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82화 (182/201)

#   182 - 광세일소_한추영 - 1677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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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화 천검총 (2)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잘못 하면 자신들뿐만 아니라 임예린까지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에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석추명은 자신의 신공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그것은 기하진, 일봉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의 무공이면 천하에 적수가 없으련만 그 뛰어난 무공도 천하제일의 기재, 천문선생이 만든 천검진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세 사람의 귀에 임예린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천문 선생이 만들었다는 이 진법, 정말 아무도 풀지 못하나요?”

임예린의 물음에 남궁진악이 껄껄 웃더니 사마경에게 되물었다.

“군사, 임 소저가 자네 스승에게 도전하고 싶은 모양이야.”

“이 진법은 제 스승님이 음양오행의 원리를 거꾸로 변화하여 만든 데다 제가 다시 일곱 가지 변화를 추가했으니 제갈량이 살아와도 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계집이 어찌 풀겠습니까?”

사마경의 말에서 자부심과 함께 임예린에 대한 불쾌함이 묻어났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어린 계집이 만약 풀면 어쩌시렵니까?”

임예린의 말에 사마경이 맹주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대로하여 소리쳤다.

“네가 정말 이 기관 진식을 풀 수 있다면 내가 너에게 큰절을 올리고 너를 스승으로 모시마.”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됩니다. 옆에 계신 맹주님이 증인이십니다.”

임예린이 난데없이 검진을 풀어보겠다고 나서자 남궁진악은 재미있어했다.

“좋아. 내가 증인이 되지. 임 소저가 이 검진을 풀면 임 소저를 풀어주되 대신 군사가 죽으면 되겠구먼. 으하하.”

남궁진악이야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 아니니 재미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진식을 푸느냐 못 푸느냐에 자신들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석추명과 기하진 등은 임예린의 말소리에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동안도 숱한 난관을 임예린의 지혜로 풀어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지금은 자신들이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임예린은 굳게 닫힌 석문 건너편 쪽에 있어서 자신들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진식을 풀 수 있을까?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추명 오라버니, 그곳의 상황을 저에게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예린의 말에 석추명이 석실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발아래에 있는 색색의 판석, 허공에 쳐진 무형의 은잠사, 그리고 천장 위에 박힌 수백 자루의 검의 모습까지.

이야기를 듣던 임예린이 다시 물었다.

“판석의 색깔은 청, 적, 황, 백, 흑의 오색 외에 또 무엇이 있나요?”

“녹색과 자색이 있구나.”

석추명은 임예린이 다섯 가지 색깔을 보지도 않고 맞추자 놀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음양오행에 따르면 오행은 오방색(五方色)에 해당하지요. 색깔별로 보면 목은 청, 화는 적, 토는 황, 금은 백, 수는 흑색이에요. 오행이 순변(順變)하면 목화토금수로 변하니 색은 청, 적, 황, 백, 흑 순서로 변하겠지만 아까 천문선생이 오행을 역으로 변화시켰다고 군사께서 얘기했으니 상생상극의 이치에 따라 청, 황, 흑, 적, 백의 순서를 따랐을 겁니다.”

임예린이 여기까지 얘기하자 사마경의 안색이 변했다.

“군사께서는 자신이 스승보다 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스승이 설치한 오행 진법에 두 가지를 더해서 칠행(七行) 진법으로 만들었지요. 문제는 자(紫), 록(綠) 두 가지 색이 어떻게 기존 오행과 상생상극을 이루는가 하는 것입니다.”

임예린의 분석이 생각보다 예리하자 사마경은 놀란 눈빛이었다. 사마경은 스승 천문선생을 만난 뒤 세상의 깊이 있는 학문은 오로지 음양오행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오랫동안 연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보았으나 이를 같이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공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음양지술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자신과 말이 통할 만한 사람을 만나자 사마경은 입이 근질거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줄 알았더니 제법이로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기인이사들이 많았지만 모두 오행만 생각했지 칠행(七行)의 상생상극을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지. 나는 지난 30여 년간 고심하여 연구한 끝에 칠행의 상생상극을 알아냈다.”

사마경의 목소리에 엄청난 자부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칠행의 상생상극이라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상생은 순변이라 비교적 쉬우나 상극은 역변이라 금방 알아내기 쉽지 않군요.”

“칠행의 상생을 네가 이해했단 말이냐?”

