겸을 바라보았다.

“…….”

그녀의 눈빛 속에는 자신을 막지 말아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오랫동안 유서하와 함께 했던 견무겸은 딱히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허나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척이 보이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유서하가 밝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꼭 부탁해.”

* * *

밖으로 나온 진무량은 주변에 아무것도 방해될 것이 없는 황량한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미리 가지고 나온 낡고 녹슨 창의 중간부분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진무량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스으윽.

천천히 그의 손에 쥐어진 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을 가로로 크게 휘두르는 동작을 시작으로, 진무량의 손에 들린 거대한 창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진무량은 칠척(2미터)이 넘는 거대한 창을 마치 자신의 손발인 것 마냥 자유자재로 다뤘다.

창끝이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는가 싶으면 갑작스레 휘어지고, 튕기며, 때로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웅―. 웅―.

거대한 창은 시원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한참동안이나 어둠 속의 허공을 갈랐다.

격한 춤을 추듯이 현란하게 창을 휘두르던 진무량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진무량은 몸의 중심을 점점 바닥으로 이동시켰다.

상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낮게 깔리더니, 이내 완전히 움직임이 멈췄다.

파앗!

멈춰있던 진무량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쥐고 있는 창을 지면을 향해 일자로 내리찍었다.

쿵!

거대한 창이 지면과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를 냈다.

진무량은 땅에 새겨진 작은 흠집을 확인하고서 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제길.”

내공을 사용할 수 없으니 과거의 힘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지금의 초식에 내공을 실었다면 땅바닥이 완전히 갈라졌을 것이다.

진무량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창날을 땅으로 향하게 돌려 들었다. 그러고는 어둠속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말했다.

“키우는 개가 올 줄 알았는데, 주인이 온 건 조금 의외군.”

진무량이 바라보고 있었던 지점에서 유서하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이 무림공적이 된 계기에는 분명 그 입도 크게 한몫 했을 것 같네요.”

말을 마친 유서하가 진무량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진무량은 입가에 조소를 띄우며, 주변에 있는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

그는 유서하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허리춤에 있는 술병을 꺼내들었다.

진무량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 있는 유서하를 향해 술병을 내밀었다.

무심한 듯 술병을 내밀고 있는 진무량의 눈빛은 ‘싫으면 말고.’ 라는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유서하는 진무량이 내민 술병을 받아서 망설임 없이 한 입 가득 술을 마셨다.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느껴지는 화주의 화끈한 감각과 동시에 알싸한 향이 났다.

유서하가 미세하게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술 살 돈은 어디서 구했죠?”

“훔쳤어.”

유서하는 술을 내뿜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의 범법행위를 너무 태연스럽게 말하는 진무량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유서하가 진무량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하세요. 제가 살게요.”

진무량은 다시금 술을 한 모금 마시고서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원한 살 짓은 많이 했어도 대접 받을 만한 행동은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솔직한 대답을 원하나요?”

유서하는 물음과 함께 진무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무량은 유서하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아채고, 그녀의 손에 술병을 건넸다.

유서하는 다시 한 차례 술을 마시고는 가볍게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당신이 저한테 갚을 빚을 만들고 싶어서요. 저는 빌려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빌려주거든요.”

“그럼 헛수고야. 나는 빚을 갚는 것보다 배신하는 걸 더 잘하거든.”

유서하는 쌀쌀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며 화제를 바꿨다.

“하나만 묻죠. 오늘 당신이 혈월회 살수를 봤다는 것이 정말 확실한가요?”

진무량이 유서하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의심되는 것을 사실인지 되묻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건 없어. 사실을 되묻는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고, 믿지 못하는 말을 한 번 더 듣는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지.”

유서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가 진무량에게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대답해줘요. 만약 당신이 저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요?”

유서하는 아무 설명이 없는 뜬금없는 질문에 진무량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그걸로 족했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면 대강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진무량의 대답에 유서하는 당황했다.

진무량은 가벼워진 술병을 흔들었지만, 안이 비어있는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강호는 가지고 있는 힘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어찌되었든 내가 너와 함께 있는 한 어떤 것도 망설일 필요 없어.”

진무량이 특유의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최강이니까.”

저도 모르게 유서하의 입 밖으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여러 가지 가정을 하며 앞일을 걱정했던 골칫거리를, 진무량은 단순한 자신감만으로 너무나 간단하게 풀어내버렸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복잡한 가정을 다 집어치우고 지금 상황만을 바라보니, 역시 가장 시급한 일은 정해져있었다.

유서하는 생각을 정하고는, 진무량 옆에 놓인 빈 술병을 낚아채고서 객잔을 향해 걸어갔다.

“술값은 제가 계산하도록 할게요. 빚에 달아 두세요.”

