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악무도-1화 (1/143)

1화. 혈마옥

천천히 의식이 살아난다.

그와 동시에 온 몸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감각들.

힘겹게 눈꺼풀을 위로 올렸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을 감고 있었을 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앉지도 서지도 못하게 팔목과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차가운 쇠사슬의 감촉.

어디서 풍겨오는지 알 수 없는 퀴퀴한 냄새.

오늘도 어제와 같은, 아니, 이곳에 처음 갇히게 된 그날부터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항상 끔찍하도록 모든 것이 똑같다.

지독한 고통과 함께 느껴지는 끔찍한 허기.

신체의 자유가 억압된 채 정신만 깨어 있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공간.

언제나 느껴왔던 차가운 쇠사슬의 감각을 다시금 느끼자 더러운 기분이 올라왔다.

이 더러운 기분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은 언제나 하나로 귀결된다.

죽음.

‘젠장.’

소리를 내지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거친 육두문자를 속으로 삼킬 뿐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마음이 진정된다.

언제까지 나약한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다.

여전히 몸에는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지만, 천천히 의식을 집중해서 몸의 가장 끝 부분부터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의식이 보내는 신호에 몸이 반응하면서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왔다.

이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시작해야 한다.

똑. 똑.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였다.

그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목을 힘겹게 앞으로 내민 뒤 억지로 입을 벌렸다.

이내 물방울이 입 안으로 떨어지며 혀를 적셨다.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 물방울만으로 목숨을 유지해 왔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평범한 물방울은 아닐 것이다.

잠시 그것에 대해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금방 관두었다. 중요한 건 무엇을 먹고 있는지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 한줌의 희망도 없는 이 암흑 속에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포기하지 않는 것.

이 빌어먹을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할 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결코 포기가 먼저일 수는 없다.

항상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콰와아앙!

그때 갑자기 엄청난 진동과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뭐지?’

의문을 느낌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이런 소리가 들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곳에 갇힌 이후,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던 끔찍한 일상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자국 소리.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거세게 뛰었다.

이곳에 갇힌 뒤로 증오 이외의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기대감인지, 혹은 두려움이나 희열인지 알 수 없었다.

온몸에 알 수 없는 전율이 흘렀다. 근육은 미묘한 경련을 일으켰고, 두뇌는 끊임없이 회전했다.

거칠게 뛰는 심장소리를 느끼며,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 *

탁.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덩달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릉.

진동은 점점 심해지며 괴이한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이어졌다. 뒤이어 동굴의 천장을 이루는 거대한 암석들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끝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만들어진 암석들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지면과 부딪쳐서 사방으로 튀었다.

천장을 이루는 암석들이 모두 떨어지자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이 향한 곳은 엉망으로 무너져 내린 암석 위에 우아한 모습으로 서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한 갈래로 질끈 묶은 긴 머리카락.

땀에 젖어서 드러나는 아름다운 곡선의 몸매와 하얀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빼어난 미인이었다.

기관을 통과하느라 여기저기 먼지가 묻고 초췌해진 모습이었으나, 그런 사사로운 것들로는 그 여인의 아름다운 미모를 감출 수 없었다.

여인의 미모를 보는 순간 누구나 똑같은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

천하일색(天下一色).

유명한 화공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환상적인 미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휴우. 이번에는 조금 위험했네.”

더 이상 암석이 떨어지지 않자 상황을 살피려 천장을 올려다보며, 여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쿠구구구구.

그 순간 발밑이 흔들거리더니 곧바로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암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떨어지면서도 여인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고, 무너지는 땅을 이리저리 밟고 튀어오르며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던 빛도 이곳에 닿지는 못했다. 여인은 주머니 속에서 야명주를 꺼내 주위를 비췄다.

야명주의 희미한 빛을 통해,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절벽이 보였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절벽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절벽을 손으로 만지며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절벽을 만지던 여인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이질적인 감촉을 느낀 것이다.

‘이건 뭐지?’

의아함을 느끼며 여인은 낯선 감촉이 느껴진 곳을 야명주로 비췄다. 희미한 야명주의 불빛이 닿은 벽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귀혈악인(鬼血惡人) 진무량(賑撫亮).

