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2화 (2/143)

2화. 동행

2017.04.09.

사내는 거대한 절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모래를 가득 담은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지만 그는 몸이 굳어버린 양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있는 외눈의 사내, 견무겸(絹武兼)의 시선은 절벽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은 사람 하나가 엎드려서 간신히 통과할 만큼 아주 미세한 틈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몸을 꼿꼿이 세운 채 하염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

쉴 새 없이 울리던 땅이 무너지는 소리는 잠깐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허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큰 소리가 났고, 덩달아 지진까지 합세했다.

견무겸은 조금씩 초조해졌다.

지진은 점점 심해졌고, 그가 바라보는 통로의 입구도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견무겸은 허리춤에서 거칠게 검을 뽑아 들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저 안으로 들어가서 유서하를 구해야 할 때였다. 그는 무너지는 절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때, 절벽의 좁은 통로에서 익숙한 신형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신형은 견무겸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유서하의 모습이었다. 견무겸은 무너져 내리는 바위를 디디며 유서하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유서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지금까지의 걱정과 불안을 쏟아내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유서하는 정신을 잃은 진무량의 어깨를 부축한 채, 그나마 흔들리지 않는 바위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서둘러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 이 일대 자체가 곧 무너질 거야.”

유서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사뿐히 뛰어오르며 비천검문의 독문무공인 유성비보(流星飛步)를 펼쳤다. 유성비보는 쓸모없는 동작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직 속도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경공이었다.

이윽고 땅이 갈라지며 절벽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일대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유서하와 견무겸은 간신히 그 일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유서하와 견무겸은 지진의 여파가 없는 곳에 도착한 뒤에야 멈춰섰다. 그곳은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냇가였다.

“무겸, 걱정시켜서 미안해.”

유서하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외눈의 사내 견무겸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위험한 곳에 들어가시는 것을 돕지 못한, 무능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유서하는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위험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어.”

견무겸은 앙상한 뼈만 남아 마치 시체처럼 보이는 진무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견무겸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을 찌푸렸다. 안대로 가려진 눈 주변에 깊은 주름이 만들어졌다.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사내는 무림에서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극악무도한 공적이었다.

지금까지 죽은 줄만 알고 있었던 귀혈악인 진무량이 살아서 자신의 눈앞에 있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았다.

일찍이 진무량과 그가 이끌었던 멸천대는 악랄하다거나 잔혹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가혹한 고문을 서슴없이 행하고, 이미 죽어버린 시체를 욕보이기도 하며, 항복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였다.

멸천대를 증오하지 않는 자는 정파인 중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멸천대의 악행은 끝없이 이어졌고, 결국 정파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인 무림맹은 그들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했다.

무림맹은 무림 전체의 5할이 모인 거대 세력. 그런 무림맹에 의해 무림공적이라는 낙인이 새겨진 자들은 사실상 강호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셈이다.

이는 모든 악인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악의 처사였지만, 멸천대는 무림공적이라는 이름으로도 저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멸천대는 무림공적이라고 불린 이후 더욱 악명을 드높였다.

멸천대를 저지하기 위해 수많은 정파의 고수들이 나섰으나, 하나같이 그들의 강함에 무릎을 꿇었다. 멸천대를 말살하기 위해 무림맹은 명문 문파까지 대동했으나, 그마저도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진무량을 바라보고 있자니 견무겸의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의가 피어올랐다.

움켜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에라도 눈앞에 있는 진무량을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다.

“무겸.”

견무겸은 흠칫 놀라며 자신을 부른 유서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뜻이 있으실 거야.”

유서하의 차분한 어조에, 견무겸은 무의식중에 치솟았던 살의를 깨닫고 서둘러 그것을 거두어들였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유서하는 가벼운 웃음으로 견무겸의 말을 막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

* * *

희미하게 들리는 비명소리.

인간이 죽기 직전에 울부짖는 단말마가 점점 다가온다.

낯선 얼굴의 사내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발 살려주시오. 뭐든지 하라는 대로 따르겠소.”

진무량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꿈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일이 꿈을 통해 반복되는 것은 진무량에게 무척 익숙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빈번하게 겪으며 알게 된 것은, 꿈속의 자신은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진무량은 꿈속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과거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살고 싶으냐?”

진무량의 물음에 온몸의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 그렇소. 하라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진무량은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목에 시퍼렇게 날이 선 창을 겨누었다.

“네깟 놈은 내게 필요하지 않아. 그렇게 살고 싶었다면 애초에 내게 덤비지 말았어야지.”

한줌의 인정도 찾아볼 수 없는 진무량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사내는 결코 자신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히 생을 포기하게 되니 문득 독기가 일었는지, 사내는 절규하듯 외쳤다.

“진무량! 네가 저지른 이 만행은 천하에 퍼질 것이고, 넌 영원히······.”

진무량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콰직.

창은 일직선을 그리면서 피를 뒤집어 쓴 사내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그로 인해 피가 분수처럼 튀어올라 진무량의 얼굴을 적셨다.

“시끄러운 놈이군.”

