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 광세일소_한추영 - 1699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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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7화 정도련주 (4)
석추명은 기하진이 연못 건너편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하진이 무안해할까 봐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계속 모른 척하기 불편해서 막 소리쳐 부르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기하진의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중독되어 무공을 쓸 수 없는 기하진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으나 연못 건너편에 있던 석추명에게는 미미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석추명이 벌떡 일어나 연못 건너편 기하진이 숨은 곳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의 뒤로 누군가 접근하고 있었다. 옷차림새로 보면 팽가장에서 일하는 종복인 듯하나, 그렇다면 이토록 은밀히 기척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은신(隱身)의 능력으로만 봤을 때는 팽 장주보다 오히려 공력이 더 높았다.
그동안 남궁진악에게 하도 많이 당해서인지 언뜻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석추명은 대뜸 절정의 경공을 펼쳐 연못 위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진아, 조심해라.”
석추명의 발이 연못 위에 떠 있는 연잎 몇 개를 툭툭 밟더니 그 탄력으로 순식간에 연못을 넘어갔다.
석추명이 소리치는 순간, 기하진에게 접근하던 종복은 자신이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속력으로 기하진에게 덤벼들었다.
쐐애액.
그제야 기하진도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종복이 기하진의 어깨를 움켜잡으려는 듯이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펼치며 달려들었다. 기하진은 지금 무공을 쓸 수 없었으나 상승무공을 익힌 몸이라 적의 손길이 다가온다 싶은 순간 절묘하게 어깨를 돌려 공격을 피했다.
바로 그다음 순간. 석추명의 비천검이 공중으로 떠오르나 싶더니 거친 파공음을 일으키며 종복을 공격해 들어갔다. 석추명이 마음이 급한 나머지 어검술부터 먼저 펼친 것이다.
비천검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종복을 찔러 들어갔다. 하지만 종복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비천검을 막았다. 저런 침착함은 무수한 실전을 치른 고수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석추명이 발로 허공을 차 날아가며 손을 양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종복의 검에 가로막힌 비천검이 대번에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적의 안면부를 공격했다. 이전에는 공력이 부족해서 어검술을 삼 초식 이상 펼칠 수 없었으나 소림 신승의 공력을 얻은 이후로는 어검술의 움직임이 자유자재였다.
비천검이 다시 공격해 들어가자 종복은 검을 움직여 비천검을 ‘땅’ 소리 나게 가로막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뒤로 순식간에 10여 장이나 물러섰다. 비천검을 가볍게 막아내는 공력으로 봐서 무공이 절대 석추명의 아래가 아니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석추명이 소리쳤다. 종복은 석추명을 바라보며 얼굴 근육은 움직이지도 않은 채 ‘크크크’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네놈은 성도에서 마립을 구해간 바로 그놈이구나.”
그제야 종복의 정체를 알아본 기하진이 소리쳤다. 그러자 종복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상대방이 절정고수가 분명한데 암만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강호에 저런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남궁진악, 설랑에 이어 또 다른 막강한 적이 출현한 게 아닌가 싶어 석추명은 가슴이 철렁했다.
종복은 기하진을 공격하다가 석추명에게 가로막히자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곧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그렇게 쉽게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석추명이 발끝에 힘을 주자 미끄러지듯 지면 위를 스르르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석추명의 검이 적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종복의 몸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귀연신공?”
석추명이 너무 놀란 나머지 걸음을 멈추었다. 귀연신공은 음양사자의 독문 보법이었다. 흑련교 내에서도 음양사자 외에는 귀연신공을 쓰는 고수는 없었다. 그런데 귀연신공을 쓰는 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석추명은 기감을 극대화했다. 귀연신공은 어차피 근접전에서만 유용할 뿐, 모습을 감춘 채 장거리를 달아날 순 없었다.
비천검을 손에 쥐고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던 석추명이 갑자기 벼락같이 어느 한쪽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챙.
별안간 금속성이 울리더니 검은 연기와 함께 종복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종복의 무공도 만만치 않아서 번개 벼락 치듯 찔러 들어간 석추명의 검을 이미 막아낸 뒤였다.
“제법이군.”
종복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복화술이라도 하는 것인지 이번에도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대로 한번 붙어보겠느냐?”
종복은 석추명에게 눈길을 한번 주더니 답은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석추명은 혹시라도 놓칠세라 천룡보를 발휘하여 즉시 따라붙었다.
그때쯤 팽가장의 많은 고수가 적이 침입했다가 달아난다는 것을 알았으나 두 사람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감히 쫓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팽가장을 벗어나더니 이내 인적이 드문 들판으로 달려갔다.
그야말로 허공을 가르는 화살처럼 쏜살같이 달려가던 종복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토록 빨리 달리다가 속력을 줄이지도 않고 별안간 멈추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는 놀랍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으나 석추명 같이 무공이 범속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적이 걸음을 멈추자 석추명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석추명이 숨돌릴 겨를도 없이 적의 손이 갑자기 석 자나 늘어나며 자신의 목을 움켜쥐려 드는 것이 아닌가. 갈고리처럼 잔뜩 구부린 손가락 모양을 보니 이번에도 음양사자의 독문 무공인 귀조수였다.
석추명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눈앞의 적이 감히 음양사자 흉내를 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따위 수작이 통할 것 같은가? 네놈이 본연의 무공을 드러내지 않고는 절대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석추명의 검이 출렁거리더니 곧 검으로 파도를 이루었다. 중양일지에 수록된 삼대 검법 중 첫 번째 숭양일기검의 절초, 벽해검파(碧海劍波).
