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 광세일소_한추영 - 1689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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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3화 천검총 (4)
석실이 무너지면서 떨어지는 돌덩이가 비산(飛散)하는 검을 방해했다. 남궁진악을 향해 날아가던 검이 돌덩이에 맞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모처럼 잡은 좋은 기회를 포기할 수 없어서 석추명은 머리 위에서 돌덩이가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했다.
쏟아지는 돌덩이를 뚫고 수십 자루의 검이 남궁진악을 향해 날아갔다.
“흥! 이따위 검 몇 자루로 누구를 잡으려는 것이냐?”
남궁진악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을 향해 장풍을 발출했다. 남궁진악의 손바닥에서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수십 자루의 검을 모조리 바닥으로 떨구었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돌덩이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석 소협, 일단 피해야 합니다. 더 있다가는 우리 모두 돌덩이 속에 파묻히고 말 것이오.”
송 방주가 떨어지는 돌덩이를 피하며 석추명에게 소리쳤다. 석추명은 남궁진악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고 싶었으나 송 방주의 말마따나 더 있다가는 남궁진악보다 자신들이 먼저 죽을 판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임예린이 걱정되어 정신을 집중하지도 못했다.
석추명이 공력을 쏘아 보내던 손을 내리자 허공에 떠 있던 검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린아”
석추명은 임예린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갑자기 위에서 커다란 돌덩이가 떨어지는 바람에 급히 몸을 피해야 했다.
“아가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일봉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석추명이 대답하며 임예린에게 눈길을 돌렸다. 설랑이 자신의 몸으로 임예린을 감싸듯 덮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로부터 임예린을 보호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랑은 분명 적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진심으로 임예린을 보호하고 있었다.
“빨리 나가야 하오.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요.”
송 방주가 떨어지는 돌덩이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석실을 탈출하는 길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덩이를 뚫고 50여 장도 넘는 거리를 가야 한다. 공포스럽던 은잠사가 걷히기는 했으나 석실이 무너져내리면서 석실 통로의 천장에 박혀 있던 검들도 우수수 떨어지고 있어 통로를 지나가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예린이를 데려오마.”
석추명이 임예린 쪽으로 몸을 돌리자 어디선가 수십 자루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모양이 아니라 누군가가 날려 보낸 것이 분명했다.
석추명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장방형의 기관실에서 아래를 내려보고 있는 남궁진악의 손길에 따라 검 수십 자루가 허공을 날아오르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남궁진악도 어검술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남궁진악의 막강한 공력이 바탕이 되어서인지 검이 날아오는 기세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임예린에게 다가가려던 석추명은 별수 없이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려 검을 피해야 했다.
“어검술은 네놈만 할 줄 안다고 생각했겠지. 건방진 놈. 오냐, 내 반드시 네놈들이 보는 앞에서 임예린을 죽여서 네놈들이 피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
남궁진악이 설랑과 임예린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떨어진 검 수십 자루가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무서운 기세로 두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안돼!”
석추명은 남궁진악의 검을 막으려고 서둘러 팔을 뻗으며 어검술을 펼쳤다. 하지만 자신이 날려 보낸 검은 아직 반도 가지 못했는데 남궁진악이 쏘아 보낸 검은 이미 설랑과 임예린의 면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예린아!”
석추명의 절규가 석실 안을 울렸다.
“으하하하.”
그와 동시에 남궁진악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원형 석실 안은 돌이 떨어지는 소리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 고통에 찬 절규와 웃음소리 등이 어우러져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던 남궁진악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저 쳐죽일 놈이!”
놀랍게도 설랑이 임예린을 감싸 안으면서 남궁진악이 날려 보낸 검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냈다. 떨어지는 돌덩이를 맞은 데다 등 뒤에 수십 자루의 검이 박히자 설랑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렸다.
“뭐해요? 빨리 예린이를 데리고 와요?”
기하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석추명이 천룡보를 눈부시게 펼쳤다. 석추명의 모습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다 싶더니 어느새 임예린을 두 손으로 안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남궁진악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저 쓸모없는 놈!”
분을 이기지 못한 남궁진악이 임예린을 향해 다시 검을 날려 보내자 설랑이 또 온몸을 던져 검을 막았다.
쿵!