얼굴에 튄 검붉은 피를 털어내며 진무량이 낮게 읊조렸다.

“연시우(硏時雨).”

진무량의 말이 끝나자 그의 뒤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진무량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에는 관심이 사라진 듯, 진무량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상태는?”

“이곳에 매복했던 혈월회 살수 오십팔 명 전원 섬멸했고, 저희의 피해는 경미한 부상자 두 명입니다.”

“부상을 입은 쓸모없는 놈들은 지금 즉시 멸천대에서 추방시킨다. 그리고 이놈들의 눈알과 귀를 도려낸 후에 인림(人林)을 만들어, 아직 숨어있는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도록 해.”

진무량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검은 갑옷을 두른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일체의 망설임 없이 시체들의 눈알을 파내고 긴 장창으로 몸을 꿰뚫은 뒤에 땅에 박아 넣었다.

시체들을 꽂은 창이 하나씩 세워지면서 주변은 순식간에 인간의 시체로 둘러싸인 숲의 모양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던 인간들이 창에 꿰인 고깃덩어리로 변해버렸다.

끔찍한 풍경이었으나, 진무량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숲을 아무런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언제나 똑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듯이.

그때 동쪽에서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내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를 끌고 있는 두 마리의 백마가 하얗고 고운 갈기를 털며 자리에 멈춰 섰다.

진무량의 시선이 마차를 향할 때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며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왔다.

그는 이 감각도 잘 알고 있었다.

꿈에서 곧 깨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감각이었다.

매끄럽고 하얀 말이 끄는 마차에서 사뿐히 내리고 있는 여인의 발끝이 보였다.

“추연희······.”

말을 내뱉는 순간 안개가 휘몰아치더니, 모든 것이 사라지고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질끈 눈을 감자 이어지는 지독한 두통. 척추의 뼈가 뇌를 뚫고 올라가는 것만 같다.

지독한 고통과 함께 천천히 진무량의 눈이 떠졌다.

* * *

진무량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눈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배경으로, 험악한 외눈박이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몸은 줄로 결박되어 있었다.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빛이 들어오는 창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다탁, 그리고 고풍스러운 무늬가 그려진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견무겸은 눈을 뜬 진무량을 바라보며, 대놓고 적대감이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이 들었나?”

진무량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큭큭 거리는 것으로 시작한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갔다.

“크하하하하하!”

“이놈! 당장 닥치지 못할까!”

진무량은 견무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느라 견무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은 혈마옥 내에서와 똑같았으나 그 또한 개의치 않았다.

그 어떤 희망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혈마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포기하지 않는 것밖에 없었던 끔찍한 그곳에서 드디어 빠져나온 것이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혈마옥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만이 미치도록 기뻤다.

진무량의 웃음이 점점 잦아들 때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유서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서하는 기관 속에서와 달리 깔끔한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자연스레 푼 데다, 검은 무늬가 섞인 보라색 경장을 입고 있는 그녀의 미모는 단연 돋보였다.

그 어떤 사내라도 본능적으로 돌아볼 수밖에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유서하는 진무량을 향해 다가가 결박해 두었던 줄을 풀면서 말을 이었다.

“혼절한 상태에서 심하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임시로 결박해 두었어요.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진무량은 굳이 저항하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유서하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진무량과 유서하는 마주 앉은 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한 묘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 찬 상황, 문밖에서 뜬금없이 쾌활한 점소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식을 들여도 될까요?”

유서하가 짧게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점소이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점소이는 눈앞에 있는 유서하의 빼어난 미모에 잠시 넋을 잃었으나, 분위기가 험악한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음식을 다탁에 올린 후 방을 빠져나왔다.

대화를 먼저 시작한 것은 유서하였다.

“당신이 정신을 잃은 동안 값비싼 영약들을 먹여놓았으니, 말을 하는 데 별로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물론 이 정도 음식은 충분히 소화시킬 수 있을 거고요.”

진무량은 삼 년째 음식을 맛보지 못했다.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향이 피어오르는 음식은 진무량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식욕을 자극했다.

허나 그는 음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진무량은 지금 이 상황이 모두 의심스러웠다.

유서하의 의중을 파악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진무량이 말했다.

“이미 내 성격은 알고 있을 테니 이제 와서 착한 척할 필요는 없고, 요점만 말하지. 왜 나를 살린 거지? 그리고 나한테 원하는 것이 뭐지?”

“전 지금 비천검문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에요. 제가 받은 명령은 당신을 현암사에 산 채로 데려가는 것뿐이죠.”

“무림맹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스럽게 나를 살리고 만나려 한다……. 그 이유는 재수 없는 네 아비에게서 들어야겠군.”

유서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무림맹에 비밀로 했다고 생각하시죠?”

“나를 데려가려는 인원이 고작 두 명이라니, 너무 적어. 아무리 내공을 잃었다 하더라도, 내 존재를 아는 자들이라면 몇백 명은 데려왔겠지.”

유서하는 향긋한 차를 찻잔에 따랐다.

“그래서요?”

