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 광세일소_한추영 - 1709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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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화 결전 (5)
간밤의 소란에 고갈된 공력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심히 보니 남궁진악의 무공이 석추명에 비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아니 노련한 기술의 운용은 오히려 석추명보다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저 절묘한 초식이라니.
기하진은 보면 볼수록 기가 찼다. 석추명을 상대로 남궁진악이 펼치는 검법은 자신도 잘 아는 창궁무애검이 분명하건만 지금 사용하는 초식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저 망할 노인네가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던 거야.’
남궁진악을 바라보는 기하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모든 무공을 남김없이 전수해준다고 했었다. 맹주 자신의 무공이 대가 끊길까 걱정하다가 드디어 제자를 찾아서 평생 익힌 무공을 전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었다.
자신은 그 말을 믿고 맹주에게 감읍하고 또 감읍했다. 맹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위대한 분이라면 보잘것없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했었다. 단원들이 맹주의 명에 의문을 제기하여도 맹주님이 하시는 일이니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애써 토닥였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이제 알고 있긴 하지만, 지금 버젓이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에게는 숨겼던 무공을 쓰는 맹주를 보자 역거움과 함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창궁무애검에 저런 초식이 있었다니.’
석추명을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남궁진악의 검법은 산악을 베어버릴 듯이 패도적이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또한 지극히 정밀했다. 저 초식을 자신이 알았더라면 귀면쌍살을 그리 오래 살려둘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으하하하, 화산신검이 고작 이것을 막아내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어떻게 감히 ‘신(神)’자를 별호에 붙일 생각을 했을꼬? 그 별호는 내가 걷어가마.”
남궁진악은 허울만 좋은 맹주가 아니었다. 한 번도 남궁진악의 진짜 실력을 보지 못했던 부맹주 천계심이 지금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맹주 자리를 노리던 야망을 진즉 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풍랑이 일 듯 웅혼한 검기가 연이어 석추명에게 몰려들었다. 공력의 수위도 소림 신승의 공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자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석추명은 정신이 아찔했다. 절정 경공을 펼쳐 남궁진악의 검을 간신히 피하고만 있었다.
‘설마 그동안 맹주가 무공을 숨겼단 말인가?’
그동안 간간이 드러난 맹주의 무공은 절대 자신이 넘보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도 숨겨놓은 비장의 수가 한두 수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압박해올지는 몰랐다.
땅바닥에 석추명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혔다. 발자국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연신 뒤로만 찍히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이 제왕의 검이라고 하더니 빈말이 아니었구나.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석추명은 뒤로 피하면서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남궁진악이 펼치는 검초가 자신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기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좌하일허(左下一虛), 우견삼격(右肩三擊)”
그와 동시에 남궁진악이 왼쪽 아래를 벨 듯하다가 돌연 오른쪽 어깨를 세 번 내리쳤다.
그러자 석추명의 머릿속에 번개같이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하진이 지금 창궁무애검의 검로(劍路)를 알려주고 있다!’
“좌 삼보 후 우측으로 검기발출(劍氣發出)”
“일검삼휘(一劍三揮), 견정(肩貞), 결분(缺盆), 고방(庫房)”
‘한 번 검을 떨쳐 세 군데 혈도를 공격한다는 뜻이군.’
기하진의 도움으로 드디어 남궁진악이 펼치는 검법의 검로가 눈에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남궁진악이 초식 몇 수를 숨기기는 했으나 검로가 그것만으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검로는 물 흐르듯이 이어져야 하기에 오히려 남궁진악이 숨겨둔 수법마저 유추 가능했다.
기하진이 알려주는 족족 석추명의 검이 먼저 나가 검로를 차단하니 전세가 금방 뒤바뀌었다. 이렇게 되자 남궁진악은 손발이 잘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기하진 이놈, 이게 무슨 짓이냐? 스승을 존경하지 않으려거든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어째서 감히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야?”
남궁진악이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스승이라니 누가 스승이라는 것이오? 무공을 숨기고 가르쳐주지 않은 사람은 당신인데 어떻게 스승으로 자처한단 말이오?”
“이....!”
기하진이 되받아치자 남궁진악은 말을 잇지 못하고 두 눈만 부릅떴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과연 맹주답소이다. 하지만 하진이의 도움 없이도 내 얼마든지 당신을 상대할 수 있소. 한번 보겠소이까?”
석추명이 미리 준비한 검갑을 돌연 공중으로 던졌다. 육중한 검갑이 허공으로 솟구치나 싶더니 검갑 안에서 열두 자루의 비검이 튀어나왔다.
