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 광세일소_한추영 - 168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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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2화 천검총 (3)
“이 미친 늙은이. 그게 무슨 소리냐?”
석추명이 남궁진악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장 그만두라고 해. 당장!”
석추명이 철창을 흔들며 고함쳤다. 마음이 급해진 사람은 석추명 혼자가 아니었다.
“설랑. 그만둬!”
일봉이 설랑을 향해 목이 터지라고 고함을 지르다가 보문검을 빼 들고 철창을 베었다.
찌지징.
검이 쇠창살에 부딪히자 퍼런 불꽃이 일었다.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들려왔으나 쇠창살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으하하하,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렇게 더 발광을 해봐.”
남궁진악이 청동방울을 울리면서 즐거워했다.
기하진은 쇠창살을 붙잡고 온몸의 공력을 쏟아부었다. 중양신공 10성 공력을 쏟아부으면 웬만한 쇠창살은 다 휘어지겠지만 이 철창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하진은 철창을 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남궁진악을 노려보았다. 기하진의 두 눈에서 범처럼 시퍼런 안광이 번쩍였다.
“임예린의 목을 뽑으면 내 손에 있는 네놈 아우 여섯 명의 목을 뽑고, 네놈의 조카들 가운데 사내놈 17명은 모두 목을 베어 남궁세가의 씨를 말려주마. 어디 한번 해봐.”
“이런 지독한 놈!”
기하진의 말에 남궁진악이 불같이 진노하며 벌떡 일어섰다.
“놀라지 마. 이게 모두 당신에게서 배운 것이니. 당신이 내 성격을 안다면 내가 충분히 그러고 남을 위인이라는 것도 알겠지. 만약 모른다면 아직 제자 성격도 파악하지 못한 덜떨어진 사부라고 스스로 밝히는 셈이고.”
남궁진악과 기하진이 서로 쏘아보며 잠시 대치했다.
“흐흐흐, 비록 길은 다르지만 네 녀석,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수장(首長)이 될 자는 네놈같이 지독한 면이 있어야 하지. 그것은 고금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지 않으냐? 멀리 갈 것도 없이 당금 황상을 봐. 부친의 유언을 어기며 친조카를 죽이고 황위를 차지했지.”
기하진을 노려보던 남궁진악이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말이야.... 독한 척하는 놈과 실제로 독한 놈은 다르지. 네 녀석이 어느 쪽인지 어디 한번 볼까?”
남궁진악이 다시 청동방울을 흔들었다.
“뭘 꾸물거리는 게야? 얼른 임예린의 목을 뽑아서 냉큼 내 앞으로 가져와. 임예린이 죽고 나서도 저놈이 저리 차분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으하하하.”
“남궁진악!”
석추명이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쇠창살을 흔들었다.
천검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설랑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절망에 빠진 석추명과 일봉, 서릿발 같은 분노로 전신을 휘감은 기하진, 경악한 송 방주와 개방 제자들, 그리고 이 상황을 즐기는 남궁진악과 숨을 죽이고 있는 귀령자와 사마경까지.
하지만 설랑은 쉬이 임예린의 목을 뽑아 올리지 않았다. 소림무승들을 단번에 찢어발겼던 설랑의 악력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기다리던 남궁진악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뭘 하는 게야? 어서 그년의 목을 뽑아 죽여. 어서!”
남궁진악이 신경질적으로 청동방울을 흔들며 설랑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설랑은 임예린의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풀더니 오히려 임예린을 묶은 동아줄을 잡아 끊는 것이 아닌가. 거친 숨을 내뱉는 모습으로 보아 청동방울 소리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듯했다.
“저 녀석이!”
남궁진악이 설랑을 노려보았다.
설랑이 남궁진악의 명령을 듣지 않자 기하진이 냉소를 지었다.
“설랑 저놈이 아주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닌가 보군. 네놈 명을 거부할 줄도 알고.”
“저 강시 놈이 감히 내 말을 거역하다니.”
기하진의 비웃음에 모멸감을 느낀 남궁진악이 아랫입술을 씹으며 옆에 선 귀령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찌 된 일이냐? 저 활강시 놈이 왜 말을 안 듣는 것이야?”
