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99화 (199/201)

#   199 - 광세일소_한추영 - 17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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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8화 애(愛), 혹은 증(憎) (5)

화룡(火龍)이 꿈틀거리듯 기하진의 검이 석추명에게 돌진했다. 뜨거운 화염의 기운이 수십 개의 고리처럼 석추명을 에워쌌다. 화염에 휩싸인 석추명의 몸이 금방이라도 불에 타 사그라질 것만 같았다.

“추명 오라버니!”

그 광경에 놀란 임예린이 달려왔다.

“다가오지 마!”

임예린의 안전이 염려된 석추명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석추명의 비천검이 시퍼런 검기를 뿜어내며 화염의 고리를 깨뜨렸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화기(火氣)와 푸른 검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서 정작 소외된 기하진은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허! 예린아, 어째서 추명이 형님을 그렇게 걱정하는 것이냐? 내가 형님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내가 추명 형님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독한 놈이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

기하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처연하게 웃었다. 외로움과 서러움, 배신감 등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북받쳐 올라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진 오라버니, 제발 멈추세요. 제발!”

임예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했다. 설랑에게 납치되었을 때도, 천검총에 갇혔을 때도,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두려울망정 기하진과 석추명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믿는 두 오라버니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두 사람이 서로 칼을 맞대고 싸우고 있었다. 임예린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한 사람만을 일방적으로 응원할 수가 없었다. 기하진에 대한 감정이 석추명에 대한 감정과 다르다고 해서 기하진을 마냥 나쁘게 매도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그 감정마저 어떻게 비난하겠는가? 기하진은 어릴 때 안 그런 척 샐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살뜰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편이었다. 석추명이 마냥 자상한 오빠였다면, 기하진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짓은 못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돌봐주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말하는 솔직함도 있었다. 그래서 석추명과 임예린은 당황하기도 많이 했고, 기하진은 본의 아니게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 모습은 커서도 변한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해졌을 뿐.

지금 다투는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설마 하진 오라버니가 정말로 추명 오라버니를 찌를까? 아닐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계속 불안했다. 마음 약한 추명 오라버니가 양보한답시고 덥석 하진 오라버니의 검을 그대로 맞지는 않을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데.

임예린도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다르면 두 사람에 대한 행동도 달라야 했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람은 자신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처음부터 분명하게 행동했었다면....

하지만 처음에는 자신도 자신의 감정이 누구에게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분명하게 행동한단 말인가? 자신은 10여 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이 너무도 반가웠던 열여덟 살 소녀에 불과할 뿐이었다.

“추명 오라버니. 조금 전에 제가 한 말 잊지 말아요. 절대 마음 약하게 먹어서는 안 돼요. 양보하지 마세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라버니 자신을 위해서. 늘 억지로 참아내려고만 했던 오라버니 자신을 위해서 말이에요.”

임예린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석추명의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그리고 빈틈없이 이어지는 공격.

“허! 어떻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임예린, 어떻게 내가 뻔히 너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냔 말이다.”

기하진의 검이 돌연 거센 화염을 일으키며 석추명의 검을 막았다. 검이 서로 부딪히면서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반딧불처럼.

“네가 그런 소리를 할수록 나는 형님이 점점 더 미치도록 싫어진단 말이다.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천마신검(天魔神劍) 제8단계 염왕강림(炎王降臨).

검법의 창시자였던 홍진노괴도 익히지 못했던 단계였다. 천마신검은 소멸시키는 불의 힘을 빌어온 무공. 위력만큼은 그 어떤 검법보다 고강했으나 이 검법에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무공을 시전하는 사람의 성정도 화기(火氣)의 영향을 받았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타오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검법의 이름에 ‘마(魔)’가 들어가 있는 것도 이런 연유와 무관하지 않았다.

기하진은 검을 휘두를수록 갈증이 났다. 이렇게까지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점점 석추명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석추명만 옹호하는 임예린도 미워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다 석추명 저놈 때문이다.

“꺼져!”

