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85화 (185/201)

#   185 - 광세일소_한추영 - 169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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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4화 정도련주 (1)

정도련주 즉위식 전날 저녁.

팽가장의 대청에서는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연회가 열렸다. 문 앞에는 홍등이 걸리고 탁자마다 술과 음식이 진열되었다.

팽가장의 장주 팽연이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

“내일 우리 정도(正道) 무림이 드디어 정도련(正道聯)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소이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한 가지 더 큰 경사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탁자에 앉은 무림 명숙들은 또 다른 경사라는 말에 팽연의 입을 주목했다.

팽연이 두 손으로 술잔을 붙잡은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제가 본의 아니게 이번 행사가 열리는 장원의 장주라는 직함으로 정도 무림의 총관 역할을 좀 하겠습니다.”

“팽 장주는 속 시원하게 얘기해 보시오. 그래, 또 다른 경사란 무엇이란 말이오?”

성격이 급한 종남파 청풍 도장이 팽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되물었다. 그러자 청풍 도장의 사형, 청송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청풍 도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발 체통을 좀 지키라는 것 같았다.

“하하하,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미파의 신임 장문인이 즉위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한잔 술로 신임 장문의 즉위를 축하합시다.”

팽연이 말을 끝내고 손에 든 술잔을 쭉 들이켰다. 사람들은 그 말에 놀라서 아미파 제자들이 앉은 탁자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계법사태가 일어서서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저희 아미파는 전임 장문인이셨던 요혜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장문인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앞일을 내다보시고 후임 장문인을 미리 키워놓고 가셨습니다. 원래는 아미산으로 돌아가서 신임 장문인의 즉위식을 하려고 했습니다만 신임 장문인께서 워낙 소탈하신지라 오늘 아미파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즉위식을 간략하게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의 장문인들이 뜻을 모아 정도련주를 추대하는 만큼, 본파도 장문인의 이름으로 여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여러 무림 동도들께 알려드립니다.”

“그래서 신임 장문인이 도대체 누구란 말씀이시오?”

계법사태의 말이 끝나자 점창파의 태사숙인 마룡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형의 눈치를 보며 입을 벌리려던 청풍 도장은 마침 마룡자가 자신의 속마음을 대신 표현하자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법사태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미파 제18대 일봉 장문인을 소개해 드립니다.”

계법사태의 말에 일봉이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불초 소생이 아미파 장문인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여러 무림 동도들의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일봉의 인사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제일 먼저 일어나서 축하 인사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개방의 송 방주였다.

“그동안 우리 개방은 아미파와 다소 불편한 관계였지만 이번에 일봉 대협께 큰 은혜를 입으면서 과거의 일은 모두 잊었소이다. 앞으로 우리 개방은 아미파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양 문파 간에 돈독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를 희망하는 바이오.”

“감사합니다. 송 방주님의 뜻이 저의 뜻과 같습니다.”

일봉이 감사를 표하자 송 방주가 껄껄 웃으며 일봉에게 축하주를 권했다.

“좋소이다. 정말 좋소이다.”

일봉이 연거푸 석 잔을 마시자 송 방주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매번 일봉 대협의 신공에 놀랐는데 알고 보니 요혜신니께서 미리 안배해 놓으신 것이군요. 선사(先師)의 뜻이 참으로 깊소이다.”

송 방주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공동파의 현암자가 축하주를 권했다.

“강호가 와호장룡(臥虎藏龍)이라더니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협객들의 무공에 이 늙은이가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봉 장문인의 아미복마검은 청출어람의 경지라고 생각하오. 다시 한번 축하드리오.”

현암자를 뒤이어 나머지 문파들도 차례대로 일어나 일봉의 장문인 즉위를 축하했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있는 무림의 경사에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일봉은 자신이 아미파의 장문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연회가 끝난 뒤에도 혼자 후원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일봉이 뒤를 돌아보니 석추명이 술병과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

“아까 축하를 드려야 했지만, 왠지 이렇게 따로 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렸습니다.”

석추명이 술잔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이런 자리를 맡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형님이 아니면 누가 맡는단 말입니까?”

“아미파의 막내 제자만 되어도 감지덕지했을 텐데 이렇게 장문인이 되고 나니 걱정만 앞섭니다. 연륜과 식견이 부족한 내가 문파에 누가 되지나 않을지....”

“남무궁이나 남궁진악이 연륜과 식견이 부족해서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것보다 사심 없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장문인의 자질 같습니다. 요혜신니도 형님의 그런 점을 보지 않았을까요?”

석추명은 일봉에게 준 잔을 건네받아 자신도 마셨다.

“아 참, 아까부터 형님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나 봅니다. 그럼 이 아우는 이만 물러갑니다.”

석추명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사라졌다. 석추명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자 후원의 나무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봉이 누군가 싶어서 나무 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 아가씨....”

나무 뒤에 나타난 사람은 임예린이었다. 임예린은 일봉의 앞까지 걸어오더니 일봉에게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임예린의 행동에 당황한 일봉이 임예린을 붙잡았다.

“그동안 저를 지켜주고 돌봐주어서 너무 고마워요. 일봉이 아니었다면 나는 죽어도 여러 번 죽었을 겁니다.”

임예린이 촉촉하게 물기 어린 눈빛으로 일봉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임예린의 눈빛을 바라보자 일봉은 갑자기 가슴 한쪽이 시큰하게 아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대문파(大門派)의 존귀한 장문인이 되셨으니 제가 예의를 갖추어야죠. 죽을 때까지 일봉이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제 욕심인 것 같아요. 이제 일봉은 무림을 위해 더 큰 일을 해야 하니까요.”

