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98화 (198/201)

#   198 - 광세일소_한추영 - 171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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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7화 애(愛), 혹은 증(憎) (4)

노기등등한 기하진이 련주전(聯主殿)으로 이어지는 장원의 내문(內門)을 벌컥 열었다. 마침 문 앞에 있던 일봉이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기하진 앞을 막아섰다.

“기 대협, 밤이 깊었습니다. 련주전에는 어쩐 일입니까?”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기하진의 눈에 일봉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장문인께서는 비키시오.”

기하진이 거칠게 일봉을 밀어냈다.

하지만 아미신공을 얻은 일봉은 그리 호락호락 밀리지 않았다. 기하진이 미는 힘을 가볍게 옆으로 분산시킨 일봉이 다시 기하진을 막아섰다.

“지금 련주님은 안 계십니다.”

일봉이 다시 자신의 앞을 막아서자 기하진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제 련주는 나라고! 그리고 당신은 석추명의 호위무사도 아니면서 왜 자꾸만 석추명을 보호하려는 거지? 예전 버릇이 자꾸만 나오는 것인가?”

평소 쌀쌀맞기는 해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던 기하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큰 형님뻘인 자신에게 대놓고 적개심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임예린의 호위무사였던 과거의 일을 조롱하듯이 말했다.

일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 대협,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련주님은 밖으로 출타하시고 오늘 밤에는 안 들어오실 겁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노여워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와서 련주님과 얘기하시지요.”

일봉이 노여움을 참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좋소. 내일 다시 오겠소. 석추명에게 꼭 전달하시오.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기하진은 일봉을 다시 한번 노려본 뒤 련주전을 떠났다.

**

그로부터 한 시진 뒤, 임예린과 석추명은 정도련 임시 총단의 정문을 나섰다. 하늘에는 손톱보다 가는 초승달이 떠 있었고 별이 총총했다.

석추명은 마치 야반도주를 하듯 이렇게 몰래 나가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서글펐다. 하지만 분노로 펄쩍펄쩍 뛰는 기하진을 생각하면 이게 최선이었다.

사실 석추명은 임예린에 대한 기하진의 마음을 알게 되자 혼란스러웠다. 마음 한구석에는 기하진이 예린이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자신이 양보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괴롭더라도 자신이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왜냐하면, 자신은 형이니까....

그런 석추명을 일깨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임예린이었다.

“왜 오라버니가 제 감정을 판단하세요? 저는 오라버니와 함께하고 싶어요. 하진 오라버니가 아니라 오라버니와 함께하고 싶다고요!”

“예린아...!”

너무 솔직한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여리고 눈물 많은 임예린이 이렇게 당차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할지 몰랐다.

“오라버니는 왜 항상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려고만 하세요? 한 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면 안 되나요?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하진 오라버니가 나아요. 참는 게, 양보하는 게 항상 미덕은 아니라고요. 제발 그렇게 참고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 살아요. 오라버니의 인생이잖아요? 두 번 다시 못 사는 삶이잖아요?”

고승의 죽비처럼 임예린의 말이 석추명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석추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왜 말하지 못하는가? 백련신교에서 수라대를 이끌 때 남 교주는 자신이 너무도 하기 싫은 양심에 괴로운 일만 시켰었다. 그때는 자신이 아랫사람이니, 교주의 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때 한 번이라도 그 명을 거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음양사자가 억지로 자신에게 흑련교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음양사자에 대한 도의상,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갔으나 정작 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교도 3,000명에 대한 도리상, 어쩔 수 없이 흑련교에 가입했었다. 그때 왜 싫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나는 하기 싫다고, 나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고,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임예린에게 좋아한다고 왜 한 번도 솔직하게 고백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기하진에게 미안해서, 좋은 오라버니로 기억되고 싶어서, 또 맏이는 응당 그래야 하니까. 자신은 항상 자신을 옥죄었다. 자신의 손으로 숨통을 눌러 허덕이면서도 그 손을 떼기는커녕 답답한 숨에 그저 적응하려고만 생각했었다. 어리석게도.

늘 하기 싫은 역할을 떠맡으면서도 속 시원히 자신의 속내를, 감정을 드러내 보인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임예린의 말은 송곳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흘러내린 것은 피가 아니라 안에서 곪은 고름이었다. 아프기는 하지만 답답하고 거북했던 부분이 뚫리며 청량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 예린아. 네 말이 맞다. 가자. 이대로 떠나자. 나도 더 이상 하진이 걱정은 하지 않을 테니.”

석추명은 임예린이 준비해온 간단한 꾸러미를 말에 실은 뒤, 유일하게 자신들을 배웅하려고 나온 일봉에게 다가갔다. 석추명이 일봉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형님, 그럼 부탁드립니다. 늘 이렇게 궂은일만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부디 이제는 행복하게 사십시오.”

일봉도 힘주어 석추명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께서 저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모습을 결국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가는군요.”

“하하하,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음에 볼 때는 편하게 아우야, 하고 부르겠습니다.”

일봉이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석추명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자 이번에는 임예린을 마주했다.