남궁진악이 화가 나서 다그치자 귀령자가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 그것이, 저도 연, 연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남궁진악이 벽면을 손으로 ‘쾅’ 소리 나게 때렸다. 대번에 벽면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모르다니, 지금 내 앞에서 감히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이야? 네놈이 모르면 누가 알아?”
남궁진악이 귀령자를 노려보았다. 적의 앞에서 설랑이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자 남궁진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듯 얼굴이 시뻘겠다.
“활, 활강시 중에서 유독 의지가 강한 놈들에게 간, 간혹 이런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귀령자는 남궁진악이 쏟아내는 살기에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쓰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강시란 놈이 자기 의지가 있으면 그게 무슨 강시란 말이냐? 이 머저리 같은 놈. 당장 저놈이 내 말을 듣도록 조처를 해라.”
“지,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습니다.”
“뭐라, 방법이 없어?”
남궁진악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싶더니 귀령자를 향해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귀령자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벽면에 곧장 날아가 처박히더니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귀령자가 얼른 일어나지 않으면 남궁진악의 노여움만 더 살 것 같아서 사마경이 얼른 귀령자에게 다가갔다.
“사형, 일어나세요. 사형.”
사마경은 귀령자를 일으키려다가 귀령자의 몸이 축 처지자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귀령자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남궁진악의 일장에 맞은 가슴은 뼈가 함몰되어 움푹 꺼져 있었고 눈, 코, 입, 귀 등 칠공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죽은 귀령자를 바라보는 사마경은 착잡한 심경이 들었다. 남무궁이 죽자 은거하려던 귀령자를 설득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때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면 귀령자는 지금쯤 살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마경은 귀령자의 음양지술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음양지술에 매진하는 정성만큼은 탄복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려는 잘못된 방향 때문에 결국 사문에서 쫓겨나기는 했으나 음양지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도 따르기 힘들 정도였다.
무엇을 연구하다 보면 종종 실패를 겪고 좌절하게 된다.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올바른 방향을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수밖에 없다. 활강시를 이만큼이라도 만들어낸 귀령자의 노고가 대단한데 남궁진악은 정작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남궁진악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 당장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는 결과뿐이었다.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뭐할까.”
귀령자가 죽은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사마경에게 남궁진악이 내뱉었다.
쓸모없다니, 누가 쓸모없단 말인가? 몇십 년을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연구자의 노고를 제깟 놈이 알기나 할까. 사마경은 이제야 비로소 무공이 아니라 진법을 배운 것을 후회했다. 진법을 익히는데 들인 정성으로 무공을 익혔다면 지금쯤 남궁진악을 능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남궁진악에게 머리를 숙이며 이렇게 비굴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목숨을 잃고 쓰러진 귀령자의 모습이 꼭 자신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신도 이렇게 될 운명이리라.
사마경은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더니 일어나 벽면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벽면에 있는 기관장치를 작동시켰다.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석추명과 기하진 등을 감금했던 철창이 다시 허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사마경이 갑자기 석추명 일행을 풀어주자 남궁진악이 사마경에게 두 눈을 치떴다.
“어차피 죽을 목숨. 한 번이라도 비굴하지 않게 살다가 죽으렵니다.”
“이놈이 실성했나?”
남궁진악이 사마경에게 다가왔다.
“맹주, 당신이야말로 무림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마요. 당신을 섬기려고 스승님의 무덤까지 바쳤건만 당신은 나를 전혀 대우해주지 않았소. 수시로 나를 모욕하고 협박했지. 당신에게서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제갈량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비를 꿈꾸었던 내가 어리석었지. 이럴 줄 알았다면 당신에게 천검진을 발동하는 마지막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것인데. 그랬다면 당신도 이 검진에 같이 묻어버릴 수 있었을 것을. 정말 나 자신이 원망스럽소.”
“크흐흐흐, 나를 검진에 같이 묻어버리고 싶다? 그거 괜찮은 방법이로군. 군사 자네를 그렇게 해주지. 그동안 나를 섬겨온 정이 있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겠군.”