지상 최악의 악인을 이곳에 봉하노라.

진무량을 깨우려 하는 자는 이곳에서 발걸음을 돌려라.

천하가 피에 잠기고 절규로 가득한 세상을 원하는 자만이 이곳을 지나라.

―비천검문 검선 유월천―

유월천. 이 글은 여인의 아버지가 남긴 글귀였다.

여인은 글귀를 바라보며 문득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검선, 검의 신선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아버지는 언제나 인심이 후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늘 사람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셨던 아버지께서 이런 글귀를 남겼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글귀를 읽고 경계심을 더욱 높인 여인은 다시 한번 절벽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여인은 튀어나온 바위를 발견했고, 그곳을 누르자 굉음이 울리고 먼지가 치솟으며 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이내 주변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불길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주변을 뒤덮어 갔다.

불꽃은 매캐한 연기를 내며 점점 붉게 타올랐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여인은 마음을 다잡으며 서서히 눈을 감은 뒤, 손가락을 허공에 뻗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에서 기이하게도 공기를 스치는 듯한 소리가 만들어졌다. 여인은 계속해서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여 그 소리를 잔잔한 음으로 만들었다.

거센 불길은 여인이 만드는 음을 삼키고 춤을 추듯이 더욱 더 거세게 타올랐다.

곧이어 주변의 모든 것이 흔들리더니, 공간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맹렬한 불길이 여인을 덮었다. 그 위로 크고 작은 암석들이 떨어져 그녀를 완전히 뭉개버렸다.

더 이상 여인의 모습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손끝에서 공기를 어루만지며 만들어낸 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울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멈추지 않고 타오르던 불길은 점점 잦아들었고, 여인을 짓눌렀던 바위의 모습은 안개가 흩어지듯 옅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여인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녀는 바위에 깔리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던 불꽃은 기세가 점점 사그라지더니, 천천히 여인의 눈앞으로 모여들어 붉은 글귀를 남기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어리석은 자여.

지금 그대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천하는 피에 잠길 것이다.

이를 원치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려라.

이곳을 지난다면 살아서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죽은 후에는 지옥에 떨어져 그대의 영혼은 단 한순간도 쉴 수 없을 것이다.

글귀를 다 읽는 순간 먼지가 섞인 광풍이 휘몰아쳤다.

여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한바탕 휘몰아쳤던 광풍이 끝나자 여인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과연.”

여인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붉은 글귀가 적혀있던 절벽은 사라지고 그곳에 커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여인은 기관의 시련이 끝난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여인의 아버지인 검선 유월천이 천하에서 최고라 불리는 기관사들, 그리고 기문진법을 사용하는 자들과 함께 음양오행을 이용해서 만든 천혜의 기관이자 감옥인 혈마옥이다.

미리 함정의 종류와 위치를 알고 왔음에도, 생각했던 것과 실제로 겪은 것은 많이 달랐다.

불길이 몸에 닿을 때, 그리고 암석에 깔릴 때의 그 충격은 정말 현실처럼 느껴졌다.

손끝으로 음을 만들며 환각의 존재를 계속해서 되뇌지 않았다면, 환각에 의해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찾아왔다면 결코 이 시련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인은 앞에 있는 통로를 향해 한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 * *

사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어둠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미세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야명주의 희미한 노란 빛이 사내의 다리를 비추고는 멈칫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이 되는 것은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금세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냉철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한 것이다.

희미한 야명주의 빛이 사내의 발을 지나 얼굴을 향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야명주의 빛이 들어오자, 사내는 짧은 신음을 내며 눈을 찡그렸다.

“크윽.”

여인은 예상치 못한 사내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야명주의 빛을 사내의 가슴 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사내는 눈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빛을 통해, 사람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자신이 보는 것이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옅은 빛을 뿜는 야명주를 든 여인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혈마옥을 찾아온 여인, 유서하(宥恕河)는 어떤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복잡하다 보니 쉽사리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기에 그저 쇠사슬로 칭칭 묶인 사내를 살필 뿐이었다.

