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 광세일소_한추영 - 1713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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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애(愛), 혹은 증(憎) (2)
장산(長山) 입구 관요 가마까지 오는 내내 임예린은 치마를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아까 도요촌 시장통 입구에서부터 설랑이 따라오고 있었다. 석추명이 은신술을 펼쳐 몸을 숨긴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설랑이 나타나자 자꾸만 몸이 떨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으나 사실은 치마를 붙잡은 두 손이 새하얘지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설랑은 금방 덤벼들지 않았다. 설랑이 덤벼들면 석추명이 그보다 한발 앞서 임예린을 안고 달아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설랑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임예린의 뒤를 따라오기만 했다.
석추명이 베었다는 팔도 어느새 다시 멀쩡히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강시들의 신체 재생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화련산 백련신교 총단에서 이미 봤던 터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장산 입구에 당도한 임예린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였다. 임예린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더니 손부채를 만들어 목 주위를 부쳤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얗고 가녀린 목이 선명하게 드러나자 설랑이 상당히 동요하는 듯했다.
거친 숨을 내뱄던 설랑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임예린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서너 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설랑이 달려오자 임예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얇은 백의(白衣)가 땀 때문인지 몸에 살짝 달라붙어 바라보는 사람을 더욱 안달하게 했다.
설랑이 임예린을 움켜쥐려고 손을 내뻗는 순간, 석추명이 은신술을 풀고 간발의 차로 임예린을 안아 올렸다.
“크아아아”
설랑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전속력을 다해 석추명의 뒤를 쫓았다.
임예린은 석추명에게 안긴 채 고개를 돌려 설랑을 바라보았다. 설랑은 충혈된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집착은 무서우나 저 거친 눈 속에는 어린아이 같은 맹목적인 순수함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설랑의 그 순수함을 이용하고 있었다.
따라오지 말아요.
임예린은 이렇게 내뱉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석추명은 임예린을 안고 관요 가마 속으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일봉과 송 방주, 운진자 등이 이미 진작부터 불을 때고 있던 가마 속은 숨을 쉬기도 어려울 만큼 후끈거렸다.
설랑이 석추명의 뒤를 쫓아서 가마 속으로 들어갔다. 절강성 제일의 관요 가마답게 가마 안은 꽤 너른 편이었다. 가마 안에는 깨진 도자기, 불에 탄 나무 조각, 숯 등이 잔뜩 널브려져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유약을 발랐거나 바르지 않은 도자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벌겋게 타오르는 숯과 함께 커다란 통나무가 어른 키보다 높이 쌓여 있었다.
그 앞에 임예린이 서 있었다. 석추명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임예린 혼자였다. 가마 속의 열기를 견디려고 물이라도 끼얹었는지 얇은 비단옷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말간 살이 투명하게 비쳤다. 그 모습이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린 임예린의 모습이 설랑을 더욱 부채질했다.
설랑이 거친 숨을 내쉬며 임예린을 잡으려고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양옆에서 기이한 광채를 내뿜는 그물이 쫙 펼쳐지며 설랑을 덮쳐왔다.
설랑이 놀라서 잠시 멈칫하는 순간 그물은 설랑을 꽁꽁 감쌌다. 바로 일전에 귀면쌍살이 석추명과 기하진을 잡는데 썼던 금강망(金剛網)이었다.
“드디어 잡았구나, 이놈. 강시 주제에 감히 누구를 넘보는 것이냐?”
기하진이 옆에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반대쪽에서는 석추명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설랑이 행여나 그물을 찢을까 봐 다시 한 겹을 더 감았다.
설랑이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사지에 힘을 주었다.
“우웨에엑”
하지만 비천검으로도 자를 수 없던 금강망이라 설랑의 폭발적인 힘으로도 찢을 수가 없었다.
기하진이 설랑을 노려보며 코웃음을 쳤다.
“강시가 되면 네 뜻대로 될 줄 알았더냐? 너 같은 괴물을 누가 좋아해 준다더냐? 네놈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을 뻔했어.”
설랑이 기하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기하진을 노려보며 숨을 씩씩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두꺼운 가슴근육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덩달아 움직였다.
“하진아, 예린이를 데리고 빨리 나가. 시간 없다.”
석추명이 여기저기 놓인 통나무 더미에 벌겋게 타오르는 숯을 던져 넣었다. 이미 기름을 뿌려둔 통나무에 숯이 닿자 불길이 금세 치솟으며 주위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석추명의 말에 기하진이 얼른 임예린을 어깨 위로 들쳐멨다.
임예린은 화염이 치솟는 가마 한가운데서 꼼짝도 못 하고 거친 숨만 내뱉는 설랑을 바라보았다. 설랑의 붉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추궁하는 듯했다.
설랑은 살인마였다. 사강시 열 구와 함께 3,000명에 가까운 소림사 승려들을 잔인하게 해쳤으며,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였다. 게다가 청동방울마저 사라져 이제는 제어할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설랑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제 주인이었던 남궁진악의 명에 항거하며 온몸으로 자신을 보호해주었다. 그런데 자신은 오히려 설랑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설랑을 바라보던 임예린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두려움 등이 한데 어우러져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우웨에엑”
임예린의 눈물을 본 설랑이 고개를 젖히고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며, 팔뚝이며, 등이며 할 것 없이 온몸에 굵은 핏줄이 우두둑 돋아나더니 금세 터질 듯이 팽창했다.
