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 광세일소_한추영 - 1706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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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화 결전 (4)
동정호 악양루 앞. 해가 머리 위로 떠올라 정오임을 알렸다.
정도련의 진영에는 석추명 외에도 기하진, 임예린, 일봉, 청풍도장, 현암자,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참가했고, 무림의 대선배격인 팔선(八仙)도 참여했다.
비무장에는 이전의 약조에 따라 각각 다섯 명씩 정도련과 무림맹의 공증인 열 명이 미리 나와 앉아 있었다. 정도련 측 공증인은 소림사의 공각대사, 개방의 송 방주, 곤륜파 장문인 운양자, 종남파 장문인 청송자, 팽가장의 장주 팽연이었고, 무림맹측 공증인은 신봉문(新鳳門), 신창문(神槍門), 매화문(梅花門), 금강문(金剛門)의 문주(門主)와 불영사(佛影寺)의 주지 등 다섯 사람이었다.
무림맹측 공증인은 누가 보더라도 급조한 티가 났다.
무림맹 측 진영을 바라보던 청풍도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런 떨거지들을 데리고 오다니, 맹주도 급하긴 급했나 보군.”
“저들도 아마 자의로 앉아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틀림없이 맹주의 협박을 받았겠지요.”
임예린이 맞장구를 쳤다.
“그럴 테지. 맹주의 잔악상이 천하에 다 드러났는데 누가 맹주의 편에 선단 말인가? 세외쌍마나 막북칠괴 같은 사파 것들이 아닌 다음에야.”
청풍도장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임예린은 청풍도장의 말에 미소를 짓더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몸은 괜찮으셔요?”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이 중요한 비무대회를 앞두고 있었으나 석추명은 어제 조금도 쉬지 못했다. 이게 모두 남궁진악의 계략임은 누구나 짐작했지만, 또 직접 따져 물을 만한 물증은 없었다.
“괜찮다. 오늘은 반드시 저놈의 목을 베어야지.”
석추명이 일어나 비무장으로 다가갔다.
“으하하하, 석 련주, 결국은 이 비무장에서 만나는구먼. 내 진작 내 제자보다 석 련주 자네를 만나게 될 줄 알고 있었지. 기하진 그 아이는 재능은 있으나 성격이 급하고 외골수라 여러모로 자네에게 부족하지. 처음부터 자네가 련주직을 맡았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흐흐흐.”
남궁진악의 말에 기하진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궁진악이 일부러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을 삼가시오. 하루를 련주로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 련주는 본 련의 전임 련주요. 아무리 그대가 맹의 수장이라 하나 그런 식의 불쾌한 언사는 절대 용서할 수 없소. 게다가 기 련주가 물러나게 된 것도 모두 당신의 계략 때문이 아니오?”
기하진의 목소리가 준엄해졌다.
“으하하하, 내 계략이 아니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군. 좋아, 어찌 됐건 그 모든 것을 풀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겠소?”
남궁진악이 무엇이 그렇게 좋은 듯 껄껄거리고 웃었다.
“듣자 하니 어젯밤에 귀 련에 소동이 좀 있었다고 하던데? 석 련주께서 무척이나 바쁘셨겠구먼.”
남궁진악이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일도 모두 자신이 벌인 짓이면서도 발뺌하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그래서 오늘 비무를 하기에 앞서 맹주께 자그마한 공연을 보여드릴까 하오.”
석추명이 차가운 눈빛으로 남궁진악을 바라보았다.
“그자들을 데려오십시오.”
석추명의 명이 떨어지자 운진자와 곤륜칠검이 밧줄로 결박한 나찰녀, 마립, 백골마군, 그리고 막북칠괴 중 사괴 타각귀를 끌고 왔다. 어젯밤의 접전 끝에 네 사람을 사로잡은 것이다. 정도련 막사에서 마룡자와 매곡자가 ‘저놈들을 잡느라고 무지 고생했어’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꿇어라.”
운진자가 소리치며 네 사람의 무릎을 발로 찼다. 그러자 네 명 모두 견디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자들이 누군지 아시겠소?”
석추명이 남궁진악을 쏘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남궁진악은 관심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마교의 장로들이 아니오? 마지막에 있는 인상이 험상궂은 놈은 누군지 모르겠소이다.”
