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 광세일소_한추영 - 171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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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6화 애(愛), 혹은 증(憎) (3)
“요즘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일봉이 석추명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련주에게 불만이 있는 구대 문파 일부 인사들이 계속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의도적인 것인지 기 대협을 자꾸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그냥 방관만 하고 있기에는 그들의 움직임이 지나칠 정도로 대담해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도련이 반으로 쪼개질지도 모릅니다.”
석추명이 일어나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원에 만발한 여름꽃 위에 나비 몇 마리가 앉아 있었다.
“맹주가 죽고 무림맹의 잔당들도 다 처리했으니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제 자리를 찾아가다니요?”
석추명이 돌연 일봉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노자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천지자연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련주님!”
“내일 아침에 열리는 구대 문파 평의회에서 제 의사를 밝히겠습니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이 자리는 처음부터 하진이의 자리였습니다. 하진이가 남궁진악의 잔꾀에 중독되지만 않았어도 제가 이 자리에 앉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날 이때까지 모든 고생은 련주 혼자 다 했는데 벌써 물러난다니요?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하하하, 형님께서도 보기보다 욕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만 고생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형님께서도 아미산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셔서 선사(先師)의 간곡한 부탁대로 문파의 재건에 힘쓰셔야지요. 저도 마찬가지로 화산파에 진 빚이 있으니 가서 그 빚부터 갚을 생각입니다.”
석추명의 결심이 단호하다는 사실을 알자 일봉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련주 자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석추명의 눈빛이 살짝 들떠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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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주 직을 기하진에게 넘겨주겠다는 석추명의 선언에 개방의 송 방주가 가장 먼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아니, 그게 말씀이오이까? 총단도 안정되어가고 이제야 련맹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시작했는데 련주께서 물러나시겠다니요?”
“원래 이 자리는 제가 앉을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만사가 순리대로 돌아가니 저도 이 자리를 원래 주인이었던 기 련주에게 돌려주려는 것입니다. 송 방주께서도 앞으로 기 련주를 많이 도와주십시오.”
“기 련주의 무공이나 인품이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소? 석 련주나 기 련주나 이 늙은이가 당연히 있는 힘껏 도울 생각이오만, 석 련주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사임한다고 하시니 참으로 난감하외다. 임 소저께서는 어찌 가만히 계시오? 군사께서 더욱 적극적으로 련주를 말려야 하는 것 아니오이까?”
송 방주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임예린에게 모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도 석 련주님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임예린의 말이 떨어지자 송 방주와 운진자 등 몇몇 사람이 놀라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반면에 청풍도장, 복호일 등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뜻밖의 말에 기하진조차 얼굴이 다소 붉게 상기되었다.
“련주님의 말마따나 원래 이 자리는 기 련주의 자리입니다. 기 련주가 즉위하는 날 남궁진악의 꾀에 당해 부득이 석 련주께서 대신했으나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련주 자리도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가야겠지요.”
담담하게 말하는 임예린을 바라보며 기하진은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임예린도 석추명보다 자신을 응원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하진은 그동안 젊은 나이에 ‘전임 련주’가 되어버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련주 자리는 당연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것을 공공연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석추명은 련주가 되어 남궁진악과의 수장 비무에서 이기고 큰 공을 세웠다. 전 무림이 한결같이 석추명의 은덕을 칭송했다. 사실이기는 했으나 그 소리를 듣는 것이 마냥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자신과 석추명을 서로 비교했다. 누구의 무공이 더 나은지, 누가 더 똑똑하고 인품이 훌륭한지, 그리고 누가 마지막에 임예린의 사랑을 차지할지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마음속에 떠올랐다. 석추명과 나란히 있으면 어느샌가 두 사람을 비교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어 일부러 석추명과 둘이 있는 것을 피했다.
게다가 정도련주라는 석추명의 직함은 만 하루도 련주 자리에 있지 못했던 초라한 자신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근래에는 임예린의 얼굴도 편하게 볼 수 없었다. 임예린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한심하다고 여기지 않을까? 자신이 아닌 석추명이 련주 자리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나 않을까?
그러던 찰나에 자신을 다시 련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내심 기쁘긴 했으나 드러내놓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현임 련주에 반항하는 것은 반역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임예린이 정도련 수뇌부가 모두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련주 복귀가 당연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으로 예린이의 마음도 확인되었다. 그러니 이제 더 꾸물거리지 말아야겠다.’
기하진은 벅찬 기쁨을 억지로 억누르며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
그날 저녁, 기하진이 임예린의 처소로 찾아갔다. 임예린은 마침 혼자 있었다.
“오라버니 오셨어요?”
임예린이 화사하게 웃으며 기하진을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지필묵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난초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여러 개 구겨져 있었다. 난이라도 치고 있었던 듯했다.
“불편한 시각에 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오라버니도 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든지 환영이죠.”
임예린이 눈꼬리를 반달처럼 가볍게 휘며 쌩긋 웃었다. 한두 번 본 모습이 아니건만 새삼스레 가슴이 뛰었다.
“마침 저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잘 오셨어요.”
“할 말이 있다니?”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어요.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먼저 얘기하세요.”
임예린이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기하진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볼 뿐 금방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제야 기하진의 긴장한 표정을 알아차린 임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추명이 형님이 그렇게 갑자기 물러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형님이 다 이루어놓은 공(功)을 내가 덥석 차지하는 모양새가 되어 나도 마음이 불편하구나.”
임예린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다시 편안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진 오라버니가 남궁진악과 싸웠어도 똑같이 잘하셨을 거예요.”