진무량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뻔하지. 정파놈들은 내가 이곳에 있는지 몰라.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검선의 독단. 넌 검선의 여식이고, 은밀히 나를 데려가는 것이 임무인 거겠지.”

유서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맞는 말이에요.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진무량은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며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쪽은 검선 유월천이다. 그는 자신을 살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문득 기관 안에서 유서하의 말이 떠올랐다.

ㅡ아버지께서는 강호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큰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예상하셨어요. 그리고 당신만이 그 혈풍을 잠재울 수 있는 열쇠라고 하셨어요.

진무량이 아주 미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개뼈다귀 같은 말은 잊는 것이 낫다.

알 수 없는 것을 일단 제쳐둔다면, 가장 급한 일은 내공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앞길을 방해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공을 되찾을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내상을 겪어 보았기에 어지간한 내상이라면 알아서 치료할 자신이 있으나, 지금 자신이 입은 내상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특이한 내상이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마교로 돌아가서 시간을 들여 내공을 되찾는 방법을 찾는 것일 테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곳에서 어찌 도망친다 하더라도, 유서하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무림맹에 알린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정파의 세력권인 이곳에서 내공을 잃은 채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마교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내상을 확실히 고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유서하라는 저 여자가 자신의 내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로가 없다면 정면승부가 언제나 해답.

마교로 돌아갈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내공을 되찾을 방법은 당장 저 여인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유서하를 더 알아내야 했다.

그녀의 성격, 약점, 강점. 그 모든 것을 알아낸 후에 그것들 중 어떤 것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내공을 되찾아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진무량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 내가 만약 네 입장이었다면 나를 결박한 채 죽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음식만 먹이며 현암사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널 속인 적도 있고. 헌데 나한테 이런 대접을 해주는 이유가 뭐지?”

유서하는 찻잔에서 안개처럼 흘러나오는 차의 향을 맡으며 느긋하게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단순히 당신을 데려오는 임무였다면 아버지는 저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으셨을 거예요. 만약 아버지의 말씀대로 당신이 강호의 피바람을 멈출 수 있는 자라면, 당신을 억압하는 것은 훗날 좋은 일이 아니겠죠.”

유서하는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와 같지 않다는 것쯤은 예상이 가능해요. 허나 저는, 제가 변하지 않는 믿음을 주면 어떤 자라 해도 뜻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무량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역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이다. 그토록 자신을 증오했던 정파 쪽에서 이런 일을 벌인다면 분명 뭔가 감춰진 흉계가 있을 것이었다.

또한 유서하의 방금 했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강호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호는 모든 것을 오로지 힘으로 말하는 곳.

그런 강호에서 믿음이라는 것만큼 쓸모없는 가치는 없다.

만에 하나 믿음으로 거대한 힘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은 금방 무너질 모래성일 뿐이다.

힘을 얻기 위해 사람을 손에 넣어야 한다면, 그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배다.

강호에서 남을 믿는 자는 머저리일 뿐이다. 성공할 확률이 없는 도박에 거는 멍청한 노름꾼이나 다름없다.

허나 유서하라는 여자가 내뱉는 말은 지금의 자신에게는 아주 이로울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 상황은 유서하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다.

“좋아.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내상을 씻은 듯이 없앨 수 있는 거지?”

“그건 서로가 믿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 말해드리도록 하죠.”

‘그저 어린 골빈 계집은 아니군.’

진무량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특이한 비웃음을 지었다.

“좋아. 일단 너와 뜻을 함께하지. 내 요구사항은 하나,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최소한의 회복시간을 줄 것. 받아들이겠나?”

유서하는 잔을 소리가 나지 않게 내려놓은 후 말했다.

“받아들이죠. 잠시 동안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시지요. 허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만은 삼가주세요.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 무겸을 호위로 쓰도록 하죠.”

진무량은 혐오스러운 것을 만질 때 짓는 표정을 지었다.

“시커먼 사내놈이 호위하는 것은 정말 역겹고 납득할 수 없는 이유지만, 나도 받아들이지.”

진무량은 견무겸을 잠깐 꺼림칙한 시선을 던지고서는, 유서하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내공도 없는 내 기척을 느끼는 것은 쉬울 테니, 감시원 같은 호위무사는 옆방에 있게 해줄 수 있나?”

“그러지요. 서로 생각할 것이 많을 테니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할게요.”

유서하는 자리를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고, 견무겸은 일부러 진무량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유서하에게 고정한 채 뒤를 따랐다.

진무량은 모두가 나간 후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서 의식을 몸속으로 전환했다.

서서히 자신의 호흡,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장기의 상태가 보였다.

의식을 더욱 집중해서 온몸의 모든 근육을 세세하고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점점 더 내면으로 들어가며 혈액의 흐름과 장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점검했다.

그가 놓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이 모두 고유의 역할에 맞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면의 의식을 조심스레 단전 쪽으로 움직였다.

아무리 집중해 봐도 과거 단전에서 흘러넘치던 내공은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진무량은 천천히 눈을 뜨며 가부좌를 풀었다.

실망감이나 절망은 느끼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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