“맹주께서 직접 부르신 자이니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마지막에 있는 자는 막북칠괴의 넷째 타각귀라고 하지요. 이자들이 어제 부대를 이끌고 본 련을 공격해왔소이다. 하필이면 비무대회 전날, 그것도 모두 동시에. 이유가 무엇이었겠소이까?”
석추명의 추궁이 날카롭게 이어졌으나 남궁진악은 계속 딴청만 부릴 뿐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 마교 놈들, 나도 지긋지긋하오. 석 련주가 비무를 앞두고 저 재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는 의도를 모르겠구려.”
나찰녀와 마립, 백골마군 등은 남궁진악이 자신을 모른 척하자 절망하는 눈빛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나찰녀는 무릎을 꿇은 채 독기어린 눈빛으로 남궁진악을 쏘아보았다.
“모두 네놈이 시킨 짓이지 않으냐?”
나찰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래도 계속 발뺌하시겠소이까?”
석추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남궁진악을 압박했다.
“하하하, 마교 놈들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놈들인데. 그리고 내가 시켰다는 증좌가 있소이까? 인제 보니 석 련주께서 애먼 사람을 잡는 안 좋은 버릇이 있구먼.”
“그래요? 그렇다면 저들의 목을 베도 상관없겠군요?”
“마음대로 하시구려.”
그러자 석추명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명을 내렸다.
“그럼 시행하십시오.”
“명 받들겠습니다.”
운진자가 제일 끝에 있는 타각귀의 목을 검으로 내리쳤다. 타각귀는 비명 한번 지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운진자가 나찰녀, 마립, 백골마군의 목을 차례로 베는 동안 석추명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남궁진악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남궁진악도 마찬가지였다. 네 명의 목이 모두 떨어지는 동안 남궁진악의 입가에서는 비릿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저, 저 쳐죽일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정도련 막사에 있던 청풍도장이 남궁진악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 정도야 예상했던 일이지요.”
남궁진악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임예린이 담담히 말했다.
“자, 보여줄 것은 이게 전부요? 그렇다면 이제 슬슬 시작해 봅시다.”
“아직 더 있소이다.”
석추명이 다시 뒤쪽을 향해 명을 내렸다.
“남궁세가 사람들을 데려오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청풍도장과 현암자가 제자들과 함께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과 가주의 아우인 오대 장로, 가주의 아들인 남궁척을 끌고 왔다. 모두 수척한 표정이었다.
남궁진환과 남궁척은 맹주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으나 맹주의 아우들인 다섯 장로는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애타게 맹주를 바라보았다.
뜻밖에 자신의 아우들이 나타나자 남궁진악이 그제야 불쾌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맹주께 제안을 하나 할까 하오.”
석추명이 여전히 남궁진악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오늘 비무대회의 결과에 따라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무공을 잃고 강호를 영영 떠나게 되겠지요. 하지만 오늘 비무는 우리 두 사람만이 아닌, 전 무림의 명운이 걸린 대결이오.”
“그래서?”
“그래서 내가 이기면 맹주 당신은 기 전임련주를 중독시킨 독의 해약을 내놓으시오. 내가 지면 남궁세가의 모든 사람을 풀어주리다. 어떻소? 한 사람의 목숨과 일곱 사람의 목숨을 서로 맞바꾸는 셈이니 맹주께서 더 유리하지 않소이까?”
석추명의 말이 끝나자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남궁진악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 저들의 목숨을 원한다고 했소?”
웃음을 멈춘 남궁진악이 어느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남궁진악의 말이 떨어지자 남궁세가 오대 장로들이 충격을 받은 듯 남궁진악을 소리쳐 불렀다. 가주 남궁진환은 못들을 말을 들은 양 두 눈을 감고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남궁척은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으나 제 백부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오? 맹주께서는 저들을 살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오?”
석추명도 예상치 못한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흐흐흐, 한 사람의 목숨은 한 사람의 목숨으로 바꾸는 것이 정당한 거래가 아니겠소?”
“한 사람의 목숨이라면...?”
“내가 지면 해약을 줄 테니 석 련주가 지면 이 독약을 직접 마시는 것이오. 어떻소이까? 공평하지 않소?”