임예린의 말에 사마경이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이 10여 년 걸려 이해한 것을 이 어린 소저가 한 번 듣고 이해했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호호호, 제가 한번 읊어 볼 테니 들어보시고 틀린 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수생목(水生木)이라 물이 많으면 나무에 녹음이 우거지니, 녹은 수를 뜻하는 흑과 목을 뜻하는 청 사이에 위치하겠지요. 또한 자색은 청이 적으로 변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색이니 청, 자, 적으로 변하는 것이 순변이겠지요. 따라서 일곱 색깔 모두가 순변하면 청, 자, 적, 황, 백, 흑, 녹 순서로 변하는 것 아니겠어요? 어때요? 제 말이 맞나요?”

임예린의 말을 듣던 사마경은 너무 놀라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공자님 말씀에 생이지지(生而知之)라,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임예린이 딱 그런 부류였다.

“정말 놀랍구나. 칠행의 순변을 한 번에 꿰뚫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하지만 이 검진은 칠행의 순변이 아니라 역변을 응용했으니 그것마저 알 수는 없겠지.”

사마경은 임예린이 요행수로 칠행의 순변은 알아맞히었을지는 모르지만 역변의 순서는 어림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칠행의 상극은 오행의 상극과는 다르겠지요. 하지만 오행이 상극하는 순서를 생각하여 그 방법을 칠행에 대입하면 좀 복잡하더라도 순서가 나오긴 하지요. 오행상극은 목극토(木克土), 토극수(土克水), 수극화(水克火), 화극금(火克金), 금극목(金克木)이니 그 순서대로 본다면 판석의 색깔 변화는 청, 적, 백, 녹, 자, 황, 흑 순이 아닌가 싶군요.”

“네, 네가 어떻게 그것을...!”

사마경이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30여 년간 피땀 흘리며 연구한 것을 임예린이 한순간에 깨닫다니 충격을 넘어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군사님의 반응을 보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제가 바로 맞힌 것 같군요.”

뒤이어 임예린이 조그맣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추명 오라버니, 제가 방금 말씀드린 순서대로 판석을 밟아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행이든 칠행이든 끝없이 이어지고 변화하기 때문에 어느 색부터 시작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임예린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사마 군사님의 성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자, 록 두 가지 색깔 중의 하나에서 시작할 겁니다.”

임예린의 말에 이번에는 기하진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사마 군사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 자신이 스승인 천문선생을 능가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추가한 색부터 시작하지 않았겠어요?”

임예린의 말을 듣던 사마경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문제없구나. 두 가지 색의 판석 중에 남은 것은 자색 하나이니.”

제일 앞 열의 일곱 가지 판석 가운데 청, 적, 황, 흑색은 유문위의 절단된 시신이 떨어지면서 검진이 발동하여 수십 자루의 검이 고슴도치마냥 꽂혀 있었다. 따라서 남은 것은 백, 녹, 자색 세 가지뿐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경공이 제일 빠른 석추명이 혼자 먼저 나서기로 했다. 기하진, 일봉을 비롯하여 뒤에 남은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석추명을 지켜보았다.

석추명의 발이 조심스레 자색 판석을 밟았다. 그러자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좌우의 신상이 돌아갔다. 신상이 움직이면서 허공에 숨겨져 있던 은잠사도 하나씩 사라졌다.

“됐다. 됐어! 예린아, 과연 네 말대로구나.”

석추명이 기뻐서 소리쳤다.

“이거 보아하니 아무래도 군사가 목을 내놓아야 할 것 같군.”

남궁진악의 목소리가 들렸다.

“칠행의 역변 순서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저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사마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군사의 말대로 여기까지 오는 것은 다른 문제지. 그리고 마지막 생사여탈권은 내가 쥐고 있으니 두고 보고 싶군. 과연 제대로 올 수 있을지 말이야.”

남궁진악의 뜻 모를 말이 이어졌으나 석추명과 기하진 등은 그 말뜻을 새겨볼 여유는 없었다. 석추명은 임예린이 알려준 판석의 순서대로 발을 내디뎠다. 기하진과 일봉은 천장에 박힌 검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혹시 있을지도 모를 돌발적인 상황에 대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석추명이 판석을 밟을 때마다 좌우의 석상이 움직이며 공중의 은잠사가 사라졌다. 그렇게 한 걸음씩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50여 장에 이르던 석굴도 끝에 다다랐다. 비록 검을 휘두르며 싸운 것은 아니지만 석추명은 손끝에 땀이 흥건했다. 차라리 적과 싸운다면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겠으나 보이지 않는 기문 진식과 싸우려니 몇 배나 긴장이 되었다.