설랑의 거대한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랑의 등과 다리, 팔 뒤에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통 검이 꽂혀 있었다. 검이 꽂힌 자리마다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임예린은 석추명에게 안긴 채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보호하려다 대신 검을 맞고 쓰러진 설랑이 눈에 들어왔다. 설랑은 바닥에 쓰러져서도 끝까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랑의 붉은 눈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조심해. 석상이 무너진다.”
석추명이 소리를 질렀다. 석실 통로 양측에 늘어서 있던 거대한 석상들이 쿠르릉, 쿵쿵, 소리를 내며 하나씩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 충격에 통로 천장에 박혀 있던 검도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과 송 방주, 그리고 개방 제자들은 서로 소리치며 떨어져 내리는 돌과 검을 피해 석실 통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남궁진악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임예린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설랑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천장에서 커다란 돌덩이 10여 개가 설랑 위로 떨어졌다. 돌덩이 속에 완전히 파묻힌 설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임예린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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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 무림의 수장인 팽가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장원 내 수백 명이 모일 만한 넓은 마당에 단상이 설치되고 그 위에는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붉은 비단이 깔렸다. 네모난 마당은 단상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무림 명숙들을 모실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 위로 이제는 제법 따가운 봄 햇살을 가릴 차양을 펼쳤다.
“곤륜파 장문인 운양(雲陽) 진인 드십니다.”
대문 쪽에서 총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그 소리와 함께 구름 같은 눈썹과 수염을 드리운 노도인이 좌우로 여섯 명씩 총 12명의 제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잘 오셨습니다. 운양 진인.”
팽가장의 장주 팽연이 둘째 아들 팽숙과 셋째 아들 팽길을 거느리고 대문 앞에서 운양자를 맞이했다.
“그동안 노고가 많으셨다고 들었소이다, 팽 장주. 그래도 이렇게 무탈하신 모습을 보니 참으로 다행이외다.”
운양자가 팽연에게 포권을 취하자 팽연이 급히 포권으로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이게 모두 기 대협과 여기 계신 은공들 덕분입니다.”
팽연이 기하진과 석추명, 일봉을 운양자에게 소개했다.
“오오, 중양신공으로 펼치는 천룡파천장은 당할 자가 없다는 천룡대협(天龍大俠)이시구려. 반갑소이다.”
운양자가 기하진에게 깍듯하게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기하진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기하진은 약관을 겨우 넘긴 나이였지만 혁혁한 무공으로 전 강호에 이미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도 기하진이 정식으로 정도련주로 취임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무림맹이 힘을 잃고 맹주 남궁진악이 천하 무림의 공적이 되어버린 지금, 정도련은 무림맹을 대체하는 유일한 단체였다. 그러니 정도련주라면 과거 무림맹주와 대등한 지위를 가지는 존귀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기하진이 취임하는 것이다.
운양자가 도착하고 나서 종남파 장문인 청송자(靑松子)가 사제 청풍 도장과 제자 열 명을 거느리고 당도했다. 청풍 도장은 기하진, 석추명 등과 함께 다니며 온갖 고초를 모두 겪은 터라 특히 감회가 남달랐다.
“기 소협, 아주 신수가 훤해지셨소이다. 하하하.”
“못 뵌 지 며칠 되지도 않은 데 벌써 몇 년이 지난 듯합니다.”
기하진도 미소를 지으며 청풍 도장을 맞이했다.
“어허, 이 사람. 련주가 되실 분께 소협이 뭔가, 소협이.”
청풍 도장의 사형인 청송자가 청풍 도장을 나무라자 청풍 도장이 멋쩍은 듯이 웃더니 다시 포권을 취했다.
“이거 아직 입에 붙지를 않아서. 허허허. 기 대협.”
그러자 기하진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저희 사이에 무슨 격식을 따지십니까? 그냥 편하게 부르십시오. 도장님.”
“허허허,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기하진과 청풍 도장이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기하진의 바로 옆에 석추명이 서 있었으나 청풍 도장은 석추명에게는 가볍게 포권만 취했을 뿐 따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석추명은 마교 출신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은연중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석추명도 아무런 말 없이 가볍게 포권을 취할 뿐이었다.
종남파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기하진과 인사하는 통에 자연스럽게 소외된 석추명은 몇 걸음 물러나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불쑥 석추명에게 말을 걸었다.
“대사형, 오래간만입니다.”
