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 광세일소_한추영 - 1703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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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8화 결전 (1)
수장 비무대회를 보름 앞두고 드디어 출정식이 열렸다.
석추명은 기하진이 먼 길을 여행하면 상태가 악화할까 봐 팽가장에 남으라고 권유했으나 기하진은 단호히 거절했다. 맹주 남궁진악이 무릎 꿇는 모습을 반드시 자신의 두 눈으로 보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10여 년 전 무림맹에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때부터 맹주에게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기하진의 심정을 생각하면 더 만류하기도 어려웠다.
혹시라도 맹주에게 심적 압박을 줄 수 있을까 싶어 뇌옥에 갇혀있던 남궁세가의 가주와 장로, 소가주 남궁척도 모두 데리고 가기로 했다.
정도련 출정대가 동정호 악양루 부근에 당도하자, 석추명은 구대 문파 장문인과 4대 세가의 가주를 모두 불러 모았다.
“그동안 남궁진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발악해왔습니다. 자신이 한 말조차 지키지 않는 그자에게서는 무림 대종사로서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석추명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정도 무림의 장문인들이 모두 신중한 자세로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적이 어떤 짓을 벌이든 간에 우리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 련주가 있을 때 논의되었던 사항을 참고하여 다섯 개의 단(團)을 꾸리고자 합니다. 단의 임무와 역할은 련주와 수뇌부가 머무는 중앙을 수호하며 사방을 지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다섯 방위와 관련 있는 만큼, 편의상 오방단(五方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먼저, 서방 백호단은 하북팽가, 제갈세가, 사천당가, 산동악가 등 사대세가로 구성되며 백호단의 단주는 팽 장주께서 맡으십시오. 백호단은 서쪽으로 침공해오는 적을 막고 나머지 4개 단을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제갈세가와 사천당가는 진법과 각종 암기술에 능하니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석추명이 팽연을 바라보자 팽연이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다음은 동방 청룡단입니다. 청룡단은 곤륜파, 종남파, 점창파 제자로 구성되며 단주는 곤륜파의 운양 진인께서 맡아주십시오. 청룡단은 동쪽을 방어합니다. 그다음 현무단은 북방을 수호하며 무당파, 화산파, 청성파, 공동파 제자로 구성합니다. 단주는 무당파의 허각 도장께서 맡아주십시오. 화산파와 청성파는 제자의 수가 적기 때문에 현무단은 다른 병단(兵團)보다 문파의 수는 많으나 소속된 실제 병력의 수는 비슷할 것입니다. 특히 허각도장께서는 무당파 자운검수 36명이 반드시 현무단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청룡단과 현무단은 실전에서 선봉을 맡는 만큼 본 련의 주력 부대가 될 것입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곤륜파 운양자와 무당파 허각이 동시에 큰소리로 화답하며 머리를 숙였다.
“다음 남방 주작단은 개방에서 맡습니다. 당연히 단주는 송 방주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주작단은 남방을 수호하지만 주 임무는 적의 동향 파악과 정보 수집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송 방주께 제가 따로 드릴 임무가 있으니 나중에 따로 뵈면 좋겠습니다.”
석추명의 말에 송 방주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소이다. 무엇이든지 시켜만 주시오.”
“마지막으로 중앙의 천룡단은 소림사와 아미파에서 맡으며 단주는 아미파의 일봉 장문인께서 수고해 주십시오. 소림사는 공각대사 외에 지금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이 없으니 아미파에서 특히 더 신경을 써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천룡단은 저와 임 군사, 기 전임련주를 지키는 수호단의 역할입니다.”
일봉이 말없이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팔선(八仙)께서는 원로고수들이시라 전투에 참여하시라고 말씀드리기가 죄송합니다만 팔선께서 참여하신다면 후배들이 더욱 힘을 얻을 것입니다. 특히 적진에 숨어있을 고수를 팔선께서 처리해주십시오.”
석추명의 말이 끝나자 팔선 중에 제일 키가 작은 마룡자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시게. 우리가 나이는 많아도 아직도 팔팔하다네. 비실비실한 후배들보다 훨씬 믿을 만할 게야.”
마룡자가 옆에 있는 자신의 사질인 점창파 장문인 복호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복호일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석추명은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적이 독을 쓸지도 모르니 앞으로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을 각별히 조심하시고 우리가 머무는 처소에 낯선 사람을 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 혼자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다섯 명 이상 단체 행동을 하십시오. 당분간은 좀 불편하더라도 제 말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석추명의 말이 끝나자 구대문파와 사대세가 수장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임예린은 석추명이 구대문파 장문인들에게 당당하게 명을 내리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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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 비무 결전 전날, 동정호 악양루 근처의 냉수포(冷水铺).
