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세일소-180화 (180/201)

#   180 - 광세일소_한추영 - 167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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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9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5)

일봉은 만감이 교차했다. 처음에 아미파 무공을 익히려고 했던 이유는 임예린을 어떠한 위험에서도 보호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아미파 무공을 익히고 장문인 대행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맡다 보니 오히려 예전처럼 임예린을 밀착해서 호위할 수가 없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임예린이 설랑에게 납치된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천산산맥을 지나다 납치되었던 첫 번째를 제외하면 두 번 다 자신은 임예린의 곁에 없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임예린을 구해온 사람도 자신이 아니었다.

왠지 임예린에게서 자신이 자꾸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기하진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을 멈췄다. 지난 사흘을 내리 쉬지 않고 달려온 말이 투레질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설랑을 봤다는 분이 누굽니까?”

기하진이 말에서 내리며 묻자 개방 제자로 보이는 중년의 거지가 앞으로 나섰다. 허리춤의 매듭이 여섯 개인 것을 보면 개방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았다.

“장 분타주, 어서 련주님께 자네가 본 사실을 그대로 고하시게.”

개방의 송 방주가 중년 거지에게 말했다.

“이틀 전이었습니다요. 제자 놈들이 인근 폐사당 옆에서 닭고기와 개고기로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습죠. 그날은 저희 분타에서 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요. 왜냐하면 이곳 구강현(九江懸)에서 가장 유명한 만화객잔(萬華客棧)의 인기 요리, 거지 닭을 먹는 날이었기 때문입죠. 거지 닭이 무엇이냐 하면―”

“어허, 장 분타주,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련주님께 본론만 말씀드리게. 본론만.”

송 방주는 개방의 분타주가 정도련의 수뇌부 앞에서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이자 인상을 찌푸렸다.

“예. 방주님. 그렇지 않아도 이제 본론이 나옵니다요. 아, 그런데 온몸이 허여멀건 한 놈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우리가 먹던 거지 닭을 훔쳐가 버렸지 뭡니까?”

장 분타주는 흥분해서 얘기하다가 갑자기 자신이 말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주위 눈치를 보며 얼른 말을 바꾸었다.

“아, 제가 먹던 게 아니고 제자 놈이 먹던 것이지요, 흐흐흐. 아무리 훔칠 것이 없어도 그렇지, 비렁뱅이가 먹는 것을 훔쳐가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요? 그래서 혼쭐을 내줄 요량으로 제자들과 함께 뒤쫓아갔지요. 그런데 그놈이―”

“혹시 그 사람이 20대 초반의 여인을 데리고 있었습니까?”

마음이 급한 석추명이 장 분타주의 말을 막고 물었다.

신임 방주에게 눈도장을 한 번이라도 더 찍으려고 침이 튀기도록 이야기를 풀던 장 분타주는 갑자기 자신의 말이 가로막히자 석추명에게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뭔데 내 말을 가로막냐는 눈빛이었다.

“이분은 화산신검이신 석 대협일세. 어서 아는 대로 말씀을 올리게나.”

송 방주가 다시 나섰다. 화산신검이라는 말에 장 분타주가 놀라서 눈썹을 한껏 추켜 올렸다.

“아이고, 대협께서 비천검 독고양 신선의 제자라는 바로 그 화산신검이시로구먼요. 천하제일검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요.”

장 분타주가 또다시 엉뚱한 소리를 하자 송 방주는 기가 막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젊은 개방제자 하나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장 분타주의 허리춤을 잡아 뒤로 슬그머니 끌며 자신이 얼른 대답했다.

“예. 젊은 처자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먼 길을 여행했는지 안색이 초췌하고 의복이 남루했으나 한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갔습니까?”

석추명이 초조한 기색으로 젊은 개방제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자의 걸음이 워낙 빨라 금방 놓치고 말았으나 서창현(瑞昌懸)으로 가는 방향이었습니다.”

“서창현이라면 여기서 서쪽으로 곧장 가면 나오는 마을입니다. 이상하군요. 설랑의 흔적이 처음 발견되었던 황산 근처에서 여기까지 설랑은 계속 서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서쪽으로 가다니.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일봉이 신중한 기색으로 의견을 냈다.

“서쪽이라....”

석추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주위에 소란이 일더니 개방제자 두 명이 바람같이 달려와 송 방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경공 무공이 대단한 것이 장 분타주의 수하들은 아닌 듯했다.

“방주님, 통산현(通山懸)에서 오결 제자 세 명이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끔찍하여 차마 볼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개방 제자가 변사체로 발견된 것은 중차대한 문제였다. 개방은 천하제일의 방파. 오결 제자라면 무공이 낮은 것도 아닌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석추명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변사체의 모양이 어땠습니까?”