기하진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이 임예린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기하진이 임예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연하지요. 당시 오라버니께서 중독되었을 때 추명 오라버니를 련주로 추대한 사람이 저였어요. 저는 오라버니가 하려던 일을 사심 없이 가장 잘해낼 사람이 추명 오라버니라고 보았어요. 그리고 제 예상대로 추명 오라버니는 남궁진악을 멋지게 물리쳤지요. 마찬가지로 추명 오라버니가 할 일을 가장 잘할 사람도 역시 하진 오라버니라고 봐요. 두 분 모두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인중지룡(人中之龍)이세요.”
임예린의 칭찬에 기하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임예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낯이 간지럽구나.”
“호호호, 다른 사람에게 들을 때는 괜찮으셨고요?”
“하하하. 말하고 보니 그렇군.”
기하진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웃다 보니 다행히 긴장감도 많이 해소되었다.
“예린아....”
기하진이 임예린을 가만히 불렀다. 새삼 다시 기하진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
“내가 너를... 누이가 아니라 여인으로 생각한 지 오래다.”
뜻밖의 말이 기하진의 입에서 나오자 임예린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기하진은 작심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어릴 때부터 너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어린 너를 그 폐가에 혼자 내버려 두고 온 것 때문에 죄책감이 들어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임 장주 댁에서 너를 다시 봤을 때 나는 내 감정이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문득 몇 년 전, 용봉단 단주였던 기하진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10년 만에 만난 사람치고 그때 기하진의 표정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 표정 때문에 반갑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계속 너랑 엮이면서, 그리고 정도련이 만들어지고 우리 두 사람이 늘 함께하면서, 나는 내 감정에 확신을 지니게 되었다. 사실 이번에 남궁진악과의 비무에서 멋지게 이기고 난 다음, 보란 듯이 말을 꺼내고 싶었다.”
기하진이 갑자기 임예린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를 좋아한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임예린이 당황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기하진은 임예린이 부끄러워 그런다고 생각했다.
“이런 내 마음, 어쩌면 너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조만간 무림맹 총단의 정비가 다 끝나면 항주 무림맹 총단으로 우리 정도련이 옮겨가게 된다. 그때 임 장주 내외분을 모시고 조촐하게 언약식이라도 올리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기하진은 자신이 하는 말에 들떠 임예린의 표정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말이다, 이제 내가 련주가 되었으니 정도련 군사를 일부 빼서 천린상단의 호위로 배치할 생각이다. 그리고 또―”
“오라버니!”
임예린이 기하진의 말을 가로막았다. 임예린은 전혀 기쁜 기색이 없었다. 그제야 기하진은 자기 혼자 들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미안하구나. 네게는 이 모든 게 아직 놀라울 텐데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그런 것은 앞으로 차차 얘기하면 되는데.”
기하진은 자신이 용기 내어 고백한 마당에 임예린이 당연히 그 고백을 받아줄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자꾸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앞질러 나갔다.
“하지만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진심이란다. 그러니―”
“오라버니.”
임예린이 또 기하진의 말을 잘랐다. 그제야 기하진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라버니, 어릴 때 저는 오라버니 두 사람 모두에게 시집가고 싶어 했지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저 두 오라버니와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장성한 지금은 오라버니 두 분 모두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아요.”
임예린이 주저하듯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도 오늘 정도련 군사(軍師) 직을 내려놓을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정도련 군사 직을 내려놓다니?”
기하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왜 두 사람이 동시에 물러나려는 걸까?
“저는... 추명 오라버니와 함께 강호를 떠나기로 했어요.”
임예린의 말이 청천벽력같이 기하진의 머리를 때렸다.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임예린의 팔을 꽉 움켜잡고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추명 형님과 함께 강호를 떠나기로 했다니? 좀 알아듣게 얘기를 해 봐.”
임예린은 기하진에게 붙잡힌 팔이 아파 팔을 뿌리치려 했으나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알아듣게 얘기해 보라니까!”
기하진이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붙잡힌 임예린이 아파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예린의 팔을 흔들었다.
임예린이 그런 기하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기하진이 몸을 휘청거리더니 그제야 임예린을 놓아주었다.
임예린은 다른 손으로 붙잡혔던 팔을 문질렀다.
“네, 네가 나를 버리고 추명이 형님을 선택한 것이냐?”
기하진이 다시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으로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뒤에 울음을 꼭꼭 감추고 있던 어린 날의 기하진이 보이는 듯해 임예린은 마음이 아팠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군. 형님과 너는 함께 떠나기로 진작에 작정하고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인 련주직을 나에게 적선하듯 던져준 것이었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하! 정말 멍청하게 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하진이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 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껄껄껄 웃었다. 가린 손 밑으로 눈물이 한 가닥 흘러나왔다.
문득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것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두 사람에게.
“오라버니!”
이번에는 임예린이 기하진의 팔을 가만히 붙잡았다. 자신 때문에 기하진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갑자기 기하진이 임예린의 손을 뿌리쳤다.
“왜 내가 아니고 형님이냐? 왜? 무엇 때문에?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내가 아니라 형님을 선택했느냔 말이다.”
기하진이 두 손으로 임예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고정하세요, 오라버니. 왜 이러세요?”
임예린은 그제야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차갑고 이성적이던 기하진이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걸까? 그 정도로 자신에 대한 애정이 깊었단 말인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너와 할 것이 아니야. 가서 추명이 형님과 해야겠다. 진심으로 정도련주 자리를 내어놓을 생각이라면 정도련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라고 해야겠어.”
“오라버니, 고정하세요.”
기하진이 자신을 붙잡는 임예린의 팔을 뿌리쳤다.
“이게 석추명 그 개자식의 진면목이었어. 아닌 척하면서, 착한 척하면서 결국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게. 그 위선과 가식을 벗겨야겠어. 두 번 다시 그 누구도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기하진의 눈빛이 시퍼렇게 타올랐다. 사람이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평소에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기하진은 놀라서 부들부들 떠는 임예린을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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