검을 쥔 팔에 힘을 주자 검에서 화염이 10여 척이나 치솟았다. 허공으로 치솟은 화염 기둥이 그대로 석추명을 강타했다.

쾅!

그 순간 석추명은 비천검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촤르르르.

검이 돌아가자 검에서 뻗어 나온 푸른 검기가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방패가 되었다. 붉은 화염이 푸른 검기의 방패에 부딪히면서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일진일퇴(一進一退). 벌써 수백 초식을 겨루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몸에도 자잘한 상처가 무수히 났다.

싸울수록 기하진은 마음이 초조했다.

사실 석추명과의 싸움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인지도 모른다. 비록 임예린의 사랑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두 사람은 사실 한 숲속에 있는 두 마리의 호랑이였다. 언젠가는 숲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판가름을 내야 했다. 따라서 이 싸움은 처음부터 절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석추명도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친동생처럼 아끼더라도 무인의 자존심상 두 사람이 언젠가 맞붙어 싸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자신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모든 사람이 자는 한밤중에 몰래 떠나려고 했던 것이겠지. 어리석게도 운명이 정한 것은 사람의 힘으로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쿠르릉 쾅.

천마검이 지나간 자리에 돌연 기하진의 장력이 불을 뿜으며 번개같이 석추명을 때렸다. 석추명은 좌장을 뻗어내어 기하진의 장력을 받으려다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기하진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이 녀석, 얼마나 괴로우면 이렇게까지 할까.

고수의 싸움은 한순간도 빈틈이 없어야 하는데 석추명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약해지자 그대로 허점이 생겼다. 그 허점을 기하진이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퍽.

기하진의 장력에 맞은 석추명이 선혈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임예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기하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다시 수백 초가 지났다. 이제는 화염을 끌어내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천마신검은 가뜩이나 내력 소모가 큰 무공. 이기려는 마음에서 최상승 초식을 무리하게 연이어 펼친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 제아무리 막강한 내력을 자랑하는 기하진이라고 해도 이제는 몸 안에 한 톨의 공력도 남지 않았다.

상황은 석추명도 마찬가지였다. 석추명은 헉헉대며 숨을 내뱉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연신 흘러내리고,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비천검을 지팡이처럼 짚고서 겨우 서 있었다. 옷 앞자락에는 아까 기하진의 장력을 맞고 쏟아낸 핏자국이 완연했다.

어느새 하늘에는 하나둘씩 별이 사라지고 동녘이 희끄무레 밝아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임예린은 눈물이 솟구쳤다. 임예린 뒤로 땅바닥에 묵묵히 앉아 있는 일봉의 모습이 보였다. 기하진에게 당한 내상이 가볍지 않은 듯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일봉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헉헉, 덤벼. 나는 아직 싸울 수 있어. 싸울 수 있다고.”

기하진이 힘겹게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추명도 마찬가지로 휘청거리며 다시 검을 들었다.

극도로 탈진한 상태. 아마 지금 이 상태라면 두 사람 모두 어린아이가 찌르는 검도 막아내기 어려울 성싶었다.

기하진이 휘두른 검이 석추명의 비천검에 부딪혔다.

털썩.

두 사람의 검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을 쥘 힘조차 없는데 어떻게 검을 휘두른단 말인가.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두 사람도 동시에 쓰러지듯 바닥에 누워버렸다.

헉, 헉, 헉.

입에서 단내가 났다.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무리해서 공력을 끌어쓴 탓인지 팔은 벌벌 떨리기만 할 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저 이대로 잠들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어디선가 말 한 마리가 두 사람이 누워있는 곳으로 질풍같이 달려왔다. 난데없이 나타난 말에 깜짝 놀란 네 사람은 모두 달려오는 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 등에는 15-6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앉아 있었다.

“석추명! 드디어 네놈을 찾았구나. 이 천하의 악당아.”

소년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석추명 앞으로 다가왔다. 소년의 손에는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내가 천하의 악당이라니? 너는 누구냐?”

석추명이 의아한 눈길로 소년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이 어린 소년에게 원한 살 일은 없었다.