일봉의 입에서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늘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임예린이 먼저 손을 내밀어 일봉의 손을 잡았다.

“일봉이 없었다면 제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을까요? 그런데 떠나는 날까지 일봉에게 귀찮은 일만 부탁하는군요.”

“아닙니다, 아가씨.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저도 아가씨를 곁에서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일봉이 임예린의 손을 마주 잡고 큰오빠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임예린도 화사하게 웃었다. 미안했다. 자신에 대한 일봉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기에 일봉이 더욱 깍듯하게 자신에게 대한 것인지도 몰랐다.

“늘 건강히 지내십시오, 아가씨. 천린상단에서 아가씨 호위무사로 있었던 날들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임예린이 일봉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처음으로 일봉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그 말을 들은 일봉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석추명이 인사를 마친 임예린을 말에 태웠다.

“형님,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잘 계시다가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련주님, 아가씨 울리시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큰 오빠이니 아가씨 울리시면 금방 쫓아가서 혼쭐을 내겠습니다.”

일봉의 말에 세 사람이 모두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석추명이 말에 올라타는데 갑자기 천지가 떠나갈 듯한 우렛소리가 나더니 정도련 임시 총단의 대문이 박살이 났다.

“가긴 어딜 간단 말이야.”

대문 안에서 나타난 사람은 기하진이었다. 육중한 대문은 기하진의 장풍에 박살이 난 것이다.

“석추명! 도둑고양이처럼 야심한 밤을 틈타 달아나려는 게냐?”

갑자기 기하진이 나타나자 석추명은 당황했다. 그러나 일봉은 어느새 기하진 앞을 가로막으며 석추명에게 빨리 달아나라고 손짓했다.

“달아나지 마. 달아나지 말란 말이다! 네놈이 떳떳하다면 나와 한번 붙어보자. 나를 이기면 그때는 보내주마.”

기하진이 석추명을 노려보며 악을 쓰듯 소리치더니 석추명을 잡으려고 훌쩍 몸을 날렸다.

절정의 초상비(草上飛) 경공이었다. 기하진의 몸이 바람에 날리듯 순식간에 석추명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순간, 희뿌연 그림자가 기하진 앞을 막아섰다. 일봉이었다.

“기 대협, 돌아가십시오.”

“비켜! 내 앞을 막아선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냥 두지 않겠어.”

분노한 기하진이 쌍장을 들어 올려 원을 그리더니 그대로 일봉을 향해 장풍을 날렸다. 맹주 남궁진악의 독문무공이었던 천룡파천장이었다. 지난번 수장 비무대회에서 남궁진악이 숨겨놓았던 수법을 목격한 이후, 이전보다 훨씬 위력이 강해진 장법이었다.

“형님!”

석추명이 차마 말을 달리지 못하고 일봉을 불렀다.

“여기는 제게 맡기고 어서 가십시오. 어서요!”

일봉은 아직도 가지 않고 서성이는 석추명에게 답답한 듯 소리쳤다. 그리고는 즉시 혼신의 공력을 끌어모아 기하진의 장법에 맞섰다. 일봉의 장력은 아미파의 독문 무공인 아미복마장(蛾眉伏魔掌).

두 절세 고수의 장력이 부딪히자 두 사람을 중심으로 급격한 기류가 형성되며 천둥 번개가 치는 소리가 났다.

“이랴!”

석추명이 결국 박차를 가하며 말을 재촉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초조한 듯 양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당신은 아직 내 적수가 못 돼. 죽기 싫다면 썩 물러나!”

기하진의 쌍장이 다시 한번 빙그르르 원을 그리더니 벼락같이 일봉의 가슴을 때렸다. 산을 무너뜨릴 장력이 일봉의 가슴으로 몰려왔다.

일봉은 재차 공력을 모아 기하진의 쌍장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기하진의 이번 공격은 허초(虛招)였다. 일봉이 가슴을 막으려고 두 손을 드는 순간, 기하진의 손목이 절묘하게 꺾이더니 그대로 일봉의 복부를 때렸다.

일봉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기하진의 장력에 복부를 맞은 뒤였다.

펑!

일봉의 몸이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순식간에 10여 장 뒤로 밀려났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는지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형님!”

그 모습을 본 석추명이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일봉에게 달려왔다.

“어딜 가! 볼일은 나한테 있잖아.”

기하진이 석추명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빼 들었다.

석추명이 말에서 내렸다. 어느새 석추명의 손에도 비천검이 들려있었다.

“하진아, 꼭 이렇게 해야겠느냐? 우리를 그냥 보내주면 안 되겠어?”

기하진을 바라보는 석추명의 두 눈에 고통스러운 빛이 서렸다.

“불쌍한 척하지 마, 역겨워. 정말 불쌍한 사람은 나라고! 너는 아닌 척하면서 사실 모든 것을 다 가졌잖아. 나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고!”

기하진의 주위가 뜨거워진다 싶더니 갑자기 검에서 화르르 화염이 일었다. 절정의 천마신검(天魔神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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