허각도장은 앞에서 달려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석추명과 임예린이 오방단을 조직하고 자신을 여기에 배치할 때만 하더라도 설마 적이 오겠나 싶었다. 비무라고 하는 것이 서로의 무공을 겨루는 것인데 그 전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허허, 내가 맹주를 그토록 오래 겪고도 아직 어린 소저보다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구나. 그 늙은이가 정말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허각도장이 결연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자운검수 36명이 선두를 맡는다. 그 뒤를 청성파와 화산파가 따르고 공동파는 후미를 맡아주시오. 자, 나갑시다. 진격.”
허각도장은 현무단의 단주인 만큼, 가장 앞에서 적을 맞이했다. 달려오는 적의 제일 앞에 선 자는 흰 도포를 입고 머리를 품(品)자 모양으로 올린 늙은이였다. 현무단이 모두 도교 문파로 구성되었으나 오히려 자신들보다 적이 더 도사 같은 풍채였다. 바로 백골마군이었다.
‘저 늙은이가 어디 숨어있다가 나타났을꼬?’
허각도장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바로 뒤따라오던 자운검수의 수장 수운(秀雲)이 말했다.
“단주님, 백골마군 양옆에 짐승을 부리는 기이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말에 허각도장이 수운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백골마군에게서 양옆으로 과연 용모가 기이한 자 일곱 명이 각각 짐승을 타거나 부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중에 백골마군 바로 옆에 있는 자는 놀랍게도 백수지왕(百獸之王)이라는 호랑이를 타고 있었다.
세상에 호랑이를 조련하여 타고 다니는 자가 있단 말인가? 처음 보는 광경에 허각 도장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그때 팔선 중 무당파의 원로인 료료자(了了子)와 청성파 원로 청학자(靑鶴子)가 허각 옆으로 달려왔다. 두 원로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짐승을 타고 오는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막북칠괴(漠北七怪)니라. 저것들이 여기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구나. 호랑이를 타고 오는 놈이 칠괴의 우두머리인 독안호(獨眼虎)다. 백골 늙은이도 만만치 않은데 저놈들까지 가세했으니 싸움의 승패를 점치기 어렵겠구나.”
료료자의 말에 허각도장은 깜짝 놀랐다. 막북칠괴의 이름은 허각도장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막북 무림을 호령하는 괴짜들로 성정이 잔혹하고 손속이 악랄하다는 평이 나 있었다. 다행히 대막 아래로 내려온 적이 없어 중원 무림에는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지금 여기 동정호 인근에 출현한 것이다.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달려오는구나. 으하하하.”
백골마군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렸다.
“백골 늙은이야. 이미 백골이 되어 썩어 문드러진 줄 알았더니 그 더러운 목숨을 용케도 보전하고 있구나.”
팔선 중 한 명인 화산파의 매곡자가 갑자기 뒤에서 앞으로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이게 누구신가? 화산파의 매곡자가 아니신가? 죽은 줄로만 알았더니 여태 살아있었던 게로군.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새파란 후배들뿐이라 적잖이 외로웠거늘 참으로 반갑구나. 크하하하.”
“누가 네놈 따위를 반긴다더냐? 흥. 꼴에 같잖게 신선 흉내를 즐기나 본데 이참에 정말 선화(仙化)하게 해주마.”
마룡자 못지않게 입담이 걸쭉한 매곡자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며 백골마군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났다. 피리 소리에는 공력이 실려있어 시퍼렇게 날 선 도검처럼 매곡자를 공격해왔다. 깜짝 놀란 매곡자가 황급히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검기의 막을 만들어 올렸다.
끼익 끽 끽.
피리 소리가 검기의 막에 닿자 손톱으로 쇠붙이를 긁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터져 나오더니 기막(氣幕)에 구멍이 났다. 피리 소리가 기막을 뚫은 것이다.
그 순간, 료료자와 청학자가 매곡자의 뒤에서 한 손을 번쩍 들어 매곡자의 등에 갖다 댔다. 내공 전이법을 구사한 것이다. 그러자 매곡자의 검에서 ‘우웅’하고 웅혼한 검명이 터져 나오더니 아까보다 한층 더 두터운 검기의 막이 허공에 쭉 펼쳐졌다.
“으하하하, 어떤가? 막북칠괴 중 둘째, 육지우(六指牛)의 실력이.”
피리 소리에 놀라 아직도 간담이 서늘한 허각도장의 귀에 백골마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팔선급 고수 세 사람이 나서서 겨우 막아낸 저 음공의 주인이 막북칠괴의 둘째란 말인가. 그렇다면 첫째는 얼마나 고수란 말인가? 나머지는 또 어떻고? 허각도장이 굳은 표정으로 독안호를 쳐다보았다.