석추명이 검을 바라보며 집중한 다음 손에 공력을 모으자 허공에 뜬 비검들이 풍차처럼 세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로 어젯밤 설랑을 공격할 때 썼던 그 수법이었다. 설랑에게 먹혔으니 남궁진악에게 먹히지 않을 리가 없으리라는 것이 석추명의 판단이었다.
“비뢰환이라는 초식이오. 어디 한번 막아보시오.”
석추명이 팔을 접었다가 튕기듯이 앞으로 뻗어내며 소리쳤다.
“비검출격(飛劍出擊)!”
그러자 허공에서 회전하던 열두 자루의 검이 시퍼런 검기를 뿌리며 쏜 화살처럼 남궁진악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흥. 이까짓 걸로는 어림도 없다.”
남궁진악은 검을 절묘하게 놀리며 열두 자루의 검을 모두 튕겨내었다. 설랑조차도 모두 피하지 못하고 몇 자루는 맞고 말았는데 남궁진악은 여봐란듯이 모두 쳐내고 만 것이다. 확실히 설랑과는 급이 다른 고수였다.
회심의 일격이 어이없게 실패하자 석추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남궁진악은 득의양양하여 석추명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남궁진악이 바닥에 떨어진 비검을 연신 발로 차올리더니 석추명에게 다시 쏘아 보냈다.
쐐애액.
열두 자루의 검이 거친 파공음을 내며 석추명을 향해 질풍같이 날아왔다. 검이 어찌나 빠른지 공기와의 마찰로 검신(劍身)에 시퍼런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석추명의 대응도 재빨랐다. 석추명은 검갑을 붙잡아 올리더니 검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검갑을 뉘었다. 남궁진악이 순식간에 열두 자루의 검을 모두 발로 차 보낸 것도 놀라웠으나, 석추명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오는 검을 모조리 검갑에 집어넣은 것도 사람의 솜씨라고 믿기 어려웠다.
“이렇게 일일이 모아주다니 고맙소이다.”
석추명이 씨익 웃으며 검갑을 등 뒤에 묶었다. 그 웃음이 남궁진악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건방진 놈.”
남궁진악이 돌연 검을 검집에 넣고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펑. 펑. 펑.
연달아서 대여섯 번이나 되는 장풍이 남궁진악의 손에 터져 나왔다. 바로 철산장이었다.
석추명은 남궁진악이 쌍장을 들어 올릴 때부터 철산장으로 공격해오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력이 터지기 직전에 천룡보를 전개하여 공격지점을 잽싸게 피했다. 그 바람에 남궁진악은 여섯 번 모두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이노옴!”
남궁진악은 약이 오른 듯했다.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남궁진악의 신형이 검은 연기로 화하며 사라졌다. 음양사자의 독문무공인 귀연신공을 펼친 것이다.
귀연신공은 위력이 놀랍기는 하나 가까운 거리에서만 큰 효과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석추명은 재빨리 경공을 발휘하여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석추명의 등 뒤에서 남궁진악이 모습을 드러내며 석추명을 향해 갈고리 손을 뻗었다.
휘리릭.
석추명의 등이 남궁진악의 손가락을 아슬아슬 스치고 지나갔다.
“좋다. 네놈이 이것도 막아낼 수 있나 어디 보자.”
남궁진악이 허공을 격하며 손바닥을 펼쳤다. 음양사자의 또 다른 독문 무공 구유백귀장(九幽百鬼掌)이었다.
“끼아아욱”
저승의 문턱을 넘어온 백귀의 울음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렸다. 이어 허공에 생성된 거대한 공기의 파장이 앞으로 쭉 밀리며 석추명을 강타했다.
“윽!”
갑자기 석추명이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석추명의 등에 불에 덴 듯한 손바닥 모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허공을 격하고 발출된 구유백귀장이 석추명의 등을 정통으로 맞춘 것이다.
“오라버니!”
“련주님!”
임예린과 일봉이 동시에 소리쳤다. 기하진도 놀란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구유백귀장이 무서운 장법이기는 하나 저 정도 장력을 피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속절없이 맞은 것을 보면 확실히 어젯밤 싸움의 여파가 아직 크게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석추명은 앞으로 고꾸라질 듯이 휘청거리더니 다시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갔다.
남궁진악은 자신의 장력이 적중하자 몹시 기분이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다. 석추명 저 녀석이 화산신검입네 하고 큰소리만 쳤지 실상은 그리 대단한 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도망가려고 하느냐?”