임예린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문득 천산산맥에서 자신을 구하려다가 정신을 잃은 일봉을 말에 태우고 미친 듯이 달아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일봉이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이제 앞으로는 자신의 옆에 일봉이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외로움이 물밀 듯 몰려들었다.

임예린이 가만히 미소를 띠며 일봉에게 술을 권했다.

“저도 장문인께 축하주 한잔 올리겠어요.”

일봉은 임예린이 주는 술을 받아 마셨다.

“혼자서 모든 책임을 다 지려 하지 말고 가끔 자신에게도 관대해지세요. 이게 제가 장문인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임예린이 일봉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일봉은 묵묵히 임예린을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미풍이 살랑 불었다.

****

정도련주 기하진의 즉위식은 일봉의 장문인 즉위식과는 비할 바 없이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즉위식이 거행되는 연단 주위에는 오색기가 나부끼고 북과 징, 생황 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구대문파와 사대세가의 장문인들이 직접 축하 인사를 건네고 축하선물을 했다.

정도련의 구성은 무림맹과 비슷했다. 다만 정도련주 아래에 구대문파와 사대세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평의회를 두고 그 평의회에서 주요 안건을 조율하되 최종결정은 련주가 내리기로 했다. 련의 군사는 임예린이 계속 맡기로 했다.

련의 총단은 일단 팽가장으로 하되 남궁진악을 몰아내고 나면 항주 무림맹 총단을 련의 총단으로 쓰기로 했다. 당장 정도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연히 남궁진악의 무리를 완전히 소탕하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기하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련주 즉위를 축하받고 있을 때였다.

“장주님, 누군가 대문 앞에 서찰을 두고 갔습니다.”

팽가장의 총관이 허겁지겁 장주 팽연에게 아뢰었다.

“누가 보낸 서찰이냐?”

“그, 그것이....”

총관이 말을 잇지 못하자 수상하게 여긴 팽연이 얼른 서찰을 받아 들었다. 서찰의 겉봉에는 정도련주 친전이라고 쓰여 있었고 발신자는 무림맹주 남궁진악이었다.

“남궁진악!”

팽연이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팽연을 바라보았다.

팽연이 기하진에게 서찰을 전달했다.

“련주, 남궁진악이 련주 앞으로 서찰을 보내어왔소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이까?”

기하진이 담담히 서찰을 받았다.

“저한테 보낸 것인데 제가 안 받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이놈이 또 무슨 꿍꿍이인지.”

“그거야 서찰을 열어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기하진이 봉투를 열려 하자 임예린이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기하진을 만류했다.

“남궁진악이 하필이면 오늘 이 서찰을 보낸 것이 수상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아쉬울 게 없으니 그냥 태워버리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자 기하진이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뭐가 두려워 그렇게 한단 말이냐? 어차피 수장비무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아마 그것 때문에 보냈을 테지.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기하진이 밀봉된 봉투를 뜯어 안에서 누런 황지를 꺼냈다.

편지를 보는 기하진의 눈초리가 심상찮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청풍 도장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소이까?”

기하진은 청풍 도장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기하진이 말을 하지 않자 청풍 도장은 궁금했으나 더는 묻지 못하고 기하진의 안색만 살필 뿐이었다.

“흠, 이상하군요. 별말 없습니다. 다만, ‘수장 비무대회에 반드시 정도련주가 나오길 바란다. 정도련주가 나오지 않으면 기권으로 알겠다’라고만 간략하게 쓰여 있군요.”

기하진의 말에 청풍 도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궁진악 그 늙은이가 드디어 실성을 했나? 수장 비무란 것이 당연히 맹주와 련주 두 수장이 하는 것이거늘, 어째서 서찰까지 보내며 뻔한 소리를 했을꼬? 그 서찰이 맹주가 보낸 것은 맞소이까?”

청풍 도장의 물음에 기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장을 보면 분명히 무림맹에서 맹주가 사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남궁진악이 특별할 것도 없는 서찰을 보낸 의도를 몰라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임예린은 아까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예린아, 왜 그러느냐?”

석추명이 임예린에게 물었다.

“제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요. 남궁진악이 저 서찰을 그냥 보냈을 리가 없는데.”

“그자야 워낙 꿍꿍이속을 알 수 없으니.... 기 련주 말마따나 별일이야 있겠느냐? 그나저나 혹시 사소혜를 보지 못했느냐? 뭘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사소혜를 찾는 석추명의 말에 임예린이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요. 독. 독이 분명해요!”

중얼거리던 임예린이 기하진을 돌아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즉시 그 서찰을 버리세요.”

“왜 그러느냐?”

“독이에요. 독이 분명해요. 얼른 그 서찰을 버리세요.”

독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독은 무슨...!”

임예린의 걱정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려는 순간, 기하진은 손끝이 떨리며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신의 손을 바라보니 서찰을 잡은 손끝이 이미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련, 련주님, 손, 손가락이...!”

사람들도 그제야 기하진의 손끝이 이상한 것을 알아보았다.

기하진은 놀란 나머지 서찰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렸으나 이미 자신의 손은 먹물에 담그기라도 한 듯 검게 변한 뒤였다. 검은 기운은 손에만 머물지 않고 팔을 타고 올라오더니 순식간에 목과 얼굴, 몸통과 다리까지 퍼져나갔다.

“하진아!”

그 모습에 놀란 석추명이 기하진이 련주로 즉위한 것도 잊고 소리쳤다.

쿵!

갑자기 기하진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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