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 광세일소_한추영 - 1698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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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6화 정도련주 (3)
기하진은 꼬박 7일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사소혜의 독술도 신묘한 경지에 다다랐는지 8일째 되는 날 아침, 기하진이 드디어 눈을 떴다. 석추명은 기하진이 의식을 차리자 누구보다 기뻐했다. 기하진의 상태가 좋아지면 련주직을 다시 기하진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간 있었던 일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입으로 기하진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석추명이 기하진의 방으로 가자 이미 사소혜가 임예린과 함께 와 있었다.
“대주님, 오셨어요?”
석추명을 반기는 사소혜는 며칠 밤을 새웠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진이가 깨어났다고? 그래, 상태는 어떠하냐?”
“다행히 의식을 회복하기는 했는데 독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아닙니다. 며칠 더 지켜보면서 계속 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저보다 임 소저가 더 고생했을 겁니다. 옆에서 저보다 더 노심초사했으니까요.”
미소 짓는 사소혜의 등 뒤로 기하진에게 미음을 먹이는 임예린의 모습이 보였다. 기하진은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 임예린이 떠 먹여주는 대로 고분고분 받아먹었다. 그런 기하진이 대견한지 임예린이 쌩긋 웃더니 자신의 손으로 기하진의 입가에 묻은 미음을 닦아주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부드러운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유독 다정해 보였다. 아프다가 깨어서인지 기하진의 눈빛도 평소와는 달리 그렇게 차갑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장면,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석추명은 갑자기 명치 끝이 묵직해지더니 속이 시큰거리며 아려왔다. 임예린이 설랑에게 납치되었다가 고뿔에 심하게 걸려서 돌아왔을 때, 그때도 이런 모습을 본 것 같다. 당시 두 사람이 신혼부부 같이 보인다던 사소혜의 말도 생각났다.
‘녀석들. 정말 둘이 참 잘 어울리는군.’
임예린은 자신이 온 것도 모르고 기하진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석추명은 왠지 두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슬그머니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그냥 가시게요?”
사소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석추명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쉬. 나중에 다시 오마.”
기하진이 깨어나서 기쁜데 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
기하진이 의식을 차리고 다시 7일이 흘렀다. 기하진은 이제 거동을 할 정도는 되었으나 여전히 무공을 쓸 수는 없었다. 해독법을 알지 못해서 독 기운을 몸속 한구석에 몰아넣어 둔 상태라 언제든지 재발할 우려가 있었다.
의식을 차린 기하진은 자신이 무공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역시 남궁진악과의 수장 비무를 제일 염려했다. 하지만 석추명이 제2대 정도련주로 남궁진악과 싸우게 되었다는 말을 듣자 잠시 눈빛이 흔들리기는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석추명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석추명은 오히려 기하진의 얼굴을 보는 것이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기하진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었다.
‘휴, 답답하구나. 하진이가 빨리 회복되어 무공을 쓸 수 있다면 련주직을 다시 돌려줘도 되겠지. 맹주가 쓴 독이니 혹시 남궁가주가 해독법을 알지 않을까? 한번 만나봐야겠다.’
석추명은 팽가장 뇌옥에 수감된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진환을 찾아갔다. 남궁진환은 오랜 투옥 생활로 당당했던 가주의 모습은 사라지고 상당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열양단혼독의 해독법을 아는지 묻는 석추명의 물음에 남궁진환은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석추명은 한숨을 내뱉었다.
‘해독약을 아는 사람은 역시 맹주밖에 없는 것인가?’
석추명의 답답한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남궁진환은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며 말을 꺼냈다.
“석 대협, 내 목숨을 미끼로 형님을 협박하더라도 형님은 듣지 않을 것이오. 만약 형님에게서 해독제를 구하겠다면 형님의 목숨과 맞바꾸는 수밖에 없소. 그분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니.”
남궁진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친형제라는데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일까? 석추명은 의혹이 들었다.
“형님이 맹주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행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잘못된 명인 줄 알면서도 그게 모두 우리 집안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형님의 악행에 내가 동참했던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소.”
간만에 말을 해서 목이 아픈지 남궁진환은 억지로 침을 삼켰다.
“남궁세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행은 모두 나와 내 아우들이 책임지겠소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고 무림에 해악을 끼쳤으니 지금 당장 칼을 깨물고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소. 다만,”
남궁진환이 갑자기 말을 끊더니 건너편에 투옥되어 있던 그의 아들, 남궁척을 바라보았다. 남궁척은 바닥에 정좌한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석추명이 뇌옥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그런 상태였는데 남궁진환의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내 아들의 목숨만은 구해주시오. 척이는 죄가 없소. 죄가 있다면 남궁가에 태어났다는 죄뿐. 저 아이는 이 못난 아비보다 훨씬 더, 아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맹주의 명에 반항하려고 했소.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맹주의 명을 저 어린놈이 어떻게 마냥 거부할 수 있었겠소?”
남궁척을 바라보는 남궁진환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소리가 떨렸다.
“팔, 다리 하나쯤은 잃어도 상관없소이다. 살 수만 있다면...! 그러니 부디 그 정도에서 용서하고 저 아이의 목숨은 살려주시오. 내 이렇게 무릎을 꿇고 비오리다.”