검이 쉬지 않고 움직이며 상대방을 압박해 갔다. 검이 출렁일 때마다 상대방을 압박하는 엄청난 검기를 뿜어냈다. 웬만한 고수라면 검을 받아내기는커녕 검기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다.
하지만 팽가장 종복의 옷을 입은 적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물고기처럼 검의 파도가 출렁이는 속을 요리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석추명의 눈빛이 신중한 빛을 띠었다.
이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백골마군이나 나찰녀보다 고수라는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음양사자에 버금가는 고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연 석추명의 검세가 바뀌었다. 검이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완만하다가도 빠르게 움직이며 수없이 많은 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석추명의 검을 바라보노라면 눈앞이 어지러워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기이하게도 검 하나에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검기가 발출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양강(陽剛)한 기운, 다른 하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음유(陰柔)한 기운이었다. 바로 중양검법 중 두 번째, 음양어기검(陰陽御氣劍)이었다.
석추명의 목적은 적이 자신의 무공을 쓰게 하는 것이었다. 과연 검세가 바뀌자 마냥 피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적이 공격을 피하며 검을 빼 드는가 싶었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석추명이 적을 향해 검을 떨치려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기운이 가슴을 압박해왔다. 산을 무너뜨릴 만한 장력. 바로 철산장(鐵山掌)이었다.
이 장법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석추명은 소림신승이 넘겨준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다급히 쌍장을 뻗어냈다.
펑. 두 사람의 장력이 부딪히자 대번에 거친 폭발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적은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이미 수십 장 밖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네놈은 남궁진악이었구나!”
석추명이 달아나는 적을 향해 소리쳤다. 적이 음양사자의 무공을 쓸 때만 하더라도 긴가민가했었으나 귀면쌍살의 철산장까지 구사하자 확신이 들었다. 세상에 그 두 사람의 무공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남궁진악 외에 누가 또 있겠는가?
남궁진악이 인피면구를 쓰고 팽가장의 종복으로 변장하여 몰래 들어왔던 것이다.
“하하하, 화산신검이라 하여 대단할 줄 알았더니 별것 없구먼. 하진이란 놈은 중독되어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수장 비무에 자네가 나오겠군. 차라리 잘 되었어. 아무리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로서니 제자 놈이 스승을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볼썽사나웠는데 말이야. 그럼 단오절에 보세나. 껄껄껄.”
남궁진악이 웃음소리만 남기고 어느새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석추명은 남궁진악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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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님, 큰일 났습니다.”
황 총관의 안색이 사색이었다. 못 볼 것이라도 봤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몸도 덜덜 떨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팽연이 언짢은 눈길로 황 총관을 바라보았다. 막 정도련 수뇌부 아침 회의에 참석했다가 나오는 길이던 팽연은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했다. 남궁진악과의 수장 비무가 얼마 남지 않아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인데, 남궁진악이 종복으로 변장하고 숨어들어온 일 때문에 아침 회의에서 제법 고성이 오간 것이다.
“그, 그것이 옆 동네 사음현(思飮縣)에서 열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치는 집단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니 누가 떼로 죽어가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던 때라 팽연은 황 총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고작 그런 일로 아침부터 이 난리를 치는 게냐?”
“그, 그게 아니옵고 열 명이 모두 목이 뽑혀... 죽었다고 합니다.”
“목이 뽑혀 죽어?”
그제야 팽연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예. 그런데 그 열 명이 모두 덩치도 큰 장정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마을에 결혼식이 있었는데 웬 덩치 큰 놈이 난데없이 나타나 다짜고짜 신부의 얼굴을 보려고 했답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장정들이 그놈을 막아서다가 그만.... 지현(知縣)에서 조사 나온 관리의 말에 따르면 열 명 모두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단번에 죽은 것 같다고 합니다.”
“무엇이라?”
팽연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죽은 방식이 아무래도 소림승들과 비슷했다. 설마 설랑이 살아 돌아온 것인가?
“즉시 장원의 경비를 평소보다 두 배 더 강화하라.”
팽연은 이 일을 알리러 막 나왔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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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랑이 분명합니다.”
팽 장주의 이야기를 듣고 일봉과 석추명, 그리고 정도련의 고수 몇 명이 현장을 다녀왔다. 시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말을 확인한 결과 설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봉의 말에 임예린의 눈빛이 떨렸다.
“그놈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아가씨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봉이 임예린을 보며 말했다. 일파의 장문인이 되었으나 오래전부터 임예린을 아가씨라고 부르던 습관은 금방 바뀌지 않았다.
“큰일이군요. 맹주와의 수장 비무가 바로 코앞인데 설랑 그놈이 다시 살아서 돌아오다니.”
석추명의 얼굴에 수심이 어렸다.
“당분간 예린이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장원의 경계를 더욱 높이도록 합시다.”
당장 설랑을 대적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잠시 두려움에 질려 있던 임예린이 심호흡을 내쉬며 말했다.
“사마경을 만나봐야겠어요. 사마경이라면 설랑을 처치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임예린을 주목했다. 사마경은 지난번 천검장에서 다리를 다친 이후 팽가장에 머물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연금상태였다. 사마경이 지난날을 뉘우치기는 했으나 풀어주었다가 만에 하나라도 다시 맹주 측에 붙는다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마경도 맹주가 언제 자신을 죽이려 할지 모르기에 차라리 팽가장에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석추명이 승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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