타 문파의 내부 사정은 들어도 모른 척하는 것이 강호의 법도지만 석추명은 마음이 다급하여 결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방주에게 보고를 올리던 제자들은 갑자기 외인인 석추명이 끼어들자 앞서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괜찮으니 석 대협께 말씀을 드리거라.”

방주의 명에 제자들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한 명은 목이 뽑혀 나가고 다른 두 명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합니다.”

개방 제자들의 말을 듣는 순간 일봉과 기하진이 동시에 외쳤다.

“설랑이다.”

설랑의 짓이 분명했다. 세 개방 제자가 살해된 모습이 소림사에서 변을 당했던 승려들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새 놈이 통산현까지 갔나 봅니다. 더 지체할 것 없이 당장 갑시다.”

기하진이 말 등에 올라타며 앞장섰다. 그러자 석추명, 일봉도 즉시 말에 올라타고 기하진과 나란히 서서 말을 달렸다. 함께 왔던 송 방주와 개방 제자 몇 명도 급히 뒤를 따랐다.

“통산현이라면 서창현에서 또 서쪽입니다. 설랑 그놈이 황산에서부터 계속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슨 까닭이 있을까요?”

일봉은 이전에 천린상단의 물품수송 호위업무를 겸임했었기에 각 지역의 지리에 대해 제법 소상히 알았다.

“내 생각에는 설랑이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유인하려고 말이지요.”

전방을 주시하는 기하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놈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그놈 계략에 분명히 빠지고 말 겁니다.”

“그래. 하지만 그놈이 예린이를 데리고 있는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속는 줄 알아도 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옆에서 나란히 말을 달리던 석추명이 덧붙였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석추명 말마따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석추명, 기하진, 일봉 옆으로 개방의 송 방주와 보고를 올렸던 개방 제자 전원기가 말을 타고 가까이 다가왔다. 원래 개방 제자들은 말을 타지 못하도록 방규에서 엄히 금하고 있었으나 사안이 중대한 만큼 이번만큼은 송 방주가 예외로 하기로 했다.

“통산현에서 서쪽으로 가면 어디가 나옵니까?”

석추명의 물음에 전원기가 대답했다.

“동정호가 나옵니다.”

동정호라는 말에 기하진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예상대로 맹주 남궁진악이 뒤에 있었군요. 동정호 악양루에서는 단오절에 보기로 했는데 벌써 우리를 그쪽으로 유인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듯합니다.”

“맹주가 판을 벌인다면 그에 맞춰 놀아줘야겠지.”

“통산현은 들를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악양루로 바로 갑시다.”

기하진의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

시성(詩聖) 두보와 시선(詩仙) 이백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악양루의 누런 지붕이 멀리 동정호를 배경으로 눈앞에 드러났다. 마침 해가 저물 때라 동정호 수면이 금가루를 뿌린 듯 반짝이고 있었다.

석추명과 기하진 일행이 악양루에 당도하니 누각으로 가는 길에 붉은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미녀 네 사람이 손에 등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석추명과 기하진, 일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누구냐고 물어보려는데 네 미녀가 돌연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절을 했다.

“세 분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네 미녀는 두 명씩 짝을 맞춰 앞뒤로 선 다음 등롱을 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좌우에 늘어선 여인들의 몸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움직일 때마다 붉은색의 부드러운 비단이 하늘거려 신비한 느낌 마저 주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임예린에 대한 걱정으로 눈앞에 있는 미녀들의 모습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일각쯤 지나자 길이 변하더니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가니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그 사이 평지에 규모를 짐작하기도 어려운 거대한 장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원의 대문 양옆에는 사람 키보다 더 높은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떡 하니 버티고 서서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천검장(千劍莊)”

일봉이 대문 지붕 밑에 달린 현판을 읽었다.

이 정도 규모의 장원이 무림세가라면 강호에 이름이 알려지고도 남았을 텐데 세 사람 모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요? 왜 우리를 이쪽으로 데리고 온 것이오?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기하진이 네 여인을 쏘아보며 연달아 물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시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네 여인 중 맏이로 보이는 여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기하진은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천검장이라고 새겨진 현판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자꾸나.”

석추명이 망설이지 않고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 뒤를 따라 일봉이 대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차가운 눈빛으로 경계하던 기하진도 마지못한 듯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 안에는 자주색 비단옷을 입은 또 다른 여인 네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오시지요.”

