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86화 (186/201)

#   186 - 광세일소_한추영 - 169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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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5화 정도련주 (2)

련주 즉위식이 열린 날 저녁, 구대문파와 사대세가의 장문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처음으로 열린 정도련 평의회였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련주가 즉위하는 첫날부터 중태에 빠지다니 정도련의 앞날이 걱정이구려.”

곤륜파의 장문인, 운양자가 탄식했다.

“남궁진악이 서찰에 그 같은 장난질을 쳐놓은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독을 썼기에 내공이 제일 강한 련주만 당했을까요? 기 련주의 내공은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올라서 백 가지 독약이 무효할 터인데 어떻게 독에 닿자마자 정신을 잃었을까요? 게다가 그토록 강력한 독이라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지 정말 납득이 안됩니다.”

청풍 도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제의 말이 일리 있군. 독은 서찰 안의 황지에 발려있던 게 분명하네. 황지를 잡고 나서야 중독이 되었으니. 하지만 기 련주를 중독시킬 만큼 맹독이라면 서찰을 가지고 온 황총관도 독에 당해야 했지. 그처럼 맹독이 종이 한 장 뚫지 못한대서야 말이 안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황 총관의 내공이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은데 어떻게 무사한지 이해가 안 되는구먼.”

청송자가 사제 청풍 도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침 오독신교(五毒神敎)의 전인이 우리 중에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고 임 소저가 사 소저와 함께 련주의 상태를 살피고 있으니 잠시 기다리십니다.”

운양자가 말을 하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임예린과 사소혜가 들어왔다.

“련주의 상태는 좀 어떻소이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초조한 마음을 드러내는 듯 질문을 던지는 운양자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임예린과 사소혜는 굳은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정적이 흐른 뒤 사소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 련주가 당한 독은 열양단혼독(熱陽斷魂毒)이라는 것입니다. 이 독은 양강지력(陽剛之力)의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는 치명적이지요. 내공이 높으면 높을수록, 무공의 기질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독입니다. 저희 오독신교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 년 전 홍진노괴도 이 독에 당해서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 후 열양단혼독은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나타났는지 모르겠군요.”

사소혜의 말에 좌중의 술렁거림이 커졌다.

“그렇다면 기 련주가 당한 것도 홍진노괴의 천마검법을 익혔기 때문이란 말이오?”

무당파의 허각 도장이 사소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어허, 천하 삼대신공 중의 하나인 천마검법에 이런 맹점이 있었다니. 설마하니 맹주가 이점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어쩌면 남궁진악은 처음 기 련주를 제자로 받아들여 천마검보를 넘길 때부터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궁진악 자신이 먼저 천마검법을 익혔겠지요.”

임예린의 말에 사람들이 모두 경악했다. 남궁진악이 치밀한 자인 줄은 알지만 어떻게 이런 것까지 모두 계산에 넣었단 말인가? 기하진은 처음부터 남궁진악에게 철저하게 이용된 말(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 치료법은 있소이까? 언제쯤 깨어날 것 같소?”

운양자가 사소혜에게 물었다.

“열양단혼독은 실전된 지 오래되어 알려진 해독법이 없습니다. 일단 제가 독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손을 써놓긴 했으나 기 련주가 깨어날지, 않을지조차 지금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사소혜의 말에 석추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생사를 알 수 없단 말이냐?”

목소리가 떨렸다. 석추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소혜는 석추명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한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련주의 목숨이 위중한 것도 문제지만 당장 한 달 뒤로 다가온 수장 비무는 어떻게 한단 말이오? 이번에야말로 남궁진악 그 늙은 여우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더니.”

청풍 도장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남궁세가 놈들의 목을 칩시다. 남궁진악이 이처럼 우리를 우롱하지 못하게 우리도 그 간적에게 따끔한 맛을 보게 합시다.”

청풍 도장의 말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합시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포함한 맹주의 여섯 아우와 남궁세가 소가주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립시다.”

남궁진악의 비열한 수에 분노한 사람들이 흥분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때 임예린의 목소리가 좌중의 웅성거림을 대번에 잠재웠다.

“왜 안 된다는 것이오?”

청풍 도장이 따지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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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궁진악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쥐와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맹주의 아우들과 남궁세가 소가주의 목을 친다면 남궁진악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인질로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극단적인 상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련주가 중독이 되어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청풍도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다른 문파 장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임예린의 말에 청풍도장이 벌떡 일어섰다.

“임 소저, 아니 임 군사가 제갈량을 찜쪄먹을 만큼 지혜롭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아는 사실이오. 그러니 어서 그 방법이 무엇인지 속 시원히 말해 주시오.”

임예린이 잠시 청풍도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법은 있습니다만 아마 도장께서 가장 먼저 반대하지 않을까 합니다.”

“방법이 있는데 내가 반대를 하다니,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남궁진악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내가 제일 먼저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소이다.”

청풍도장이 소리높여 호언장담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서로 쳐다보며 큰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정도련주를 다시 뽑으면 됩니다.”

임예린의 목소리가 퍼지는 순간, 좌중의 웅성거림이 뚝 끊겼다.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인 방에서 한순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청풍도장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운양자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임 소저, 그게 무슨 소리요? 련주를 다시 뽑자니? 우리는 오늘 기 련주의 즉위식을 거행했소이다.”