남궁진악이 비열한 웃음을 짓더니 돌연 사마경을 차서 석실 중앙으로 떨어뜨렸다. 맹주가 있는 기관실은 바닥에서 4, 5장 정도 떨어진 곳이라 사마경이 경공을 전혀 못 하지는 않았으나 대번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윽”
맹주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마경을 바라보며 낄낄 웃었다.
“너희들을 한꺼번에 보내어 주마. 저승 갈 때 동무가 많아서 심심하지 않겠구나.”
남궁진악이 천검진을 발동하는 기관장치에 손을 댔다. 그 모습을 본 사마경이 소리를 질렀다.
“안돼!”
덜컹.
기관장치가 움직이자 석실 천장에 거꾸로 꽂혀 있던 수백 개의 검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떨어질수록 가속도가 붙은 검은 시위를 떠난 화살 같았다.
쐐애액.
좁은 석실 안에서 검이 쏟아지자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석추명, 기하진이야 제 몸 하나 정도 건사할 수는 있겠지만 무공을 모르는 임예린은 온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갈 것이 자명했다.
석추명이 갑자기 땅바닥에 좌정하더니 양손을 머리 가까이 대고 공력을 쏟아냈다. 일전에 곤명호 지하 뇌옥에서 탈출할 때 20개도 넘는 검을 어검술로 조종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석추명은 틈날 때마다 어검술로 수십 개의 검을 다스리는 방법을 수련해왔다.
기로 검을 조종하는 어검술은 고도의 정신력과 함께 막대한 공력이 들었다. 그리고 검의 개수가 많아질수록 정교한 운용은 어려웠다. 지금으로써는 50여 개 정도는 조종할 수 있으나 공력이 더욱 높아지고 정신을 더욱 고도로 운용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숫자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언뜻 무모해 보이기는 했으나 수백 개의 검이 천장에서 쏟아지자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법통(一法通)이면 만법통(萬法通)’이라던 소림 신승의 말이 떠오르자 50개를 조종할 수 있다면, 100개, 1,000개도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지잉.
천장에서 쏟아지던 검의 기세가 눈에 띌 만큼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석추명의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더니 머리 위에서 찜통처럼 허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온몸의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린 석추명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현재 석추명의 공력으로서는 수백 개가 넘는 검을 모두 통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떨어져 내리던 검이 실에 매달린 것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임예린의 머리 위에도 불과 몇 치를 두고 수십 개의 검이 날카로운 칼끝을 늘어뜨린 채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이럴 수가!”
송 방주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감탄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70이 넘도록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기이하다는 무공도 많이 보았지만 석추명처럼 한 번에 수백 개가 넘는 검을 조종하는 어검술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놀란 사람은 송 방주뿐만 아니었다. 기하진, 일봉은 물론이고 사마경과 남궁진악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이 나가 있었다.
“으윽.”
석추명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공력을 집중한 두 팔의 힘줄이 툭툭 불거지고 팔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에 잠시 멈추었던 검이 다시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떠 있는 검을 바라보던 기하진이 석추명의 뒤에 좌정하고 앉더니 두 손을 석추명의 등에 갖다 댔다. 기하진의 공력이 합쳐지자 석추명의 두 팔도 안정을 되찾아 떨림이 많이 줄었다.
공중에 뜬 수백 개의 검이 돌연 검 끝을 돌리기 시작했다. 검 끝이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남궁진악.
석추명과 기하진의 머리 위에서 허연 수증기가 솟구쳐 올랐다. 어느덧 기하진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석추명의 뜻을 알아챈 일봉마저 기하진의 뒤에 좌정하며 팔을 뻗어 공력을 전달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공력을 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무공은 무림 팔선 중 한 명인 마룡자에게 기초를 배운 적이 있었다.
당금 강호의 최고 고수 세 사람의 공력이 합쳐지자 허공에 뜬 수백 개의 검이 어느새 남궁진악을 겨냥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에 남궁진악은 매우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석추명이 접었던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가라.”
그러자 수백 자루의 검이 남궁진악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후일, 천검비산(千劍飛散)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석추명의 별호를 화산신검에서 비천신검(飛天神劍)으로 바꾸어준 초식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남궁진악은 수백 자루의 검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즉시 검진을 폐쇄하는 기관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돌덩이가 떨어져 내리며 거대한 원형 석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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