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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무도-3화 (3/143)

3화. 멸천대

2017.04.13.

유서하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를 벗어나,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깨끗이 다려진 하얀 경장을 입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윤기 있는 긴 흑발을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한쪽에 놓아둔 빗을 집었다.

가지런히 머리카락을 빗으며, 그녀는 정신을 집중해 옆방에 있는 진무량의 기척을 살폈다.

며칠간 진무량의 일상은 너무나 일정했다.

그는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금도 진무량은 등을 벽에 붙인 채 침상에 앉아 있었다.

유서하가 잠시 앞으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지금까지와 다른 움직임을 취하는 진무량의 기척이 느껴졌다.

진무량은 밖으로 나와 곧바로 유서하를 찾아갔다. 그녀의 방문을 벌컥 열며 진무량이 말했다.

“어이. 은자 좀 빌려줘.”

유서하는 변해버린 진무량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진무량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해 있었다. 기척을 살피고 있지 않았다면 눈앞의 사내가 진무량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처음 봤을 때 뼈만 남아 앙상했던 몰골은 간데없고, 찢어진 누더기 옷 사이로 뼈가 아닌 우람한 근육이 드러났다.

지저분했던 용모 역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면도를 해서 깔끔해진 얼굴은 영락없는 미공자였다.

진무량은 더욱 날카로워진 눈매로 유서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며칠 안 본 사이에 참 많이 변한 것 같네요.”

진무량은 당연한 걸 말하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들썩인 후 한 걸음 더 유서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견무겸이 나타나, 유서하를 향해 다가가는 진무량의 앞길을 막아섰다.

“대화를 하려는 것뿐이니까 유난 떨지 말고 좀 비켜.”

견무겸은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진무량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더 이상 접근하지 말고 거기서 말해라.”

진무량이 견무겸을 향해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네 주인을 공격이라도 할 것 같나? 쓸데없이 철저한 걸 보아하니, 전형적으로 생각이 모자라고 고지식한 놈이겠군.”

“뭣이?”

견무겸은 순간 화가 치밀었으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유서하가 화제를 돌리며 진무량을 향해 말했다.

“은자는 왜 필요하시죠?”

진무량은 입고 있는 누더기의 가까운 의복에 어깨 부분을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몸을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어. 현암사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갈 때 이런 누더기를 입고 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임시로라도 무기가 필요할 테고.”

견무겸이 얼굴을 구기며 진무량의 말을 받았다.

“전부 너한테 쓸모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무기라니?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진무량은 자신보다 한 치 정도 키가 작은 견무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생각이 짧네. 강호에서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첫째, 쓸데없는 일에 연루되지 않는 것. 둘째, 쓸데없이 드러나지 않는 것. 예쁘장한 여자, 거지, 호위무사 일행보다는 예쁘장한 여자와 호위무사 둘이 덜 드러나지 않겠어?”

견무겸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일 때 유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유서하는 몸을 일으키며 침상 옆에 놓인 죽립을 덮어썼다. 폭이 넓은 죽립은 작은 유서하의 얼굴을 완전히 가리기 충분했다.

“저도 같이 가죠. 그 편이 값을 치르기도 편하고, 저도 몸을 좀 움직이고 싶어서요.”

* * *

붉은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그려진 흑색 깃발이 세찬 바람을 맞아 찢어질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무림인들의 두려움에 상징이기도 한 그것은, 과거 진무량이 이끌었던 멸천대를 나타내는 깃발이었다.

멸천대는 평소 모습대로 모두 말을 탄 상태로 흑색 갑주를 입고 거대한 창을 들고 있었다.

허나 평소와 전혀 다른 점은, 원래 하나로 뭉쳐있어야 할 멸천대가 펄럭이는 깃발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뉘어 대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둘로 나뉜 멸천대는 살기가 가득 담긴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서로가 거울을 보고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왼쪽 무리의 가장 선두에 선 연시우가 말을 앞으로 움직여 모습을 드러내며 외쳤다.

“나를 막지 마라, 등가휘(登家輝)!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검선을 죽이러 가겠다.”