그 모습에 놀란 기하진이 재빨리 가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석추명은 물에 젖은 장포를 뒤집어쓰고 마지막 숯 더미에 불을 놓고 있었다.
지지직.
설랑이 몇 번 몸에 힘을 주자 천하의 금강망도 기어이 찢어지고 말았다. 몸이 자유로워진 설랑이 고개를 돌려 석추명부터 잡으려 들었다.
“이럴 수가!”
설랑이 금강망을 찢고 나오자 놀란 기하진이 이중으로 된 가마 문을 잽싸게 닫았다. 가마 안의 불길이 얼마나 거세게 치솟기 시작했는지 가마 문에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문을 열어요! 아직 추명 오라버니가 나오지 못했어요.”
임예린이 기하진에게 소리쳤다.
“추명 오라버니가 문 앞으로 왔어요. 어서 열어요!”
어느새 가마 문에 난 창 안으로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석추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기하진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석추명이 사라져 준다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기하진이 이를 악다물고 가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안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화염이 문밖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기하진이 문을 여는 순간, 석추명이 전광석화처럼 튀어나왔다. 물에 젖었던 장포는 뜨거운 불길에 거의 말랐고, 옷과 머리카락 등이 불에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석추명은 기하진이 문을 열지 말지 망설인 것도 모른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 닫아!”
하지만 석추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에서 설랑의 팔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문 뒤에 있던 기하진을 붙잡았다.
“하진아!”
기하진이 설랑에게 붙잡혀 속절없이 가마 속으로 끌려 들어가자 깜짝 놀란 석추명이 다시 가마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라버니!”
임예린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열린 문으로 넘실거리는 화염 속에서 싸우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풀무질을 하던 일봉과 송 방주, 운진자 등이 임예린의 비명에 놀라 달려왔다. 세 사람은 화염이 넘실대는 가마 속에 아직도 기하진과 석추명이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마의 불을 꺼야겠습니다.”
일봉이 소리쳤으나 송 방주가 탄식하며 말했다.
“가마의 불은 끌 수 없소. 저절로 꺼지기를 기다릴 뿐.”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열린 문밖으로 몰려나오는 열기가 너무 뜨거워 사람들은 다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야 했다.
“오라버니!”
임예린이 애가 닳아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그때 안에서 석추명이 기하진과 함께 밖으로 뛰쳐나왔다. 두 사람 모두 옷은 불에 타고 그을려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얼굴과 머리는 온통 시커먼 그을음투성이였다. 게다가 머리카락이라도 탔는지 어딘가에서 누린내도 났다.
두 사람이 뛰쳐나오자 마침 문 쪽에 있던 일봉이 재빨리 가마 문을 닫았다. 가마 문에 난 창으로 안에 있는 설랑의 얼굴이 보였다. 설랑은 두 사람이 도망치자 광포하게 소리를 지르며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그러나 가마 문은 설랑의 힘을 고려하여 특수하게 제작된 터라 설랑의 힘으로도 열리지 않았다. 가마 안의 화염이 더욱 거세졌다. 붉은 불길이 주황색을 띠는가 싶더니 노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설랑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창 쪽에 바싹 붙어 선 채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붉게 충혈되었던 눈빛이 다시 제 색깔을 되찾고 있었다.
임예린은 설랑의 눈을 바라보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아팠다.
자신을 응시하는 설랑의 눈빛이 슬픈 기색을 띠었다. 야수처럼 흉포하기만 하던 설랑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던 눈빛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자신만 애타게 바라보던 그 눈빛 앞으로 주황색 불길이 넘실거렸다. 어느새 창 안으로 보이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뿐, 설랑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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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것도 모르고 한참을 찾았구나.”
정자에 앉아 연못을 멍하니 바라보던 임예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석추명이었다.
“그놈들 참 평화롭게 보이는구나.”
석추명이 연못 속에서 노니는 붉은 잉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요? 저 물고기들은 아무런 근심도 없는 것 같아요.”
“설랑 때문에 아직도 마음이 불편한 게냐?”
석추명이 걱정스러운 듯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설랑이 강시가 된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 하니 마음이 괴로워요. 설랑이 강시가 되지 않았어도 그렇게 사람들을 죽였을까요?”
“글쎄다. 나는 강시가 되기 이전의 설랑을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천산 호숫가에서 설랑이 네 시비를 죽이는 모습을 직접 봤다고 하지 않았느냐?”
“맞아요. 꿈에 나올 만큼 너무 끔찍한 모습이었어요.”
“그렇다면 설랑은 그 이전에도 살인마였다.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라.”
“하지만 설랑은 죽을 뻔하면서도 제 목숨을 여러 번 살려주었어요. 그 사람의 악행과는 별도로 그 사람이 내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저는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지요.”
임예린이 다시 비단잉어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자는 또한 너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옳고 그름을 딱 부러지게 판단하기 힘들어요. 그저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요.”
석추명이 임예린을 가만히 안았다.
“살다 보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옳은 일이 아닌 듯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단다. 특히 우리 같은 무림인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아.”
임예린이 석추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강호를 떠나면 그런 일도 없겠죠?”
“사람인 이상 전혀 없기야 하겠느냐? 하지만 강호를 떠나면 아무래도 줄기야 하겠지.”
임예린이 고개를 들어 석추명을 올려다봤다.
“이제는 강호를 떠나고 싶어요.”
석추명은 가만히 임예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동안 임예린이 겪어야 했던 숱한 어려움이 생각나면서 마음이 짠해졌다.
“진심이냐?”
“네.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실래요, 오라버니?”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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