뇌옥 안에 갇혀있던 남궁진환이 족쇄를 찬 채 석추명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석추명은 남궁진환의 행동에 놀랐으나 철창이 두 사람을 가로막아 남궁진환의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 이렇게 부탁하리다. 제발, 저 아이만이라도 꼭 좀 살려주시오.”
남궁진환의 두 눈에서는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석추명은 문득 남 교주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했던 대웅 대협이 떠올랐다. 그때 대웅 대협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아들의 목숨만 살려주면 원망하지 않겠다며 죽어갔다.
후.
석추명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부모의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인가? 석추명은 착잡한 심정으로 남궁척을 바라보았다.
남궁진환의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인지 눈을 감고 석상처럼 앉아있던 남궁척의 두 눈에서 조용히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석추명이 아무런 말도 없이 뇌옥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졌는지 상당히 어두웠다. 석추명은 마음이 무거워 팽가장 안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한참 걷다 보니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석추명은 소리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거문고 소리는 연못가에 세워진 아담한 팔각 정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팔각 정자는 처마마다 붉은 등을 달아 연못가 주변이 대낮처럼 밝았고, 얇은 비단 휘장이 바람에 가볍게 휘날리고 있었다.
정자 안에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거문고를 품에 안고 앉아있었다. 휘장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상아처럼 흰 손가락이 거문고 위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마른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상큼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미풍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꽃향기도 나는 듯했다.
석추명은 그 광경에 넋이 나가 거문고 연주가 끝나도록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고 휘장이 걷혔다.
“추명 오라버니.”
뜻밖에 정자 안에서 나온 사람은 임예린이었다. 잔잔한 꽃무늬가 수 놓인 비단 치마를 입은 임예린은 막 미인도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았다. 그동안 임예린과 함께 온갖 일을 겪으며 함께 다녔어도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너였구나. 음율이 하도 아름다워 누가 연주를 하나 궁금했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거문고를 한번 꺼내봤어요. 오라버니께서 듣기 좋아하시니 한 곡 더 연주해볼까요?”
“좋지.”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임예린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이리로 올라오세요. 가까이서 들으시면 더 좋을 거예요.”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은 정자 위로 올랐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니 연못가에는 노란 수선화와 보라색 제비꽃이 피어있고 물 위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연꽃이 피어 운치를 더했다. 연잎 아래로 물고기가 유영하며 지나가는 모습도 언뜻 보였다.
거문고 현을 고르던 임예린이 석추명을 한번 바라보고 미소 짓더니 가늘고 흰 손가락을 현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듯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거문고에서 흘러나왔다.
바람이 살랑 불자 임예린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흩날리며 고운 목선이 드러났다. 연못가에서 올라오는 짙은 꽃향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연주가 끝났다.
“정말 아름다운 음율이구나. 그런데 너는 노리는 사람이 많으니 장원 안에 있더라도 혼자 다니지 말거라. 설랑이나 남궁진악 모두 여기라고 못 들어올 사람들이 아니다.”
“설랑이 살아있을까요?”
임예린이 석추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득 임예린의 붉은 입술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설랑은 활강시라 재가 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고 했으니 아마 아직 살아있겠지.”
임예린이 생각에 빠진 듯 잠시 연못 위에 핀 연꽃을 응시했다. 천검총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설랑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봉 형님도 이제는 안 계시니 호위무사를 새로 뽑아야겠구나. 설랑이나 남궁진악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걱정하지 마세요. 누군가는 도와주겠지요.”
“누가 너를 도와준단 말이냐?”
“설마하니 어딘가에 평생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줄 사람 하나 없겠어요?”
임예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석추명이 그 모습을 잠시 묵묵히 바라보았다.
“시집가고 싶은 게로구나. 그래,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느냐?”
예상치 못한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네?”
임예린이 석추명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문득 석추명의 머리에 며칠 전에 보았던 기하진과 임예린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리니 두 사람을 맺어줘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왠지 소중한 것을 놓친 듯 가슴이 먹먹해졌다.
석추명은 임예린의 옆에 있는 사람이 기하진이 아니라 자신이면 어떨지 잠시 생각을 했다.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안될 일이다. 하진이를 위해서도. 예린이를 위해서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오라버니?”
석추명이 갑자기 흐뭇한 미소를 짓자 임예린 역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 시집 보낼 생각을 했다.”
“네?”
석추명의 대답에 임예린이 얼굴을 붉혔다.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자 입에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오라버니가 저를 놀리시는군요.”
임예린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얄밉다는 듯 석추명의 팔을 살짝 때렸다.
“시집가기 싫은 건 아닌가 보군.”
석추명이 다시 껄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임예린이 부끄러운 듯 다시 석추명의 팔을 통통통 때렸다. 누가 봐도 한 쌍의 아름다운 연인이었다.
연못가 건너편 수풀 속에서 그 모습을 누군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즐거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눈썹이 연신 꿈틀거렸다.
‘련주직을 뺏어가더니 이제는 예린이마저 뺏어가려고요? 형님, 그렇게는 안 됩니다. 저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습니다.’
석추명을 쏘아보는 기하진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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