남궁진악이 석추명을 떠보듯이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
남궁진악의 말을 들은 일봉이 정도련 막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련주, 저 미친 늙은이의 말을 듣지 마시오. 그냥 이참에 확 휩쓸어 버립시다.”
운진자도 분노하여 소리쳤다.
“으하하하, 역시 그만한 배포는 없는가 보군. 기하진을 살리고 싶다면 련주의 목숨을 걸어야 하지. 만약 걸 수 없다면 기하진의 해독약도 줄 수 없지. 이게 내 조건이오.”
남궁진악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비무고 뭐고 다 때려치웁시다. 내 당장 이 남궁세가 잡놈들부터 목을 베야겠소!”
청풍도장이 정말 남궁가주의 목을 베려는 듯이 팔을 치켜들었다.
“그 녀석들을 모두 베고 내 목을 벤다 하더라도 소용없소.”
남궁진악이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석추명이 청풍도장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시선은 여전히 남궁진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좋소. 받아들이겠소. 내 목숨을 걸리다. 지면 기하진의 해독약을 주겠다는 약속만은 분명히 지키시오.”
“으하하하, 여부가 있나.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여기 공증인 열 명이 모두 증인이니 석 련주도 나중에 말을 번복하면 아니 되오이다.”
석추명과 남궁진악이 서로 포권을 취했다. 석추명을 바라보는 남궁진악의 눈빛이 먹이를 코앞에 둔 호랑이처럼 번뜩였다.
“그래도 노부가 선배이니만큼 3초는 양보하리다. 검을 뽑으시오.”
어쩐 일로 남궁진악이 선심 쓰듯 말했다.
“사양치 않겠소. 그럼 먼저 출수하겠소.”
석추명은 검을 뽑아 처음부터 중양검법을 펼쳤다. 검광이 작렬하며 남궁진악의 심장을 곧바로 찔러 들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최대효과를 노린 수법이었다.
남궁진악은 석추명이 처음부터 살초(殺招)를 쓰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탓에 당황했다. 게다가 자신이 한 말 때문에 반격도 할 수 없었다.
“제2초 들어가오.”
석추명이 여세를 몰아 끝장내겠다는 듯이 몸을 공중으로 띄우며 비천검을 반월 모양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검기의 폭우가 남궁진악을 강타했다.
남궁진악이 안색을 굳히더니 몸을 이리저리 다급히 굴렸다. 제대로 막아내려면 자신도 검기를 뿌리며 반격에 나서야 하나 조금 전에 자기 입으로 남아일언 중천금 어쩌고 떠든 터에 양보하겠다는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제3초 들어가오.”
남궁진악이 당황하는 모습을 본 석추명이 크게 소리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일어난 시퍼런 검기가 사방을 에워싸 눈앞이 어지러웠다. 검날이 수십 개로 늘어난 느낌이었다.
남궁진악은 호흡이 가빠왔으나 걸음을 재게 옮기며 겨우 석추명의 검기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남궁진악의 옷자락은 검기에 베여 넝마조각이 된 후였다. 그제야 남궁진악은 3초를 양보하겠다고 했던 어리석은 자신을 후회했다.
“이제 제대로 한번 해봅시다. 석 련주.”
남궁진악이 검을 횡으로 그으며 반격에 나섰다. 석추명과 남궁진악이 서로 한데 어우러지더니 순식간에 수십 초식을 나누었다. 쳐다보는 사람들이 더욱 조마조마하여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석추명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자 기분이 묘했다. 석추명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임예린과 자신을 위해 항상 고초를 자처했다. 어린 마음에 그게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못마땅했다.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조차 석추명이 그런 식으로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린 예린은 늘 ‘착한 큰 오빠’만을 걱정했다. 지금처럼....
임예린이 조마조마한 눈길로 석추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조금도 쉬지 못한 석추명을 염려하는 심정이 커다란 눈망울에 가득했다.
기하진의 시선이 그런 임예린의 옆얼굴을 한동안 맴돌았다. 임예린은 자신이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괜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석추명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척하면서 사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기하진은 자신이 자꾸 옹졸해지는 것 같아 괴로웠으나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후!’
속으로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린 기하진의 눈에 남궁진악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는 석추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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