기하진과 석추명, 일봉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라왔던 송 방주와 개방 제자들도 함께 들어가려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붉은 옷을 입은 네 여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분들은 들어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네 여인 중 맏이로 보이는 여인이 말했다.

“무슨 소리요? 우리는 같이 왔소이다. 일행이란 말이오.”

“장주님께서 앞서 들어가신 세 분만 초청하셨으니 다른 분들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여인의 단호한 말에 전원기가 씩씩거리며 항의했다. 기하진 등 새파랗게 젊은 세 사람은 들어가는데 자신의 방주는 못 들어가게 하니 억울한 기색이었다.

“뭐요? 사람 차별하는 것이오? 이분은 중원 남북의 10만 개방 제자들을 호령하시는 송 방주님이시오. 그래, 우리 방주님도 못 들어가신단 말이오?”

하지만 전원기의 항의에도 네 여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허락되지 않은 분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뭐야?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전원기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튀어나오자 금세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천검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려면 목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공손하던 여인의 말투가 차갑게 바뀌었다.

“이런 우라질! 오냐. 어디 큰소리칠만한 실력인지 한번 보자.”

전원기가 죽봉을 앞으로 꺼내 들더니 앞에 있는 여인을 후려쳤다. 전원기는 분타주급인 개방의 육결 제자로 무공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여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전원기는 욱하는 마음에 나섰다가 여인이 피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금세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의 죽봉에 맞으면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질 텐데 말 한마디 좀 심하게 했다고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전원기가 후려치던 죽봉을 거두어들이려는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붉은 비단 천 두 개가 날아오더니 죽봉을 휘감았다. 그다음 순간, 우지끈 소리와 함께 죽봉이 반 토막이 나는 것이 아닌가. 죽봉은 탄력이 있어 휠망정 쉽게 부러지지 않는데 고작 비단 천 쪼가리 따위로 죽봉을 부러뜨리는 것을 보면 대단한 고수가 분명했다.

전원기가 놀라서 눈을 들어보니 네 여인 중 양쪽 끝에 서 있던 두 여인이 붉은 비단 천을 잡고 있었다. 전원기의 죽봉이 단번에 부러지자 뒤에 서 있던 나머지 개방 제자들이 즉시 앞으로 나서며 싸울 준비를 했다.

“소란 떨지 말고 모두 물러나라.”

송 방주는 한눈에 네 여인의 무공이 전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방의 무공 총교두인 진국충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전원기나 다른 제자들로는 무리였다.

게다가 임예린을 구하러 온 마당에 자신들이 굳이 소란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방주인 자신의 앞에서 개방 제자가 수모를 당했으니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내 제자들이 무례한 점 소저들께 대신 사과드리겠소이다. 그리고 장주님을 좀 만나 뵙고 싶은데 얘기를 해줄 수 있겠소이까?”

송 방주가 노여움을 참고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하오나 장주님께서 먼저 명을 내리지 않는 한, 외부인이 장주님을 만나 뵐 수는 없습니다.”

또다시 축객령이었다. 천검장 장주가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방 방주인 자신을 문전박대하는 것은 10만 개방 제자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천검장 장주께서는 황제 폐하이신가 보오. 이렇게 만나기가 어렵다니.”

송 방주가 껄껄껄 웃었다.

“장주께서 우리 같은 비렁뱅이들은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니 별수 있나. 대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는 수밖에.”

송 방주가 대문 바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홍삼 미녀들은 일파의 장문인이 남의 집 대문 앞에 주저앉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터라 깜짝 놀랐다.

“개방 방주께서 이 무슨 체통 없는 짓입니까?”

“허허허, 우리 개방은 비렁뱅이 집단 아니겠소? 방주란 거지 왕초니 흙바닥에 좀 주저앉는다고 별로 이상할 것은 없소.”

송 방주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홍삼 미녀 두 명이 붉은 주단을 던져 송 방주의 양팔을 휘감았다. 송 방주를 문 앞에서 끌어낼 요량이었다.

아까 두 미녀의 주단에 전원기의 죽봉이 부러져 나가던 모습을 본 터라 개방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즉시 죽봉을 빼 들며 방주를 호위하려 했다.

“내 이 소저들과 잠시 장난을 치는 것뿐이니 염려할 것 없다.”

방주가 만류하자 개방 제자들은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홍삼 미녀들은 즉시 두 팔로 주단을 잡아당겼지만 송 방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나머지 두 명도 송 방주에게 주단을 던지며 합세했다.

네 여인이 송 방주의 팔을 휘감고 사력을 다해 주단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주단 네 개가 끊어질 듯 팽팽해졌다. 하지만 송 방주는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네 여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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