사내는 언뜻 보기에는 시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의 몰골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고, 의복은 헐어서 군데군데 찢어진 상태에다, 몸은 비쩍 말라 온몸의 뼈가 모두 보일 지경이었다.

사내의 모습을 살피다가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가려진 사내의 눈을 보는 순간, 유서하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사내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미지의 공포심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두려워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유서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는, 사내와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는 유서하가 지금까지 만나 온 사람들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눈앞에 사내가 내뿜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지독한 살의였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짐승을 바라보는 기분.

긴 시간 억눌려온 짙은 노여움이 그의 흑색 눈동자 안에서 일렁였고, 그것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온몸이 베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악(惡)을 형상화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유서하는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한참 동안이나 사내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유서하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당신이 사대신마(四大神魔) 중 한 명인 귀혈악인(鬼血惡人) 진무량(賑撫量)인가요?”

진무량의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열리자, 음산한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렇다.”

진무량의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넌 누구냐?”

“제 이름은 유서하. 당신을 여기 가둔 검선 유월천의 여식입니다.”

유서하의 말이 끝나자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진무량은 아주 잠깐 동안 느꼈던 희망이 완전히 박살나는 것을 느꼈다.

영겁의 시간 같은 잠깐에 침묵을 깬 것은 진무량이었다. 그의 비쩍 마른 몸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큭큭큭…….”

잘 들리지도 않는 마치 읊조림과 비슷한 소리였지만, 그것이 진무량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웃음소리였다.

잘 들리지 않는 그 웃음소리에는 지독한 허무함이 배어 있었다.

“유월천의 여식이 왜 나를 찾아온 거지……? 그 새끼가, 내가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해오라고 하던가?”

진무량의 목소리는 죽기 직전의 환자처럼 힘도 억양도 없었다.

“아니요. 저는 당신을 풀어주라는 명을 받고 왔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의 진무량의 한쪽 눈이 찌푸려졌다.

무슨 수작이지?

진무량은 일단 여인의 말을 듣기 위해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께서는 강호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큰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예상하셨어요. 그리고 당신만이 그 혈풍을 잠재울 수 있는 열쇠라고 하셨어요.”

진무량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지금 이곳을 나간다면 자신이 천하를 피바람으로 덮어버릴 생각인데, 그것을 멈출 사람이 자신이라고?

허나 이것은 자신이 풀려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고, 그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넌 이곳에서 나를 풀어주러 온 것 아닌가?”

“네. 맞아요.”

망설임 없는 대답과 달리, 유서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나를 풀어주러 왔다면 일단 이 사슬부터 끊어라.”

“이 사슬은 만년한철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끊을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자가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인가?”

“이 기관은 한번 통과하고 나면 그 누구도 따라 들어올 수 없도록, 모든 길이 막혀버리게 만들어졌어요.”

“…….”

진무량은 울컥 짜증이 솟구쳤지만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지금 나랑 장난을 하자는 건가?”

유서하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아니에요. 다만 이제부터 당신을 믿어도 될지 망설여지는군요.”

“지금 이 상태로는, 나는 네게 아무런 믿음을 줄 수가 없다. 선택은 네 몫이다.”

진무량과 유서하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유서하는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주위의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은 뒤, 등에 메고 있던 금(琴)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유서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천천히 현을 어루만졌다.

현이 떨리며 소리가 되고, 소리는 운율을 만들며, 이는 하나의 음이 되어 이어졌다.

그녀가 연주하는 음은 음산하고 무거워, 마치 귀신이 나오기 전과 같은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진무량은 유서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풀어 주러 왔다면서 갑자기 악기나 연주하고 있다니, 뭘 어쩔 생각인 건지.

진무량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유서하의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음?’

진무량은 자신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눈치챘다.

진무량의 단전에서 끝도 없는 내공이 세찬 폭포수 같이 터져 나온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선 유월천에게 당한 내상으로 인해 자신은 내공을 조금도 운용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내공을 사용할 수만 있었다면 이따위 곳에 갇혀있을 이유도 없었다.

헌데 지금 저 여인이 만드는 음에 맞춰서 내상이 씻은 듯이 나았고, 어느새 단전 안에는 내공이 마구 넘쳐나고 있었다.

“크크크크…….”