연시우의 말에 응답하듯이 반대편에서 길게 늘어진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등가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의 힘만으로는 검선을 죽일 수 없다. 설령 검선을 죽인다 해도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마교의 명을 기다려라! 정마전쟁이 시작되면 그때…….”

“히이이히힝!”

연시우가 타고 있는 애마(愛馬) 청풍이 주인의 노여움에 동조하듯이 콧김을 뿜어대다가, 이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등가휘의 말을 막았다.

다시 조용해진 장내. 연시우가 말했다.

“삼 년을 기다렸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연시우는 등 뒤에 걸쳐진 창을 뽑아 멀리 있는 등가휘를 겨누며 말을 이었다.

“나를 막아선다면 베고 나아가겠다.”

연시우의 창끝이 등가휘를 향하자 양쪽으로 갈라진 멸천대 모두 동시에 창을 뽑아들며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태세를 취했다.

일촉즉발.

손짓 하나만으로 이곳이 처참한 살육의 땅으로 바뀔 수 있음을 그곳에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고요한 긴장감을 품은 두 무리의 멸천대는 신경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명령을 기다렸다.

등가휘는 자신의 창을 뽑아들지 않은 채 연시우를 노려보며 일갈을 내질렀다.

“마교를 버리고 동료를 베면서까지 검선을 죽이러 갈 생각인가? 정녕 지켜야 할 것들은 전부 외면하고 죽은 대주의 복수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연시우는 촌각도 망설이지 않고 등가휘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되묻지. 너희는 대주의 죽음을 알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생각인 것이냐?”

연시우와 등가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멸천대라는 이름 아래서 함께해 온 만큼,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진무량의 죽음이란 과정을 두고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등가휘는 직접 연시우와 대면하면서 그의 각오를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목숨을 걸고 연시우의 앞길을 막는다면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줄 알았건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미 연시우에게 살아 돌아올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 어떤 설득을 한다 하더라고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등가휘는 말고삐를 피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한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등가휘는 말을 움직이면서 자신을 따르는 멸천대를 향해 말했다.

“물러서라.”

연시우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멸천대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나아갈 수 있는 큰 길이 만들어졌다.

연시우가 자신을 따르는 멸천대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검선의 문파인 비천검문을 향해 출발한다.”

선두에서 연시우가 가장 먼저 말을 달렸고, 그 뒤로 연시우를 따르는 멸천대가 따랐다.

등가휘는 연시우가 자신의 앞을 지나칠 때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대주가 바라는 것이 정녕 멸천대가 멸망하고 검선의 목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연시우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 명이 넘는 멸천대가 연시우의 뒤를 따라서 성난 폭풍처럼 나아갔다.

등가휘는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린 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가면을 쓴 멸천대의 무인이 등가휘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겠습니까?”

“저들을 막아선 이유는 오직 저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이제 더 이상 동료들을 살릴 길이 없구나.”

최후의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죽은 진무량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검선을 죽이기 위해 비천검문으로 떠난 저들을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등가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섞인 뭉게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어지러웠으며 때때로 신음하는 듯 우르릉 소리가 울렸다.

불현듯 멸천대의 대주 진무량을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올랐다.

진무량의 첫인상은 경박하고 큰소리 칠 줄만 아는 치기어린 사내였다. 그렇기에 항상 자신은 그를 주시하며 혹여나 멸천대를 망치지 않을까 늘 걱정해야 했다.

허나 그건 커다란 착각이었다.

진무량의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그가 큰소리쳤던 일들은 반드시 이뤄냈다.

진무량은 곧 멸천대주의 자리에 올랐고, 그로 인해 멸천대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강해져 지금까지 없던 큰 명성을 떨쳤다.

헌데 자신이 다 늙어 이제 죽을 때가 돼서야 과거의 예감이 맞아떨어지다니…….

과정은 전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진무량의 죽음으로 인해 멸천대는 지금 크게 망가지고 있는 중이다.

벌써 멸천대의 삼 할이 떠났다.

분명 멸천대주 진무량은 누구도 겪어본 적 없는 특이한 매력이 있었고, 연시우를 포함한 많은 멸천대원이 그에게 동화되었다.

허나 더 이상 대주는 없다. 자신에게는 죽은 사람보다 남은 멸천대를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했다.

