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 광세일소_한추영 - 1712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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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4화 애(愛), 혹은 증(憎) (1)
“이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남궁세가의 씨를 말려도 모자랄 판국에 남궁가의 적장자를 살려두다니요? 남궁진악은 문파별로 가장 뛰어난 제자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우리 종남파만 하더라도 차기 장문인감으로까지 거론되던 제자 두 명이 귀면쌍살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문인께서도 그놈에게 제자들을 잃지 않았소이까? 왜 말씀이 없으신 겝니까?”
청풍도장이 점창파 장문인 복호일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 복호일은 점창파의 대제자인 복태와 둘째 제자인 욱우를 귀면쌍살의 손에 잃었다.
게다가 복태는 복호일의 외동아들이기도 했다. 아들이 죽었을 때 복호일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인 흉수 귀면쌍살이 맹주의 수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배신감에 피눈물로 밤을 새웠다. 그때 복호일은 힘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언젠가는 남궁진악에게 이 피맺힌 복수를 하겠노라고 맹세했었다.
남궁진악이 죽은 마당에 강호의 법도대로라면 그 자식에게 복수해야 하나 남궁진악은 자식이 없기에 그 죄는 당연히 남궁세가의 적장자에게 물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에게 죄를 물을 방도가 없었다. 남궁진악을 꺾고 만인의 존경을 받게 된 련주가 남궁척의 목숨을 살려준다고 공언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간 자신의 아들만 불쌍할 따름이었다.
“흠....”
복호일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청풍도장이 이번에는 기하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 련주께서 한번 말씀해 보시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남궁진악과의 비무 초반에 기 련주께서 검로에 대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과연 석 련주가 이길 수 있었겠소이까? 게다가 그 전날, 남궁진악이 군사들을 휘몰아 공격해왔을 때,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면 석 련주가 그다음 날 비무를 진행할 수나 있었겠냐 말입니다. 내 장담하건대, 기 련주와 우리 원로들이 없었다면 절대 승리를 거머쥘 수 없었을 것이오. 즉, 이번 비무에 이긴 것은 석 련주 혼자의 힘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 혼자의 힘으로 이긴 것인 양 우리 원로들의 의견을 무시하니,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지 않았소이까?”
청풍도장은 남궁척의 주살을 건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해 앙심을 품었다. 청풍도장은 지금까지 자신이 석추명과 정도련을 위해 헌신해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모든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당했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추명 형님의 무공이 뛰어나니 제 도움이 없었어도 아마 이겼을 것입니다.”
기하진이 뜨뜻미지근하게 말했다. 사실 기하진은 제 손으로 남궁진악을 거꾸러뜨리고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농락해온 남궁진악의 목을 직접 날리며 짜릿한 손맛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본 남궁진악의 무위는 자신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날 이후 몇 번이고 석추명이 아니라 만약 자신이 남궁진악을 상대했었더라면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날 석추명이 남궁진악을 거꾸러뜨린 천검비산(千劍飛散) 같은 절초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무공이 석추명에게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이것은 무공을 떠나 자존심의 문제였다.
“무슨 소리입니까? 기 련주는 남궁진악의 무공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석 련주보다 훨씬 빨리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오. 꼴사납게 도망치듯 굳이 천검장으로 남궁진악을 유인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빈도도 강호에서 굴러먹은 지가 어언 30년이 넘었소. 내가 비록 절세고수는 아니나 설마하니 그런 것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소이까?”
청풍도장의 말이 기하진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다. 그렇다. 석추명은 분명히 초반에 창궁무애검의 검로를 몰라 당황했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청풍도장의 말마따나 천검장으로 갈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맹주를 굴복시켰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중양신공으로 이룩한 누구보다 막강한 내력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석 련주가 련주 직에 오른 것도 따지고 보면 기 련주께서 중독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일이외다. 이제 기 련주께서 회복되시고 예전의 무공을 되찾았으니 련주 자리도 마땅히 되돌려 받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청풍도장이 옆에 앉은 현암자를 슬쩍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현암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청풍도장의 말에 이미 마음이 상당히 기운 듯했다.
“이게 무슨 소리요? 불만이 있다면 련주를 찾아가서 따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뒤에 모여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협사(俠士)가 할 짓이 아니외다.”
운진자가 청풍도장의 말에 노여워하며 벌떡 일어섰다. 청풍도장은 삼엄한 운진자의 눈빛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이번에 간적 남궁진악을 무찌른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련주님이시오. 내 기 전임련주도 존경하오만 이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소이다. 빈도는 이런 자리에 더는 있고 싶지 않으니 이만 빠지겠소이다.”
운진자가 거칠게 방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흥! 운진도장께서 혼자만 고절(高節)한 척하고 싶은가 본데, 사실 석 련주의 출신을 문제 삼으며 제일 극심하게 반대했던 분이 바로 운진도장 아니오이까? 지금 와서 혼자만 발을 빼겠다니 참으로 표리부동한 분이오이다.”
“그렇다면 청풍도장께서는 어떤 의견이 있소이까?”
점창파 장문인 복호일이 물었다.
“당연히 기 련주를 복위시켜야지요. 어차피 석 련주가 마교 출신인 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우리 정도련은 정도(正道) 문파의 연맹인데 마교 출신의 련주가 웬 말입니까? 아니 그렇소이까? 출신이 떳떳해야 행동에도 힘이 실릴 것입니다. 이번에 석 련주가 남궁척을 살려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도 좀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가 아니겠소이까?”
