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 광세일소_한추영 - 170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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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0화 결전 (3)
석추명이 전속력으로 경공을 발휘했다.
정도련 수뇌부의 임시 지휘본부 겸 련주의 거처로 통째로 빌린 낙안객잔(樂安客棧).
객잔 앞 대로변에 있는 설랑의 흰 거구가 눈에 띄었다.
설랑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아미파의 제자들. 하지만 다들 설랑이 두려운 나머지 공격할 엄두도 못 내는 듯했다. 다만, 일봉만이 전력을 다해 설랑을 상대하고 있었다.
설랑은 임예린을 찾는 듯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가끔 가슴을 두드리며 짐승 울음 같은 소리를 질렀다.
석추명은 잠시 숨을 고르며 상황을 주시했다. 객잔의 4층 난간에서 머리를 내밀고 아래를 바라보는 기하진이 보였다. 무공을 쓸 수 없는 것이 분한 듯 초조한 표정이었다. 기하진이 가끔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 임예린도 거기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임예린이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안도감이 들었다.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객잔의 정문이 박살 났다. 설랑이 일봉을 붙잡고 정문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설랑이 거대한 체구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일봉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대로 묵사발로 만들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일봉은 부딪힌 충격이 큰 탓인지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다급한 석추명이 몸을 날리려는 찰나, 누군가 석추명보다 한발 앞서 설랑의 등을 질풍같이 찔러 들어갔다. 남이였다. 남이는 계법사태와 함께 일봉을 돕다가 일봉이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즉시 검을 휘두른 것이다.
사실 아미파 제자들은 대부분 소림사의 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에 설랑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설랑과 대치하면서도 선뜻 덤벼들지 못하고 다들 주저하고만 있었다.
하지만 장문인이 위험에 처하자 제일 얌전한 남이가 가장 먼저 덤벼든 것이다. 남이의 검이 등을 찌르자 설랑은 보지도 않고 뒤로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검날이 두렵지 않은 듯 검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던져버렸다.
“악!”
남이는 손목이 부러질 듯한 통증에 그만 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설랑은 곁눈질로 남이를 힐끗 보더니 일봉을 향해 거대한 망치 같은 주먹을 내리쳤다.
휘리릭.
그 순간, 석추명이 절묘한 신법으로 설랑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가 일봉을 구해냈다.
자신의 눈앞에서 석추명이 일봉을 구해가자 설랑이 분노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화를 내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석추명이 일봉을 붙잡은 채 공중으로 도약하며 비웃었다.
석추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랑의 뒤에서 비천검이 거친 파공음을 내며 설랑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막북칠괴 중 이괴 육지우가 몰던 거대한 물소의 머리를 꿰뚫었던 어검술 초식을 횡으로 펼친 것이다.
설랑도 날아오는 검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던지 아까처럼 손으로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옆으로 급히 몸을 젖히며 검을 피했다.
4층 난간에서 내려다보던 기하진에게 석추명이 소리쳤다.
“검갑(劍匣)을 던져다오.”
석추명은 남궁진악과의 비무에 사용하려고 비천검 외에 따로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남궁진악에게 써 보기도 전에 설랑에게 먼저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에 기하진이 제법 큰 검갑을 석추명에게 던졌다. 석추명은 검갑을 붙잡아 등에 동여맸다. 그 사이 일봉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문검을 들고 석추명과 보조를 맞추어 설랑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설랑은 석추명이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방해하자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각시, 내놔.”
설랑이 주먹을 쥐고 객잔의 기둥을 내리쳤다. 어른이 두 팔로 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만큼 굵은 기둥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대번에 부러져 나갔다.
“앗!”
일봉과 석추명은 동시에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쩌억 쩍.
기둥이 부러지자 일층 천장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형님, 일단 저놈을 객잔 밖으로 끌어내야겠습니다.”
석추명과 일봉이 설랑을 공격하며 조금씩 객잔 밖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설랑은 두 사람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선뜻 밖으로 따라 나오지 않았다.
쿵.
설랑이 객잔 안에서 껑충 뛰더니 또 다른 기둥을 부러뜨렸다. 순식간에 객잔의 천장과 벽이 갈라지면서 상층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가 설랑을 유인하겠습니다.”
남이가 어디선가 임예린이 입던 겉옷을 구해와 뒤집어쓰고 얼굴을 가린 다음 설랑의 앞으로 뛰쳐나갔다.
설랑은 임예린의 냄새가 나자 고개를 돌리더니 남이를 붙잡으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남이는 즉시 경공을 펼쳐 밖으로 달아났다.
그때 객잔 벽에서 우르르 소리가 났다.
“객잔이 무너진다. 하진아, 예린이와 함께 뛰어내려라.”
건물이 굉음을 내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터라 기하진도 객잔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하진은 임예린부터 뛰어내리게 했다. 4층이라면 경공의 대가도 한 번에 뛰어내리기는 무리인 높이였다. 게다가 무공을 모른다면 누구나 두려워 망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임예린은 생각보다 강단이 있었다. 밑에서 석추명이 두 팔을 벌리고 있자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휘리릭.
임예린의 하얀 치마가 펄럭이자 커다란 백모란 한 송이가 공중에 피어난 듯했다.