평생을 몸담은 멸천대. 큰 기둥을 잃고 흔들리는 멸천대를 반드시 지켜야 할 사명이 등가휘에게는 있었다.

등가휘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흐린 날씨가 빛을 빼앗아 시야를 방해했으나 등가휘는 저 멀리 떨어진 마교의 본성, 귀곡신성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등가휘가 말했다.

“전서를 보내, 멸천대 전 인원과 조장들을 전부 귀곡신성에서 모이라 전하거라.”

“존명.”

두 개로 갈라진 멸천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 * *

진무량은 유서하의 뒤를 따라 어디인지 모르는 거리를 걸었다.

걷다 보니 점점 큰 길이 나왔고, 보이는 사람의 수도 급격히 늘어갔다. 골목길을 하나 꺾을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이 귀를 때리며 수많은 인파가 복작였다.

유서하가 주변을 둘러보며 진무량에게 말했다.

“이곳이 안휘성 인근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중 하나예요.”

진무량은 인상을 찡그리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노점상이 가득했다.

인상을 쓰고 시끄럽게 떠들며 물건을 파는 사내와 후미진 골목에서 작은 시비가 붙은 사람들, 펄럭이는 의복을 입고 길을 걷는 여인들 모두 제각기 떠들며 전체적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활기찬 거리를 바라보던 유서하의 죽립 아래에서 조금 들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오랜만이네요.”

견무겸은 걱정스럽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조심스럽게 유서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ㅡ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깊게 눌러쓴 죽립 아래에서 유서하가 차분한 어조로 전음에 답했다.

ㅡ진무량이 강호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지 삼 년이 지났어. 그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우리도 괜히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다니며 움직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편하게 움직이는 게 괜한 의심을 사지 않을 거야.

유서하는 색깔별로 나뉜 아름다운 비단이 걸려있는 포목점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유서하가 포목점 앞을 기웃거리자, 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포목점 여주인이 유서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손님! 특별히 찾으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유서하는 진무량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남자가 입을 옷을 살려고 하는데요.”

유서하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중요한 부위만 간신히 가릴 정도의 누더기를 걸친 진무량이 서있었다.

중년의 포목점 여주인은 진무량의 외견을 보고 눈대중으로 치수를 쟀다.

진무량은 사실 의복 따위는 뭐든 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진무량이 대충 포목점에 전시되어 있는 의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걸려있는 걸로…….”

유서하가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르더니 포목점 여주인과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나누기 시작했다. 대충 원단이나 색상 같은 것을 꼼꼼히 따지는 것처럼 들렸다.

진무량은 의복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포목점 여주인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유서하와 열띤 이야기의 끝을 알렸다.

“휴! 젊은 아가씨가 제법이네요. 좋아요. 아가씨가 말한 것들을 모두 찾아드릴게요.”

포목점 여주인은 비단과 천들을 챙겨 포목점 안으로 들어갔다.

진무량이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저기 걸려있는 거면 돼.”

“그래도 이왕 사주는 거, 튼튼하고 멋스러우면 더 좋잖아요.”

진무량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이봐? 네가 사는 게 아냐. 잠깐 은자를 빌리는 거지.”

포목점 안으로 들어갔던 여주인이 밖으로 나와 진무량에게 말했다.

“들어오셔서 입어보세요.”

유서하는 가볍게 웃음을 지었고 진무량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포목점 안으로 들어갔다.

진무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견무겸이 유서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가씨. 저자는 한때 무림공적으로서 그 잔악함 때문에 귀혈악인이라 불린 자입니다. 좀 더 진무량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진무량에 대해 경계태세만 취한다면 오히려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 그렇지만 좀 더 주의해서 행동하도록 할게. 항상 고마워, 무겸.”

유서하는 침착하고 확실한 어조로 견무겸에게 말했다.

견무겸은 오랜 시간 함께한 유서하를 누구보다 신뢰했고, 그녀의 총명함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의 걱정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진무량이 멸천대를 이끌고 무자비하게 살육하는 모습을 유서하는 알지 못한다.

언제나 멸천대가 사용했던 검은 나찰 가면 뒤에 숨겨진 눈동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에 몸이 짓눌리는 그 공포를.