진무량은 유서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잠시 동안 빈 공터에 앉아있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으로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음 날 아침.

유서하는 객잔의 일 층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녀가 식사를 마칠 때쯤 이층에서 진무량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무량이 유서하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녀가 말을 걸었다.

“이제 떠나려고 하는데, 아침을 드시겠어요?”

“아니.”

진무량은 유서하의 옆자리에 놓여있는 폭이 넓은 죽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뭐지?”

“당신이 쓸 거예요. 이제부터 남궁세가로 출발할 예정이거든요.”

“현암사가 아니라 남궁세가인가?”

“네. 현암사는 조금 돌아가게 되겠지만, 먼저 남궁세가로 찾아가서 혈월회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려야 할 것 같아요.”

유서하는 당장 비천검문의 임무를 속행하는 것보다, 남궁세가로 가서 혈월회의 존재를 알리는 것을 우선으로 여겼다.

혈월회가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남궁세가가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위험을 방치하고 임무를 속행하는 것보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위험의 불씨를 끄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진무량은 남궁세가를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한 가지 있었다.

‘남궁세가라면 분명…….’

진무량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말했다.

“난 별로 상관없어.”

유서하는 순순한 진무량의 태도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눈앞에 있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다.

진무량은 죽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건 필요 없어. 멸천대는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내 얼굴을 아는 자는 정파 내에서 한 명도 없을 테니까.”

“준비를 철저히 해서 손해 보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어제와는 반대로, 이제 당신의 얼굴은 눈에 잘 띄는 얼굴이거든요.”

유서하가 몸을 일으키면서 죽립을 진무량에게 건넸다.

진무량 역시 죽립을 쓰는 것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진무량은 유서하가 건넨 죽립을 쓰고서 그녀와 함께 객잔을 나갔다.

밖에서는 먼저 준비를 마친 견무겸이 대기하고 있었다.

견무겸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남궁세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로 움직이겠습니다.”

* * *

진무량 일행은 마을을 벗어나서 며칠 동안 산길로 움직였다.

날이 점점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앞에서 걷고 있던 견무겸이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해야겠습니다.”

유서하는 가볍게 흘러내린 땀방울을 훔치며 견무겸에게 말했다.

“남궁세가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지금 같은 속도라면 이틀 정도면 도착할 듯합니다.”

유서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주변을 둘러보며 노숙할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뒤 일행은 돌멩이가 별로 없고 주변이 잘 보이는 평평한 평지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서하는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능숙하게 불을 지폈다. 견무겸은 나뭇가지를 엮어서 혹시나 모를 비에 대비해 작은 지붕을 만들었다.

어느 정도 노숙의 준비가 끝나가자, 그동안 그늘에서 편히 쉬던 진무량이 모닥불을 향해 다가갔다.

“솜씨가 제법이네.”

“킁.”

진무량의 뻔뻔함에, 견무겸은 불쾌함을 가득 담은 헛기침을 한번 내뱉었다.

산중에 밤은 빠르게 깊어갔다. 금세 찾아온 어둠속에서는 장작불이 타는 소리만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유서하는 한참 동안 진무량을 살피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남궁세가 안에서 당신은 저의 호위무사로 위장해야 해요. 남궁세가는 정파에서도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이니, 만에 하나라도 당신의 정체가 밝혀지면……”

진무량은 여유롭게 나무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아까부터 내 눈치를 살핀 거였나?”

“고작이라니요? 당신 목숨이…….”

유서하의 말을 자르며 진무량이 대답했다.

“실패했을 때까지 일일이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피할 뜻이 없다면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 생각해.”

무심한 듯 말하는 진무량의 모습에서, 유서하는 은연중에 그의 내면 일부를 엿본 것 같았다.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냉철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비결은, 저런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일까.’

진무량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모닥불과 가장 가까운 나무에 등을 기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난 잘 테니까, 불 꺼지지 않게 잘 봐.”

“…….”

그렇다면 저 몸에 배어버린 것 같은 뻔뻔함은 대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주변이 완전히 어둠이 깔리며, 산중의 깊은 밤이 찾아왔다.

각자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던 도중, 견무겸과 유서하가 동시에 수상한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진무량도 어느새 잠이 깨었는지,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댄 자세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약한 것들이 한밤중에 싸움질이라니까.”

견무겸은 몸을 일으켜서 검을 손에 쥐고 주변을 경계를 취했다.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미세하게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견무겸이 말했다.

“근방에서 분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민을 마친 유서하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접근해서 상황을 살펴보자.”

진무량은 귀찮다는 듯이 기지개를 길게 피며 몸을 일으켰다.

견무겸을 필두로 진무량과 유서하는 미세하게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은밀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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