“대웅대협을 기억하느냐? 이 원수 놈아.”

부들부들 떠는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대웅대협이라면...! 그 말에 석추명의 동공이 순간 확대되었다. 대웅대협은 남 교주에게 찍혀 억울하게 죽은 장가방의 방주, 장일웅을 지칭하는 별호였다.

당시 교주의 명으로 장가방을 친 사람은 다름 아닌 석추명 자신이었다. 장가방 백여 명의 식솔들이 모두 자신이 이끌던 수라대에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았던 장일웅은 아내와 아들만 살려주면 자신은 기꺼이 죽겠다며 자진했다. 석추명은 장일웅의 아내와 어린 아들만이라도 살리고자 했으나 장일웅의 아내마저 부대주였던 맹환의 비도에 목숨을 잃고 어린 아들만 겨우 빼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제법 자라서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나타난 것이다. 석추명이 살면서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대웅대협 장일웅의 죽음이었다. 그때 교주의 명을 거역했었더라면. 그때 수라대를 모두 되돌렸더라면. 대웅대협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아마 양심의 가책으로 숱한 밤을 괴로워하며 보내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석추명은 장일웅의 아들이 나타나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설마 네가 정말 대웅대협의 아들이냐?”

석추명이 장일웅의 아들 장운(張運)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장운은 석추명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더니 대뜸 검으로 석추명의 목을 겨누었다.

“그래, 내가 대웅대협의 아들 장운이다. 이제 부모님의 원수를 갚겠어.”

장운이 검을 높이 쳐들었다.

석추명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하필이면 온몸의 내력이 전부 고갈되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지금 장일웅의 어린 아들이 나타나다니. 그야말로 사자가 탈진하여 여우나 너구리에게 물려 죽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장가방을 멸문시킨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 의도건 아니었건 간에 어쨌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안돼!”

그때 임예린이 장운을 막으려고 달려들었다. 여기 있는 네 사람 중 다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켜요.”

장운은 거칠게 임예린을 밀쳤다. 장운이 소년이기는 하나 15-6세쯤 되니 힘으로는 임예린이 당할 수가 없었다.

“예린아, 괜찮으냐?”

임예린이 장운의 힘에 떠밀려 땅바닥으로 쓰러지자 석추명은 등골이 오싹했다. 자신이야 죽으면 그만이겠으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리고 누구보다 임예린은?

“흥! 당신도 다른 사람을 걱정할 줄 알아? 당신 같은 살인마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머니를 단숨에 때려죽인 당신 같은 살인마가?”

장운은 당시 정자 아래 계단 밑에서 숨어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자신의 어머니가 거짓으로 죽은 척하다가 맹환의 비도에 맞아 절명하게 된 상황은 알지 못했다. 어린 소년의 눈에는 그저 어머니가 석추명의 장력을 맞고 쓰러져 죽은 것으로만 비쳤을 뿐이었다.

장운이 함성을 지르며 석추명을 향해 검을 찔렀다. 석추명은 아직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화산신검이 철부지 어린 소년의 칼에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석추명은 재빨리 숨을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 하나를 움켜잡았다.

“죽어!”

장운의 검이 석추명의 가슴을 찔러올 때 검이 찌르는 정확한 부위에 방금 잡은 돌멩이를 올려놓았다. 석추명은 넉 냥의 힘으로 천근의 힘을 빌리는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수법을 사용할 참이었다.

검을 찌르는 장운의 자세는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기본자세도 안 되어 있었고 유달리 힘이 센 것도 아니었다. 하기야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녔을 테니 언제 무공을 배웠겠는가.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힘이 세거나 자세가 정교했다면 석추명이 펼친 사량발천근 수법에 오히려 자신이 당했을 테니.

장운의 검이 귀신같이 돌멩이를 찔렀다. 아니 석추명이 귀신같이 장운의 검이 찔러 드는 부위에 돌멩이를 갖다 댔다. 검이 순간 휘어지나 싶더니 장운의 손에 튕겨 나갔다.