대사형이라니. 자기가 누구 대사형이란 말인가? 석추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석추명의 눈앞에 화산십수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두 사람 중의 한 명인 열화가 어린 사제 둘을 데리고 나타났다.
“열화 소협!”
석추명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열화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석추명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열화가 석추명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대사형께서 화산에 언제 오시나 하고 학수고대하고 있다가 도무지 오실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번 정도련주 취임식을 핑계 삼아 그냥 제가 왔습니다. 대사형께서 저를 못 알아보시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을 했었나 봅니다.”
열화가 웃었다. 열화는 짙은 눈썹과 백설같이 흰 피부의 미남자라 웃으니 주위가 환해졌다. 다른 문파의 여제자들이 얼굴을 붉힌 채 열화를 곁눈질했지만 정작 열화는 자신이 그렇게 인기 있는 외모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보다 대사형이라니, 이것 참 민망합니다.”
사실 석추명과 열화는 비슷한 또래였다. 그런데 화산파 적전제자인 열화가 자신에게 깍듯이 대사형이라고 부르니 석추명은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산신검이 되셨으니 당연히 저희 화산파 제자들의 대사형이시지요. 지금은 제가 장문인 대행을 맡고 있으나 대사형께서 얼른 화산으로 돌아오셔서 저희 화산파를 이끌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꾸밈없는 열화의 말에 석추명은 집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더 이상 대사형이라는 호칭을 어려워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자꾸 불편해하시면 우리 화산파 제자들은 어떡합니까?”
“하하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열화 소협을 사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석추명의 말에 열화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되면 호칭이 좀 꼬이겠는데요?”
“좀 꼬이면 어떻습니까?”
“까짓거 그렇게 하지요.”
열화가 미소를 짓더니 같이 온 사제들을 소개했다.
“그때 대사형 덕분에 살아남은 이화결과 백무진입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인사들 올려라.”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두 제자가 흠모의 눈빛으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대사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녀석들, 화산신검을 실제로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금린도 같이 왔는데 이 녀석, 대사형보다 제 색시가 더 보고 싶었나 봅니다.”
“색시라니요?”
금린이 색시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석추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열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오늘 대사형을 여러 번 놀라게 해드리는군요. 금린 이 녀석이 글쎄 제일 막내인 주제에, 혼기가 꽉 찬 사형들을 모두 앞지르고 먼저 어른이 되게 생겼습니다.”
“상대가 누굽니까?”
“대사형께서 잘 아는 분입니다. 사 소저라고....”
“설마, 사소혜?”
석추명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그동안 두 사람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기는 했으나 그새 서로 혼인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단 말인가?
금린도 양반은 못 되는지 때마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사형, 오랜만입니다.”
석추명이 고개를 돌리자 금린과 사소혜가 눈에 들어왔다.
“대주님....”
천하의 사소혜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하하, 정말 잘 되었구나.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경사가 겹치는구나.”
석추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뒤에서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제 놈들이 즐겁다고 문파의 어른은 눈에도 안 뵈나 보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림팔선 가운데 한 명인 매곡자였다. 열화는 아주 어릴 때 잠깐 매곡자를 보기는 했으나 세월이 워낙 많이 흘러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도장께서는 누구신데 화산파의 어른이라 하십니까?”
열화가 매곡자를 알아보지 못하자 석추명이 웃으며 매곡자를 소개했다.
“이분은 비천검 독고양 선배님의 사제이신 매곡(梅谷) 도장이십니다. 매곡 도장께서 무림맹의 회각동에 들어가신 지 20년이 넘었으니 열화 사형께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석추명의 소개에 매곡자가 열화를 쳐다보았다.
“거양 사질이 거둔 열 명 가운데 유독 외모가 여아처럼 곱상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애가 바로 자네인가 보군.”
열화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매곡자를 바라보았다. 화산파는 백련신교와 무림맹의 합공으로 문파의 원로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비천검 태상장로의 사제가 살아서 돌아오다니. 유심히 보다 보니 어릴 때 잠깐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열화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매곡 태사숙이시군요. 이제 기억이 납니다. 태사숙께서 살아계시다니 정말 하늘이 우리 화산파를 버리지 않으셨나 봅니다.”
매곡자도 그간 화산파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석추명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지라 울음을 참지 못하는 열화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허허허, 사내놈이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떡할꼬?”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매곡자의 눈에도 촉촉하게 습기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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