석추명은 임예린을 가볍게 받아 땅에 내리고는 다시 기하진을 받아냈다. 기하진은 이 정도 높이를 뛰어내리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불만인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존심이 센 녀석이 그럴 만도 할 테지. 석추명은 괘념치 않았다.
“괜찮으냐?”
석추명이 묻자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남이를 쫓던 설랑은 임예린이 또 나타나자 잠시 어리둥절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임예린은 천검총에서 설랑의 비호로 살아났기에 설랑에 대한 감정이 복잡했다. 하지만 벌겋게 충혈된 설랑의 두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역시 두렵기는 매한가지라 자신도 모르게 석추명의 등 뒤로 숨었다.
그 모습이 설랑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설랑이 석추명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뒤로 물러나 있어.”
석추명은 두 사람에게 말하며 등 뒤의 검갑을 허공으로 던졌다.
“비뢰환(飛雷環)”
검갑에서 검 열두 자루가 튀어나오더니 허공에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세차게 돌았다. 검에서 일어나는 기세가 워낙 맹렬하여 설랑도 달려오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뢰환을 맛보다니 영광인 줄 알아라, 이놈.”
공력이 깃든 석추명의 손끝이 설랑을 가리키자 허공에서 돌던 열두 자루의 검이 다연발 쇠뇌를 쏜 것처럼 설랑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갔다.
설랑이 황급히 몸을 틀며 피한다고 했으나 팔과 다리에 각기 두 자루씩 맞고 말았다.
석추명이 새로 보인 어검술의 신묘한 경지에 일봉과 기하진마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설랑은 고통스러운 듯 소리를 지르더니 제 손으로 팔과 다리를 관통한 검을 뺐다. 피가 조금 나기는 했으나 몸에 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설랑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네 자루의 검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이놈, 이제 썩 꺼지는 것이 좋을 거야.”
석추명이 소리치며 다시 비검들을 불러모아 공중에 둥글게 띄웠다. 설랑은 허공에서 세찬 기세로 돌아가는 비검을 바라보더니 다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도망칠 곳을 찾는 듯했다.
옳거니. 석추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놈이 사강시가 아니라 활강시라 제 의지가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가 있으니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석추명의 손끝이 움직이자 또다시 비검들이 설랑을 겨냥하고 폭사(爆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설랑은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좌우를 종횡으로 달려 비검을 피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남이를 낚아챘다. 남이는 아직도 임예린의 옷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설랑이 자신을 낚아챈 것이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남이는 그만 두 눈 멀뚱히 뜨고 붙잡히고 말았다.
남이를 붙잡은 설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남이를 임예린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옷을 버려.”
석추명이 설랑을 뒤쫓으며 소리쳤다.
“아니 버리면 안 돼요!”
뒤에서 임예린이 오히려 반대로 말했다.
“절대 버리지 말아요.”
설랑에게 붙잡힌 남이는 임예린의 겉옷을 벗어버리려고 하다가 임예린의 말에 흠칫 손을 멈추었다. 임예린은 설랑에게 여러 번 붙잡혔으나 지금까지 번번이 살아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설랑이 임예린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임예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랑이 알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오싹했다. 석추명도 그제야 그 사실을 알아챈 듯 당황하며 다시 다급하게 소리쳤다.
“겉옷을 절대 벗지 마.”
설랑은 체구는 육중했으나 달리는 속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석추명이 누군가. 만약 육지우처럼 아슬아슬한 묘기를 부리라고 한다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먼 거리를 전력으로 달리는 것은 석추명의 장기였다.
설랑이 큰 걸음으로 도약하듯 뛰어가는 것과는 달리 석추명은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 스르르 미끄러지며 움직였다.
검갑은 두고 왔기에 무기는 손에 든 비천검 한 자루밖에 없었다.
“당장 남이를 내려놓지 못할까.”
석추명이 설랑을 향해 비천검을 내던졌다. 검이 쏜살같이 날아가 설랑의 등을 공격하나 싶더니 허공을 빙그르르 돌아 다시 설랑의 정면을 찔렀다. 그 바람에 설랑은 달리던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석추명은 순식간에 설랑을 따라잡고 손을 번쩍 들어 비천검을 회수했다.
잠시 설랑과 석추명이 서로 노려보며 대치했다. 설랑은 계속 목구멍 깊은 곳에서 야수같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강시는 뼈를 자를 수가 없다던데 비천검도 못 자르는지 어디 한번 보자.”
석추명이 온몸의 진기를 검에 모았다. 그러자 검이 타들어 갈 듯 시퍼런 검기의 불꽃에 휩싸였다. 게다가 다른 검도 아닌, 보검 중의 보검 비천검이었다.
석추명의 몸이 출렁이나 싶더니 어느새 설랑의 뒤에 나타나 남이를 붙잡고 있는 팔을 힘껏 내리쳤다. 서걱.
카오오오.
남이를 붙잡은 설랑의 팔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설랑은 고통스러운 듯 광기에 찬 소리를 질렀다.
석추명이 하얗게 질린 남이를 재빨리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경공을 시전하여 순식간에 수십 장 뒤로 물러났다.
“괜찮으냐?”
남이가 창백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던 임예린의 겉옷은 어디다 떨어뜨렸는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설랑은 땅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주워들고 두 사람을 향해 크게 울부짖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후.
석추명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이어진 싸움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이제는 걸음을 뗄 힘조차 남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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