“기 련주를 복위시키다니, 무슨 복안이라도 있소이까?”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 련주의 의지만 확인한다면 방법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청풍도장의 말이 떨어지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기하진을 향했다. 기하진은 가타부타 말없이 식은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평소 식은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건만 오늘은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유난히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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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랑이 또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직도 아가씨를 쫓아다니는 듯합니다.”
일봉이 임예린의 안색을 조심스레 살피며 말했다.
설랑이 나타났다는 말에 임예린은 일순간 표정이 굳었다.
“피해가 있었습니까?”
“마을 사람 두 명과 경계 무사 세 명, 총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석추명이 ‘흠’하고 짧은 침음을 냈다.
“설랑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하루빨리 처치해야 합니다.”
임예린은 천검장을 빠져나올 때 바라봤던 설랑의 눈빛을 떠올렸다. 오싹하면서도 무언가 가슴 시린 이상한 느낌이 드는 눈빛이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석추명이 묻자 일봉이 대답 대신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 일전에 사마경에게 물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정신이 든 임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꼭, 제거해야만 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설랑에게 연민이라도 느끼는 건지 임예린이 살짝 주저했다.
“없습니다. 그놈을 없애지 않으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아가씨께서도 그 사실을 잘 알지 않으십니까?”
일봉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봉의 서늘한 눈빛은 더 이상 망설이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임예린의 연민을 받는 설랑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임예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경에게 방법을 들었습니다. 그 방법을 쓰면 설랑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임예린이 무슨 이유에선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눈빛이 촉촉해진다 싶더니 다시 단단해졌다.
“제가 직접 설랑을 유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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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시 외곽의 도요촌(陶窯村).
송나라 때부터 관에서 사용하는 도자기인 관요(官窯)를 생산해온 도요촌은 작은 마을치고는 제법 활기찬 마을이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옆 동네 소사촌(素沙村)에서 글쎄 며칠 전에 사람 다섯이 죽어 나갔다네.”
시장통에 자리한 객잔에 사내 셋이 앉아서 고량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들었네. 다섯 모두 목이 뽑혀 죽었다지?”
“목이 뽑혀? 아이고, 듣기만 해도 술맛 떨어지는구먼. 누가 그런 짓을 했을꼬?”
“그래서 옆 동네는 지금 대낮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도 않는다네. 모두 집안에 꼭꼭 숨어서 지낸다고 하구먼.”
“흉수가 누구라던가? 무림인인가?”
“글쎄, 그것도 석연치가 않아. 무림인들이 일반 백성들을 함부로 살상하지는 않지. 게다가 그들은 창이나 칼, 도끼 같은 무기를 쓰지 않나? 그런데 이번에 죽은 시신은 무기가 아니라 맨손에 당했다고 하네. 그런데 옆 동네 왕 서방이 그러는데 흉수 놈이 꼭 누군가를 찾는 것 같더라는 게야.”
“허, 사람을 찾아? 그렇다면 그놈이 우리 마을에도 나타날 수 있겠구먼.”
“그럴 테지.”
말을 하고 나니 기분이 찜찜한지 세 사람은 동시에 술잔을 들이켰다.
마곡(馬穀)이 빈 술잔에 술을 따르는데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공씨가 자신의 팔을 툭툭 쳤다.
“왜 그러나?”
공씨가 말을 하지 않고 턱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마곡은 술을 따르며 아무 생각이 없이 공씨의 턱짓 따라 눈길을 돌렸다.
“...!”
객잔 앞으로 이런 촌구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인이 몸에 걸친 얇은 비단옷은 움직일 때마다 관능적인 몸매를 여실히 드러냈다.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에게 정신을 뺏긴 마곡은 잔이 넘치는지도 몰랐다.
“이 사람, 정신 줄을 놓았구먼.”
공씨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마곡은 잔이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도 마곡의 눈길은 여전히 객잔 밖에 있는 미녀의 꽁무니를 쫓았다.
여인은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려는 듯 시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를 봐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 바람에 행인이며, 좌판 상인, 객잔의 점소이에 손님 할 것 없이 길거리에 있는 모든 사내가 일손을 놓고 그 여인을 쳐다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여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던 마곡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마누라만 보다가 오래간만에 정말 눈이 호강했군.”
“허허,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하는구먼. 그러다가 제수씨한테 혼날라.”
세 사람은 껄껄 웃었다.
“그런데 말이야, 방금 그 여인이 장산(長山) 입구 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장산에는 도자기 굽는 가마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젊은 처자가 그곳은 무슨 볼일로 갈꼬? 도자기 굽는 모습이라도 보려는 건가?”
“하긴 장산 입구에 있는 관요 가마는 워낙 커서 한 번쯤 볼만 하지. 가마 높이만 하더라도 장정 키의 세 배는 거뜬히 넘을 걸세. 이 일대뿐만 아니라 절강성을 통틀어 그렇게 큰 가마는 별로 없지.”
공씨의 말에 마곡이 아쉬운 듯 술잔을 홀짝이며 여인이 사라진 곳으로 다시 한번 눈길을 돌렸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 객잔에서 머지않은 골목길, 어두운 나무그늘 뒤에도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사내의 얼굴과 머리카락에는 시커멓게 때가 끼어있었고 맨살 위에 입은 가죽조끼에는 검은 핏자국이 엉겨 있었다.
사내는 연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여인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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