“쓸만하군. 하지만 그놈의 피리가 두 동강이 나도 큰소리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매곡자의 검이 번쩍 하나 싶더니 순식간에 빛줄기가 되어 육지우에게 달려들었다. 쾌검의 절대치를 보여주는 속도였다.
매곡자가 기습공격을 해올 줄 몰랐던 육지우는 자신의 눈앞으로 검이 날아들자 깜짝 놀라 즉시 타고 있던 검은 소의 등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쏴아악.
매곡자의 검이 소의 등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놈의 소가죽이 얼마나 두꺼운지 가죽이 베이기는커녕 검이 쭉 미끄러지고 마는 게 아닌가. 그제야 막북칠괴는 무공이 기이할 뿐만 아니라 부리는 짐승도 괴상하다는 말이 실감 났다.
이래서야 어떻게 적을 섬멸하겠는가? 초조한 마음이 드는데 허공에 뜬 육지우가 철피리를 앞으로 쭉 뻗으며 자신을 공격해왔다. 매곡자는 황급히 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철피리를 막았다.
그와 동시에 료료자와 청학자가 각각 독안호와 백골마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허각도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로 선배들이 앞장서는데 후배들이 기죽어 있을 수는 없었다.
“자운검수는 즉시 공격하라. 한 놈의 적도 살려 보내지 마라.”
허각도장의 목소리가 전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자운검수 36명이 양쪽으로 쫙 나뉘며 바람같이 검을 휘둘렀다. 양측의 병사가 순식간에 어우러지며 혼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각도장도 막북칠괴 중 인상이 표독스럽고 유난히 다리가 두꺼운 자를 향해 검을 퍼부었다. 유일하게 짐승을 부리지 않는 그는 일곱 명 중 넷째로 타각귀(駝脚鬼)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타각귀는 타조가 두 발로 걷어차는 듯 각법이 특히 남달랐다.
“이놈. 무당의 허각이 여기 있느니라. 목을 내놓아라.”
허각도장이 검을 번뜩이며 무당파가 자랑하는 절정의 내가검법, 요지유검(繞指柔劍)을 펼쳤다. 검날이 휘리릭 휘며 좌를 찌른다 싶더니 우를 찌르고, 아래를 공격한다 싶더니 돌연 위를 벴다.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휘어지듯이 검이 절묘하게 휘어 공격부위를 종잡을 수 없게 했다.
하지만 타각귀의 다리는 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무기도 없이 양다리로 허각도장의 검을 막아내던 타각귀가 돌연 한쪽 발로 검을 찍어누르며 다른 쪽 발을 번쩍 들어 허각도장의 가슴을 찼다. 타조의 발에 차이면 사자같이 큰 짐승도 복부에 구멍이 나고 만다.
타각귀의 발이 허각도장의 가슴뼈를 으스러뜨리는 찰나, 옆에 있던 화산파의 열화가 때마침 허각 도장의 어깨를 붙잡고 뒤로 빼냈다. 간발의 차이로 가슴뼈가 함몰되지는 않았으나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허각도장이 눈길을 돌려 옆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다행히 현무단은 네 개 문파로 구성된 만큼 팔선 가운데 네 명이 참전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막북칠괴와의 싸움에서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싸움이 계속되면 될수록 길보다는 흉이 더 많을 것만 같았다.
허각도장의 입에서 낮은 침음(沈吟)이 새어 나왔다. 여기의 상황이 이럴진대 다른 곳의 상황도 그리 좋을 것 같지 않았다. 적은 세 방향에서 나누어 쳐들어왔다. 다행히 우리 측도 이에 대한 대비로 미리 군사를 배분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시작도 못 해보고 전멸할 뻔했다.
백골마군이 여기로 온 것을 보면, 동쪽을 막고 있는 청룡단이나 동남쪽을 방어하는 백호단도 상황은 비슷할 것 같았다. 그쪽은 또 어떤 놈들이 가세했을까.
어쩌면 수장 비무대회는 처음부터 미끼였는지도 몰랐다. 남궁진악이 자신에게 반항하는 정도련의 핵심인사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꾸민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야. 전세를 바꿀 계기가 있어야 해.’
허각도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타각귀와 막북칠괴 중 다섯째 영응시(靈鷹視)를 맞이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는 열화를 도우러 달려갔다.
그때 또다시 귀를 찢을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괴 육지우가 달리는 소 위에 꼿꼿이 서서 피리를 불며 공력이 실린 음파를 내뿜고 있었다. 육지우가 탄 검은 소는 놀랍게도 전장을 종횡무진 달리고 있었으며, 철피리 소리는 기이하게도 정도련 무사들만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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