석굴의 마지막 줄은 일곱 가지 색상 외에 주황과 분홍, 두 가지가 더 있어 총 아홉 가지의 채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석추명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예린아, 마지막 줄에는 칠색 외에도 주황과 분홍, 두 가지 색이 더 있구나.”

“그래요? 그렇다면 마지막은 칠행 역변의 순서를 따른 것이 아니에요. 사마 군사가 마지막에 그런 장난질을 쳐 놓았을지 몰랐군요.”

임예린의 목소리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으하하하. 이거 재미있구먼. 다시 군사의 승리인가?”

남궁진악이 마치 무슨 시합을 관전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임예린, 너의 총명함은 나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지만 마지막 아홉 가지의 변화도 풀 수 있겠느냐?”

사마경이 득의양양하게 물었다.

“흥. 마지막에 무슨 변화가 있겠어요? 군사의 마음대로 색을 추가한 것이잖아요? 주황과 분홍이라니, 취향도 참 고상하시군요.”

“오호, 그것까지 맞추다니 정말 인재는 인재로군. 자고로 천하의 음양지술 가운데 최고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맞히는 것이니라. 내가 무슨 색을 썼을지 알아맞혀 보아라.”

사마경이 빈정댔지만 임예린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린아, 걱정하지 말아라. 이번에는 운에 맡겨 볼밖에.”

석추명이 기하진과 일봉을 쳐다보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석추명은 심호흡을 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던 주황색 판석이었다.

석추명의 발이 주황색 판석이 닿자, 어디선가 스르릉, 하고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앗! 조심하시게.”

뒤따라오던 송 방주가 천장을 보며 놀라 소리를 질렀다. 석추명의 머리 위로 커다란 철창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석추명은 재빨리 피하려고 했으나 곧 위에서 떨어지는 철창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 위에서 커다란 철창 세 개가 삼중으로 동시에 떨어져 내린 것이다.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콰쾅!

곧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석추명 등 세 사람은 제일 가운데 있는 철창 안에 갇혀 버렸다. 송 방주와 개방 제자들은 그다음 철창에 갇혔다. 모두 우리 안에 갇힌 원숭이 꼴이었다.

기하진이 쇠창살을 붙잡고 힘을 주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석추명이 비천검을 꺼내들었다. 쇠창살을 잘라낼 생각이었다.

“허튼짓은 하지 않은 것이 좋을 거야.”

남궁진악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석굴 끝을 가로막고 있던 석문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문 안쪽은 반경 10여 장쯤 되는 커다란 원형의 방인데 그 한가운데 임예린이 묶여있었다.

“예린아!”

“아가씨!”

석추명, 기하진, 일봉이 동시에 소리쳤다.

“임 소저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은 내 미처 몰랐군.”

남궁진악이 낄낄거렸다.

“아, 저기 저놈도 있었지. 내 잊을 뻔했군.”

석추명이 남궁진악의 말에 시선을 옮기니 눈동자가 기이하리만큼 충혈된 설랑이 보였다. 온몸이 모두 하얀데 눈동자만 붉은색이라 그냥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설랑!”

설랑이 거친 숨을 내쉬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철창을 찢고 자신들을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석추명. 네 녀석이 비천검을 휘둘러 철창을 자를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비천검이라 하더라도 그 철창이 한두 번 칼질에 쉽게 잘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그리고 자네가 탈출시도를 하는 동안 설랑이 임 소저의 목을 따 버리는 것은 아이가 포도알을 따기만큼이나 쉬운 일이지. 흐흐흐.”

남궁진악은 둥근 석실 벽면의 중간쯤에 마련된 높다란 방 같은 곳에서 임예린과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이야, 신기한 물건을 하나 얻었어. 이 물건이 무엇인지 갑자기 자네들에게 자랑을 좀 하고 싶군.”

남궁진악이 귀령자에게서 청동방울을 건네받았다.

“이것을 흔들고 명령을 내리면 무슨 명령이든지 설랑 저놈이 듣는다고 하더군.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볼까 해. 나도 아직 제대로 못 해봤거든.”

남궁진악이 기분 나쁘게 웃으며 청동방울을 흔들었다.

“설랑, 임예린의 목을 움켜잡아라.”

설랑이 성큼성큼 임예린에게 걸어가더니 임예린이 목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숨이 막힌 임예린의 얼굴이 금방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남궁진악이 껄껄껄 웃으며 다음 명령을 내렸다.

“좋아. 설랑, 그대로 임예린의 목을 뽑아서 내게 가져와.”

남궁진악의 명령에 석추명, 기하진, 일봉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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