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 광세일소_한추영 - 172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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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애(愛), 혹은 증(憎) (6)
“대주님!”
사소혜가 석추명을 보고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대주님, 죽으면 안 돼요. 대주님!”
사소혜가 달려와 석추명을 붙잡고 오열을 터뜨렸다. 불모 황연화가 죽고 백련신교 총단을 떠난 이후로 늘 함께했었기에 석추명은 자신에게 오라버니와 다름없었다. 석추명이 독고양의 심법을 얻으려고 화산으로 갈 때도 사소혜가 함께했었고, 절세기연을 얻어 화산신검이 되어 나올 때도 사소혜가 맞이했었다. 귀면쌍살의 장력에 맞아 무공을 잃었을 때도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사소혜였다. 그러니 자연히 석추명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석추명을 붙잡고 서럽게 울부짖는 사소혜를 임예린이 옆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토닥였다.
한참을 울부짖던 사소혜가 석추명의 등에 꽂힌 검을 바라보았다.
“이, 이것은...!”
사소혜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석추명의 등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검을 뽑아도 피가 그렇게 튀지는 않았다.
사소혜가 자신의 손에 든 검을 낯익은 듯 내려다보더니 기하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검, 기 대협 검이지요?”
물기 묻은 사소혜의 눈빛에서 분노가 일렁거렸다. 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기하진은 넋이 나간 채 석추명의 팔만 붙잡았다.
“말해봐요. 이게 당신 검인지 아닌지!”
사소혜가 검을 기하진에게 겨냥하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기하진이 천천히 검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꿈을 꾸는 듯 눈빛은 몽롱했다.
옆에 있던 임예린은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사소혜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사 소저. 하진 오라버니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임예린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사소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묻고 있잖아. 이 검, 이게 누구 것이냐고!”
“내게 맞소. 그 검은, 그것은, 내... 검이오.”
기하진이 망연자실한 듯 넋이 나간 눈빛으로 사소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천하의 파렴치한! 당신 때문에 대주님이 얼마나 마음을 쓰셨는데, 당신 때문에 대주님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친동생으로 여기던 당신이 대주님을 죽이다니, 이 천하의 몹쓸 인간.”
사소혜가 금방이라도 기하진에게 검을 꽂을 듯이 소리쳤다. 기하진은 석추명의 죽음에 넋이 나가 제대로 변명조차 못했다.
“사 소저, 아니라니까! 제발 내 말을 좀 들어줘요. 하진 오라버니가 아니에요.”
임예린이 사소혜의 팔을 잡아당겼으나 사소혜는 콧방귀를 뀌며 팔을 떨쳤다. 그러자 임예린은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당신도 똑같아. 대주님이 당신 두 사람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아?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했는지 아느냐고. 뭐? 기하진이 한 짓이 아니라고? 그 말을 누가 믿을 것 같아? 이렇게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 아니라고? 어젯밤부터 여기서 기하진 저 자식과 우리 대주님이 싸우고 있었던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알고 있었다고.”
사소혜의 말에 임예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하진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했지만 나오지 않았어. 왜인 줄 알아?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야. 임 소저, 당신이 있으니까 저 속이 좁아터진 무림맹 샌님이 설마 비열한 짓으로 우리 대주님을 괴롭히려 한다 해도 당신이 말릴 줄 알았어. 당신이!”
사소혜의 말이 구구절절 맞았기에 임예린은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릴 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 소저, 아가씨의 말은 맞소. 내가―”
“당신도 입 다물어요! 당신이 항상 임 소저를 두둔하는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아니까. 임 소저가 무슨 짓을 했든 당신은 무조건 임 소저 편을 들 거잖아요. 아닌가요?”
사소혜의 앙칼진 목소리에 일봉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때 기하진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죽이지 않았어. 내가 형님을 왜 죽여? 그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 뿐, 정말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야. 내, 내가 아니라고.”
정신이 나가 중얼거리는 기하진의 말은 얼핏 들으면 마치 자신이 범인이라고 인정하는 듯했다. 그 말을 들은 사소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죽였다? 역시 네놈 짓이었군. 이 간악한 놈. 마교 출신이라고 저 늙은이들과 함께 우리 대주님을 그렇게 무시하더니, 역시 네놈 짓이었어.”
사소혜가 기하진의 뒤에 서 있는 청풍도장과 현암자 등을 노려보자 가슴이 뜨끔한 노도장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네놈도 대주님 곁으로 보내어주마. 저승에서라도 대주님께 무릎 꿇고 빌어.”