진무량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크하하하하하!”

진무량은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그러자 조금 전의 힘없는 웃음과 달리 그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그 소리에 동굴의 벽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떨렸다.

진무량은 한바탕 크게 웃어젖힌 후, 몸 안의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끝을 알 수 없는 내공은 기문혈을 타고 혈해혈을 때리면서 증폭했고, 이내 태백혈을 타고 진무량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지독한 굶주림과 온몸을 뒤덮은 피로가 점점 사라지며 그 자리를 무한한 힘이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내공을 운용하기 시작하자 진무량의 몸에서 심연의 어둠보다 더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묵색 기운은 주변을 더욱 검게 물들였다.

진무량은 온몸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며 가볍게 팔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타앙!

그와 동시에 진무량을 옭아매고 있던 만년한철이 청아한 소리를 울리며 끊어졌다.

진무량은 양 팔과 다리에 있는 모든 쇠사슬을 가볍게 끊어버린 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유를 만끽했다.

완벽한 신체의 자유를 확인한 그는 냉소를 띈 얼굴로 유서하를 쳐다보았다.

“아주 고맙군. 이곳에서 꺼내주는 것뿐 아니라 내상까지 없애주다니.”

“그럼…….”

유서하의 말이 시작되려는 찰나, 번개처럼 다가온 진무량의 손이 유서하의 목을 움켜쥔 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유서하는 숨이 막히는 상태에서 진무량을 향해 간신히 말했다.

“으윽! 이, 이게…… 무슨…….”

유서하는 숨이 막히는 고통으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가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했나?”

진무량은 고통스러워하는 유서하를 내려다보며 손에 힘을 천천히 풀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설마 나를 믿었던 건가?”

진무량에게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유서하는 전혀 기죽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재수 없는 눈빛은 마음에 드네.”

휘익.

진무량의 말이 끝나는 순간 유서하의 무릎이 그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허나 진무량은 가볍게 피하면서 유서하의 목을 움켜쥐고 반대쪽 벽으로 밀쳤다.

밀쳐진 유서하의 몸은 그대로 날아가 튀어나온 벽에 부딪쳤다. 그녀의 왼팔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진무량이 쓰러진 유서하를 향해 다가갔다.

“난 너처럼 헐렁한 성격이 아니라서 누군가를 믿지 않아. 그리고 후환이 될 싹은 절대로 남겨두지 않지.”

진무량이 내공을 손끝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손끝이 검게 변하며 마치 검은 칼날처럼 변했다.

유서하는 주저앉은 채로 다가오는 진무량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꾼다면 고통을 줄여드릴 수는 있어요.”

유서하의 말에서 진무량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무슨 수를 쓰기 전에,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의 목을 부러뜨려야 했다.

허나 그 순간 진무량의 몸이 갑자기 굳어버린 듯 멈추더니,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으윽.”

진무량은 몸의 이상을 깨닫고는 재빨리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원인은 몸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방금까지 단전에서 넘쳐흘렀던 내공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모두 제멋대로 움직이며 소멸해 버리고 있었다.

진무량은 재빨리 내공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내공은 마치 몸에서 빠져나가듯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내공이 사라질수록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뒤덮어 갔다.

벽에 손을 짚고 버티려 했으나 어림없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몸은 점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진무량은 유서하를 노려보며 신음했다.

“크윽······! 너, 내 몸에 무슨 짓을······?”

“당신의 내공은 제가 금을 연주할 동안만 유지되죠.”

피가 흐르는 왼팔을 오른손으로 지혈하면서 유서하가 말을 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당신의 몸을, 제가 만든 내공으로 억지로 움직이게 한 거예요. 그 내공이 다시 없어졌으니 당신의 몸은......”

유서하는 그 뒤로도 말을 이어갔지만, 진무량은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때문에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불타고 모든 근육들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고통은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졌고, 이내 진무량은 정신을 잃었다.

그 순간 지반이 흔들리더니, 동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서하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기관이 발동했기에, 동굴이 무너질 것이라는 건 이미 그녀의 예상 범위에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진무량이 내공을 터뜨리면서, 예상보다 더 빨리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진무량을 부축하며 재빨리 출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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