남궁진악이 이번에는 자신의 절기인 천룡파천장을 쏟아냈다.
쿠르릉. 쾅.
남궁진악의 팔을 떠난 장력이 용울음 소리를 내며 석추명의 등에 부딪혀갔다.
“위험해!”
천룡파천장의 위력을 잘 아는 기하진이 소리쳤다. 저 장력에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내장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석추명이 몸을 돌려 천룡파천장을 막아내는 듯했으나 두 장력이 마주치니 어찌 된 일인지 석추명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다시 뒤로 십여 장이나 밀려났다.
“련주!”
운진자가 벌떡 일어났다. 이미 석추명과 남궁진악은 비무장에서 수십 장이나 벗어나 있었다. 사실 수장 비무는 정해진 비무장이 따로 없고 두 사람이 싸우는 곳이 곧 비무장이었다.
두 사람이 악양루 뒤편으로 달려가자 공증인을 맡은 10대 고수와 운진자도 함께 달려갔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얼마 전, 남궁진악의 계략에 빠져 호되게 당했던 천검장이 나타났다.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드는 격이로군. 여기가 그리웠나 보지?”
남궁진악이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여기까지 올 줄 몰랐는데 오게 되었구려. 뭐, 죽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방에 상계(上界)의 신상들이 있으니.”
석추명이 말을 하면서 개방의 송 방주와 눈빛을 교환했다. 송 방주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하하하,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줘야지.”
남궁진악 다시 검을 휘두르며 강력한 검기를 발출했다.
“참룡파(斬龍波)!”
그 순간 남궁진악의 검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터져 나오더니 거대한 도끼 모양이 되어 석추명을 때렸다. 석추명은 검파(劍波)를 막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일학충천세(一鶴衝天勢)를 펼쳐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
남궁진악의 검에서 터져 나온 검기가 석추명의 발밑을 지나 그대로 천검장의 대문을 강타했다.
쾅!
육중한 천검장의 대문이 그대로 박살이 나며 떨어져 나갔다. 일전에 송 방주가 네 명의 홍삼 미녀와 들어가네 마네 실랑이를 벌였던 바로 그 대문이었다.
석추명은 발끝이 땅에 닿기 무섭게 다시 천검장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어갔다.
“비무를 하다 말고 자꾸 어디로 도망치는 게야.”
이제는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한 남궁진악이 석추명의 뒤를 쫓으며 다시 검기를 내쏘았다.
정신없이 어디론가 달아나던 석추명이 갑자기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시겠소?”
석추명이 몸을 돌리며 남궁진악에게 물었다.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남궁진악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두 사람이 선 곳은 일전에 자신이 석추명 일행을 일망타진하려고 유인했던 검진이 있던 자리였다. 그때 석실이 무너지면서 넘어진 석상들과 부서진 돌조각들이 아직도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남궁진악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보니 석추명이 아까 자신의 장력을 맞은 것 치고는 너무 멀쩡한 것이 아닌가?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다거나 입가에 선혈 자국이 남아있을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마 맞아주는 척하면서 일부러 유인한 것인가?’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에 뭐가 있다고 일부러 이쪽으로 유인한단 말인가? 부서진 돌조각밖에 없는 곳인데.
그런 남궁진악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석추명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공은 과연 천하를 도모할 만하오. 한 10년 정도 지나면 모를까, 무림쌍절이 내게 남겨준 심법과 공력으로도 아직은 당신을 이기기 어려운 것 같소.”
“흐흐흐. 잘 아는구나. 네놈이 아무리 화산신검입네 하고 떠들어도 내 앞에서는 애송이에 불과해.”
남궁진악은 석추명을 도발할 생각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석추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동의했다.
“맞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내 본신(本身)의 무공만으로는 아직 당신에게 미치지 못하오. 하지만 당신이 깨우쳐준 덕분에 이제 당신을 이길 자신이 생겼다오.”
“그게 무슨 소리냐?”
“곤명호 지하뇌옥을 탈출할 때가 처음이었소. 그리고 지난번 이곳 천검장에서의 경험이 두 번째였지.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당신을 상대할 비책을 생각해냈소. 하긴, 준비도 당신이 해준 것이나 다름없지만.”
남궁진악은 석추명이 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다.
“궁금하오? 바로 이것이오.”
석추명이 두 팔을 벌리며 공력을 집중하자 천검총 곳곳에 널브러져 있던 수많은 검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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