제아무리 진무량이 내공을 잃었다 한들, 아무리 경계해도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허나 유서하 역시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려 온, 비천검문의 누구보다 총명하다고 알려진 여인. 그런 유서하를 믿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유서하가 잘못된 곳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라며, 어떤 상황이 찾아오더라도 그녀의 목숨을 지키는 것.

견무겸이 잠깐 동안에 상념에서 깨어날 쯤에 진무량이 옷을 바꿔 입고 밖으로 나왔다.

진무량은 전체적으로 붉은 색 바탕의 옷을 입고 그 위에 흰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도포를 입었다. 흰색 도포는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몸 전체를 덮었고 그 위의 붉은 색의 허리띠를 맸다.

소매 끝자락과 옷이 여며지는 부분에 금색 실로 고풍스런 자수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이 전체적으로 더욱 고급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데 일조했다.

포목점 여주인은 진심으로 보람 찬 미소를 지으며 유서하에게 말을 걸었다.

“이 포목점을 연 지 이십 년 만에, 옷을 입기 전과 입은 후가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은 처음 보네!”

그만큼 진무량의 전체적인 외견이 확 달라진 것이다.

허나 특유의 사나운 눈매만은 변하지 않고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진무량이 말했다.

“볼일 끝났으니 대장간으로 가지.”

잘생긴 인상의 비싼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대장간 주인은 말씨름하던 상대를 팽개치고는 재빨리 그쪽으로 움직였다.

“손님. 어서 오십쇼!”

“창.”

잘생긴 청년의 갑작스럽고 확고한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갑작스러워 대장간 주인은 다시 한번 물었다.

“예?”

“창, 어디 있냐고.”

대장간 주인은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진무량에게 비싼 창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예! 저쪽에 아주 좋은 놈들이 많이 있습죠!”

진무량은 대장간 주인의 손가락이 향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장식이 된 창부터 시작해서 길고 짧은 여러 가지 모양의 창이 모여 있었다.

진무량은 수많은 창을 스윽 한번 훑어보더니, 가장 구석진 곳에 놓여있는 창을 집었다.

진무량이 집어든 창은 주로 말을 탄 상태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이 대장간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창이기도 했다.

다만 그 창은 특성상 잘 팔리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녹이 슬고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견무겸과 유서하는 대장간 입구에서 진무량이 창을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진무량은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창을 가볍게 쥐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앗!’

유서하는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진무량이 창을 가볍게 휘두르는 모습이 그녀의 아버지인 검선의 모습과 순간적으로 겹쳐서 보였기 때문이다.

진무량은 검을 사용하는 아버지와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도 달랐고, 심지어 그가 사용한 창은 한눈에 보아도 그리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진무량은 내공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헌데 진무량이 가볍게 창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분명히 그와 검선의 모습이 비슷하게 겹쳐서 보였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일까?’

유서하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진무량이 창을 휘두르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봐왔던 모습이 아닌 무인으로서의 진무량의 일면을 본 것이었다.

무인으로서 일류를 훌쩍 넘어선 초절정의 고수만이 풍길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가 검선과 닮았던 것이다.

진무량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서하를 발견하고는 능숙하게 창을 한 바퀴 돌려서 창날을 아래로 향하게 한 채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이거면 돼.”

유서하는 방금의 의아함을 내색하지 않으며 평소처럼 말했다.

“더 좋은 것도 많아 보이는데 그걸로 살 건가요?”

“내가 썼던 염옥창. 그게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을 써도 막대기일 뿐이니까 상관없어. 이게 그나마 크기라도 제일 비슷해.”

유서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장간 주인에게 창의 값을 지불했다.

유서하가 계산을 끝내고 진무량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대장간 문 밖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평소와 다른 기색을 보이는 진무량에게 의문을 느낀 유서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으로 좇았다.

진무량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여인 같이 호리호리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활을 등에 걸치고 사내가 걷고 있었다.

유서하는 진무량이 왜 저 사내를 바라보는지 의문이 생길 때쯤 진무량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친숙한 기운인데.”

죽립 아래에서 유서하의 약간 굳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뜻이죠?”

“요즘 강호에 혈월회가 자주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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