“기 대협을 련주로 뽑은 것도 사실 남궁진악과의 수장 비무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그 사실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임예린이 찬찬히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렇소이다. 그래서 기 련주를 뽑은 것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다면 여기 무당파의 허각 도장이나 소림사의 공각 대사, 아니면 곤륜파의 운양 진인 같은 무림의 선배를 정도련주로 삼았겠지요. 외람된 말이나 강호에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이처럼 많이 있으나 그 누가 기 련주의 신공을 능가한단 말이오? 지금까지 우리 모두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지 않았소이까?”

청풍도장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저기서 ‘그렇지’ 하며 청풍도장에게 동조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임예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수정같이 맑은 눈빛으로 청풍도장을 바라보았다.

“기 대협의 내공은 중양신공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그 외에는 사실 모두 남궁진악의 무공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남궁진악에게서 무공을 배웠으니까요. 남궁진악은 기 대협의 무공을 모두 훤히 꿰뚫고 있을 테니 어떻게 보면 다른 누구보다 기 대협이야말로 손쉬운 상대일 수 있습니다.”

임예린이 정곡을 찔렀기에 누구도 임예린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중에는 기 대협과 같이 중양신공을 익힌 분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분은 강호의 최고봉이라는 무림쌍절과도 관련이 있는 분입니다. 화산파의 독고양 태상장로의 비전을 이어받아서 검법의 최고 경지라는 심검(心劍)을 터득했고, 달마대사 이후 소림 무공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소림신승에게 내공을 전해 받았습니다. 곤륜파 최고 검객의 어검술을 익혔으며, 그뿐만 아니라 신교 사대검왕의 무공에 통달하기도 합니다. 이러니, 어떻게 보면 기 대협보다 남궁진악과의 수장 비무에 더욱 적합한 분이지요.”

임예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석추명이 벌떡 일어섰다.

“예린아, 그게 무슨 소리냐? 하진이가 독에 당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지경인데 지금 나보고 하진이의 자리를 차지하라는 것이냐?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석추명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임예린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으나 지금은 목소리에 상당한 노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무림의 평화라는 대의를 생각하셔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임예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진 오라버니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미안하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 중차대한 일을 하겠어요? 우리에게는 지금 강호의 절대 악이나 마찬가지인 남궁진악과 맞서 싸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정도련주라는 직책은 그 일에 필요한 형식에 불과해요.”

“남궁진악과 싸우라면 싸우겠다. 하지만 정도련주가 되라고 하면 나는 그럴 수 없다. 아우가 생사를 오락가락하는데 아우의 자리를 탐하는 파렴치한 놈이 될 수는 없어.”

석추명이 머리를 흔들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임예린이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정도련주의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남궁진악과 싸울 수가 없어요. 하진 오라버니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남궁진악과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석추명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임예린이 하는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남궁진악은 반드시 없애야 할 절대악. 그 악을 제거하는 일에 석추명은 그 누구보다 앞장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아우의 자리를, 전 무림의 영수격인 아우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니.

석추명은 기하진이 정도련주에 즉위할 때 진심으로 기뻤다. 자신이 아우의 아랫사람이 되었으나 전혀 괘념치 않고 최선을 다해 기하진을 보필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유야 어떻든 이제 자신이 아우의 자리를 뺏어야 한다.

나중에 하진이가 깨어나면 얼굴을 어떻게 볼까? 전 무림의 수장 자리에 즉위한 첫날,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진이는 어떤 생각이 들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진이가 쓰러지자마자 그 자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석추명 자신이 차지한 것을 알면 하진이가 뭐라고 할까?

마음속에 번뇌의 물결이 휘몰아쳤지만 그것은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석추명이 입을 다물자 주위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모든 사람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는 찬성합니다.”

돌연 무거운 적막을 깨고 일봉이 입을 열었다.

“임 소저의 말에 우리 아미파는 동의합니다. 남궁진악과 할 수장 비무에 석 대협보다 적임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봉의 말에 청풍도장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우리 화산파도 동의합니다.”

화산파의 장문인 격으로 참여한 열화의 목소리였다.

“석 대협은 우리 화산파 태상장로이신 독고양 태사숙님의 심법을 이어받았으므로 사실 화산파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도련주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청풍도장께서 만약 석 대협의 출신이 걱정되신다면 이제 그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지요?”

“아미타불. 소승도 석 대협이 적임자라고 봅니다.”

열화의 뒤를 이어 또 한 사람이 찬성했다. 소림사의 공각대사였다.

“이 일은 사양해서 될 일이 아니니 석 대협은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불제자로서 살생을 입에 담으면 안 되나, 남궁진악을 없애는 것만이 더 큰 살생을 막을 수 있는 길이외다.”

“그렇소이다. 빈도도 공각대사와 같은 뜻이오. 우리 곤륜은 기꺼이 석 대협을 련주로 받들겠소이다.”

곤륜파 장문인, 운양자도 임예린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우리 개방도 동의하오이다. 석 대협은 덕과 실력을 모두 갖춘 인재요. 천검총에서 본 석 대협의 무공은 명불허전이었소. 정도련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아미, 화산, 소림, 곤륜에 이어 개방의 송 방주마저 찬성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찬성의 뜻을 밝히기 시작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종남파마저 결국 동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개방의 송 방주가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즉위식까지 바로 끝내버립시다. 마침 모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소이까?”

그러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좋다고 소리쳤다. 그 모습에 석추명은 속으로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하여 그날, 강호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같은 날 두 명의 정도련주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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