장운은 검이 저절로 튕겨 나가자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어서 당황한 표정이었다.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자신의 검을 튕겨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몇 년을 별러온 복수인데 이대로 포기한단 말인가.

장운이 아무 생각 없이 석추명 바로 옆에 떨어져 있던 검을 주워들었다. 그 검은 기하진의 검이었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장운이 다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아까처럼 막기 어렵자 석추명이 이번에는 발을 살짝 걸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펼칠 수 있는 방어책이었다. 석추명의 발에 걸린 장운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넘어진 장운이 씩씩거리며 다시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는 분한 표정이 가득했다. 다시 검을 앞으로 하고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조준을 잘못하여 검이 석추명이 아니라 그 옆에 누운 기하진을 향했다.

기하진은 만사가 귀찮은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몰랐다. 석추명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어린 소년이 부모의 복수를 하건 말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내력이 모인다면 즉각 다시 공격하여 반드시 항복을 받아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안돼!”

장운의 검이 기하진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 석추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으로 기하진의 몸을 감쌌다.

푹.

장운의 검은 석추명의 심장 바로 뒤쪽을 정확히 찔렀다.

“오라버니!”

임예린의 비명이 새벽 공기를 뒤흔들었다. 기하진은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몸이 뜨뜻해지더니 자신의 몸 위로 뜨거운 피가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석추명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하, 하진아....”

석추명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힘없는 시선으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핏기없는 얼굴이 무척이나 창백했다.

“하, 하진아, 형이... 미안하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기하진이 놀라서 소리쳤다.

“형!”

기하진이 석추명을 붙잡았다. 석추명의 가슴 가운데 끝이 삐져나온 자신의 검이 보였다.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왜 자신의 검이 추명 형님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일까?

“정신 차려! 추명이 형! 이렇게 죽지 마!”

임예린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하진이 의식을 잃으려는 석추명을 흔들었다.

장운은 제가 정말 석추명을 찔러 죽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그 광경에 놀라 뒷걸음질 치더니 타고 온 말을 타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추명이 형!”

기하진이 석추명의 두 팔을 붙잡았다. 석추명이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약하게 미소를 짓더니 숨이 찬 듯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래, 형이야... 네 입에서 나오는... 형 소리를 정말 다시, 듣고 싶었다.”

석추명의 눈에 아련한 그리움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겼다.

“형! 정신 차려. 형!”

기하진이 다시 석추명을 흔들었다. 그러자 석추명이 다시 겨우 눈을 떴다.

“하진아, 우리 셋...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석추명의 눈에서 점점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으면 안 돼. 또 나를 나쁜 놈으로 만들고 이대로 가려는 거야? 추명이 형, 제발!”

기하진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결국 왈칵 쏟아졌다.

“우, 울지 마라. 내 동생.”

그 말을 끝으로 석추명의 손끝이 툭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기하진을 바라보던 눈은 어느새 감겨 아무리 흔들어도 두 번 다시 뜨이지 않았다.

“아악!”

기하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가슴속에 커다란 자갈을 꾹꾹 눌러놓은 것만 같았다. 가슴이 뻥 뚫리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아무리 소리 질러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이런 결과를 바란 게 아니었다. 질투심에 눈이 멀었을망정 이런 결과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냥 추명이 형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항상 비교되니 자존심 강한 제 성격에 참지 못하고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예린이가 형이랑 같이 떠난다고 했을 때도 자존심이 상해서 더 화가 났었는지도 모른다. 추명이 형이 원망스럽고, 밉고, 그 순간만큼은 증오하기도 했었지만, 어쩌면 추명이 형이니까, 모든 것을 항상 넉넉하게 받아주던 형이니까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언제 몰려나왔는지 석추명과 기하진, 임예린 주위에는 정도련 인사들이 몰려나와 네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이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고, 석추명의 가슴에는 기하진이 검이 꽂혀 있자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두 눈만 껌벅였다.

“대주님! 대주님!”

그때 사람들을 뚫고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석추명을 부르며 달려왔다. 백련신교에서 석추명과 함께 유일하게 탈출했던 사소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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