말을 마친 사소혜가 손에 쥔 검으로 기하진을 푹 찔렀다. 기하진의 무공이라면 절대 사소혜에게 당할 리 없겠으나 지금은 공력이 모두 고갈된 데다 석추명의 죽음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게다가 사소혜는 제대로 무공을 배운 고수였기에 검을 쓰는 손길이 장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소혜가 검을 번쩍 쳐든다 싶더니 그대로 기하진의 가슴을 질풍같이 찔렀다.
“헉!”
그러나 비명을 지른 사람은 기하진이 아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옆에 있던 임예린이 자신의 몸으로 기하진을 감싸며 사소혜의 검을 받아낸 것이다. 마치 아까 석추명이 그랬던 것처럼.
“임 소저!”
사소혜가 놀라서 검을 떨구었다. 임예린의 등에 난 선명한 칼자국에서 붉은 선혈이 샘솟듯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예린아!”
기하진이 놀라서 임예린을 붙잡았다.
“네, 네가 왜...?”
임예린이 슬픈 눈빛으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오, 오라버니의 잘못이 아니에요. 저도, 추명 오라버니도, 오라버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임예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악!”
기하진이 임예린을 안은 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자신은 그저 임예린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리고 가끔 추명 형님을 만나서 함께 낚시라도 하며 유유자적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세월 가는 대로 늙어가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소박한 바람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상 자신에게는 닿을 수 없는 꿈이었다는 것을. 그것 자체가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만약 예린이가 자신을 거부했을 때 마음이 아플망정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꾸던 꿈처럼 세 사람이 함께 오순도순 늙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습은 다소 바뀌었겠지만.
자신이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기하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가슴 속에 심장이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어린아이처럼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지 말아요, 오라버니.”
임예린이 힘겹게 손을 뻗어 기하진의 눈물을 닦았다. 조금 전 석추명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기하진이 정신이 나간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죽지 마라. 제발 너마저도 나를 두고 가지 마. 제발!”
임예린은 그런 기하진이 가여운 듯 다시 한번 기하진의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석추명이 그랬던 것처럼 힘 빠진 손을 땅바닥에 툭, 하고 떨구었다.
“예린아!”
기하진이 임예린을 안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처절하게 우는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 중 눈물을 글썽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숨을 거둔 임예린 옆에는 피 묻은 기하진의 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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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형 정도련주 화산신검 석추명지묘(亡兄 正道聯主 華山神劍 惜秋明之墓)
- 망매 정도련군사 임예린지묘(亡妹 正道聯軍師 林藝隣之墓)
기하진이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기하진이 석추명의 비석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바닥에는 차갑고 딱딱한 화강암의 느낌만 전해질 뿐, 늘 따뜻하던 석추명의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기하진이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임예린의 비석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문득 바람이 살랑 불면서 어디선가 꽃향기가 났다. 임예린이 다가오면 늘 나던 냄새라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사방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예린아”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가운 늦여름 햇살을 즐기는 나비 몇 마리와 때 이른 잠자리 떼만 날아다닐 뿐이었다.
잠시 스쳐 간 그 향기는 어디서 났던 것일까. 고개를 돌리니 문득 임예린의 무덤가에 노란색 들꽃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미풍에 한들거리는 모습이 꼭 임예린이 화사하게 웃는 모습 같았다.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예린아”
지난 몇 개월간 기하진은 고통 속에서 지냈다. 정도련 련주직은 진즉 개방의 송 방주에게 물려주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저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혼자 우두커니 방 안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정말 가슴이 못 견디게 답답한 날이면 이렇게 석추명과 임예린의 묘를 찾아왔다.
이 두 사람은 결국 죽어서도 나란히 묻혔으니 자신보다는 덜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은 석추명이 부럽기조차 했다.
“형님, 그곳은 좀 지낼 만하십니까? 그래도 예린이와 함께 있으니 저보다는 형님 팔자가 나은 듯합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혼자입니다. 밥도 혼자 먹고, 잠도 혼자서 잡니다. 가끔 형님과 예린이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꿈에라도 한번 찾아오실 법도 하건만, 어째서 형님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직도 저에게 많이 서운하신 게지요? 그래서....”
기하진이 석추명의 무덤을 향해 혼잣말을 내뱉다가 갑자기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형님. 정말 미안합니다. 이 묘 속에는 형님이 아니라 제가 들어갔어야 했는데.... 형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기하진의 두 뺨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그 모습을 일봉과 사소혜가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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